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감시당하는 일이다.
물론 나는 삼백 년 동안 수많은 정찰병을 고용했다. 적의 성벽 높이, 식량 창고 위치, 장군들의 가족 관계까지 조사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과 남이 나에게 하는 것은 기분이 다르다.
“전하. 문서의 인장을 떼어 냈습니다.”
마렌이 보고했다.
“그러면 끝이냐?”
“아니요. 기록 실이 한 번 열리면 흔적이 다른 물건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나는 대전의 벽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촛대, 의자, 기록 장부, 심지어 레온이 안고 자던 천 곰까지.
그중 어느 것이 눈이 되어 우리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전부 부숴 버리면…….”
“안 됩니다.”
미아가 즉시 말했다.
“아이 물건까지 부수실 생각이세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옛날의 나라면 성 하나를 통째로 불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못된 물건을 부수면 레온의 좋아하는 인형까지 사라진다.
“그럼 방법을 찾아라. 아이 방은 먼저 확인하고.”
마렌은 수정판에 낮은 빛을 흘렸다.
그 빛이 방 안을 천천히 훑고 지나가자, 물건마다 작은 문자들이 떠올랐다.
촛대에는 '조명'.
의자에는 '가구'.
곰 인형에는 '놀이'.
그리고 아이 방 문에는 낯선 글자가 나타났다.
'증언 보류.'
나는 그 글씨를 바라보았다.
“누가 증언을 막고 있지?”
마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마렌을 서고로 보내 옛 기록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했다.
그 사이 나는 아이 방 앞의 긴 복도에 홀로 섰다. 복도에는 내가 정복한 도시들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인간 왕국의 사자, 드워프 도시의 망치, 북부 마족들의 검은 별.
그 깃발들은 내게 복종한 사람들을 뜻했다.
나는 그 앞을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누구를 지배했는지는 세상이 기억한다. 그런데 내가 누구에게 길러졌는지는 나조차 몰랐다.
세상의 기록은 무언가를 크게 남기고 무언가를 아주 작게 만든다.
마렌이 돌아왔다.
“전하. 북부 노역대 기록에서 나이라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존 문서를 새로 읽으면 글자가 흩어져요.”
“그녀가 살아 있는데도?”
“예. 누군가 이름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주변 기억까지 바뀌는 것은 더 위험합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나이라를 만나고서 무엇이 달라졌지?”
마렌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자기 출생 기록이 지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셨죠. 그리고 나이라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록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군.”
나는 창밖을 보았다.
붉은 별은 없었다.
하지만 없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나는 손바닥에 검은 불꽃을 피웠다가 껐다.
이 싸움에선 불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이라의 이름을 지키려면 그 여인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지키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마왕이 내린 명령보다 여러 사람의 기억이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나는 그 힘을 배워야 했다.
***
그날 밤, 무명탑에서 나이라가 도착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낡은 수레와 검은 버드나무 상자 하나를 끌고 왔다. 상자 안에는 나이라가 보관해 온 천 조각, 금속판, 그리고 아이들의 이름을 적은 오래된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이건 내 기록이야.”
그녀가 말했다.
“신성 기록실에서는 수없이 지웠겠지만, 손으로 수놓은 건 쉽게 지우지 못했지.”
엘라는 그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아주 오래된 것이구나.”
“그렇지. 나도 늙었으니까.”
두 여인은 마치 옛 친구처럼 서로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둘이 레온을 함께 돌보면 나는 더 이상 아이 방에서 큰소리를 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엘라 하나에게도 밀리고 있는데.
“카르딘.”
나이라가 나를 불렀다.
나는 흠칫했다.
삼백 년 동안 누구도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전하', '폐하', '마왕님'이라고 했다.
“왜?”
“아이 방을 보자.”
나는 길을 비켰다.
나이라는 레온을 보자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닮았구나.”
“누구와?”
“너와.”
나는 코웃음 쳤다.
“은빛 눈을 가진 인간 아기가 나와 닮았다고?”
“얼굴이 아니라 손이.”
그녀가 레온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잠든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는 습관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나이라는 아이 방 문에 나타난 글씨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증언 보류라니. 이건 그들이 쓰던 방식이야.”
“무명탑의 기록실인가?”
“그래. 누군가 진실을 말하기 직전에 그 사람의 이름을 기록에서 잘라 버리는 장치지.”
“그럼 나이라 네 이름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를 데리고 도망친 뒤부터였어. 신성 기록실은 내가 누군지 알려 주는 사람을 하나씩 없애려 했지. 기록을 없애고, 내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만 남긴 거야.”
나는 어릴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던 이유.
누군가 나이라를 기록에서 지웠기 때문이었다.
“왜 넌 아직 살아 있지?”
나이라는 손수건을 펼쳤다.
“이름을 하나도 적어 두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를 쉽게 잊어. 하지만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조금은 남아 있을 수 있어.”
그때 유진이 빛의 판을 들었다.
'저도 이름을 기억했어요.'
나이라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엘라가 유진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마렌. 이 성에서 이름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되, 그들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라. 그리고 나이라의 기록부터 복구해.”
“그러면 중앙 기록실이 우리를 더 강하게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나이라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 상태로 숨어 있는 게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나이라는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적어 줘.”
복구를 시작하기 전에 나이라는 오래된 손수건을 들고 잠시 망설였다.
“카르딘. 내 이름을 다시 쓰면 예전의 일도 드러날 거야.”
“그럴 수 있겠지.”
“그때 나는 실수도 많이 했어. 아이들을 다 지키지 못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더 작게 물었다.
“그래도 적어도 되겠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허락받을 일이 아니다. 네 이름이니까.”
그녀가 입술을 떨었다.
“이상한 말이구나. 그렇게 어린애였던 네가.”
나는 웃음이 났다.
“이제 삼백 년은 넘게 살았는데.”
“그래도 내게는 그때의 네가 남아 있어.”
나이라는 손수건의 첫 글자를 쓰다듬었다.
“내가 네게 이름을 지어 줬을 때도 두려웠어. 기록실이 알아채면 네가 위험해질까 봐. 그래서 그 이름을 아주 작게 불렀지.”
“지금은 크게 불러도 된다.”
“그래도 되겠니?”
“그렇다.”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카르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오래전 어둠 속에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그 순간 아주 희미한 기억 하나가 돌아왔다.
작은 침대 옆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사람은 무섭지 않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그 장면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그 손의 주인이었는지 알았다.
“나이라.”
“응.”
“돌아와 줘서 고맙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말도 처음으로 듣는 것 같았다.
***
마렌이 장부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나이라.'
첫 글자가 새겨질 때 촛불이 한 번 흔들렸다.
두 번째 글자가 적히자 창문에 금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 글자가 완성되자.
아이 방 문에 붙었던 '증언 보류'라는 글씨가 붉게 변했다.
[삭제 예정 대상 복구 감지.]
[연쇄 기억 복구 차단 개시.]
마렌이 장부를 덮으려 했다.
나는 손을 뻗었다.
“계속 적어라.”
“전하, 성 전체의 기록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벽에 걸린 초상화에서 얼굴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인들의 이름이 적힌 표찰들이 비어 갔다.
바르톨이 검을 뽑았다.
“적이 어디 있습니까!”
“적은 여기 없다.”
나는 대답했다.
“기록을 이용해 우리가 서로를 잊게 만드는 거다.”
그 말이 끝나자 내 손에서 따뜻한 것이 사라졌다.
무엇이었지?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곰 인형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것을 갖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렌이 비명을 질렀다.
“전하, 유진의 이름이 장부에서 사라졌습니다!”
유진은 빛의 판에 급히 글을 적었다.
'여기 있어요!'
나는 그를 보았다.
얼굴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아는 아이였다.
그런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것이 기록의 공격이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도 곁에서 지워 버리는 방법.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아!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라!”
나이라는 손수건을 펼쳤다.
“노래를 불러야 해!”
“그 자장가 말이냐?”
“그래. 마지막 음을 부르지 마. 기억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종이 끝을 찾지 못할 거야!”
나는 입을 열었다.
평생 전장에서는 명령을 외쳤다.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음을 하나씩 불렀다.
내 목소리는 좋지 않았다. 마렌은 박자를 놓쳤고, 바르톨은 불협화음을 냈다.
하지만 미아가 가락을 이어 부르고, 엘라가 낮은 음을 붙이자 노래는 끊어지지 않았다.
유진이 빛의 판에 적었다.
'유진.'
나는 그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유진.”
그 순간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유진, 거기 있어라.”
그가 웃었다.
나는 이 우스운 합창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마왕군의 장군과 시녀장, 산파와 기록 마법사와 이름 없는 아이가 함께 노래한 밤.
누군가의 이름을 붙잡기 위해.
***
마지막 음을 남겨 둔 자장가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창이 밝아질 무렵 붉은 글자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마렌은 무너질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전하. 기록 복구는 성공했습니다. 다만 감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다.”
나는 나이라의 손수건을 접었다.
그녀의 이름은 장부에 남았다. 유진의 이름도 돌아왔다. 아이들의 얼굴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하지만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나는 레온이 잠든 방으로 갔다.
아이는 내 얼굴을 보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기억했다.
그 아이가 잡으려는 것은 내 손가락이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전, 그 아이가 내게 처음으로 웃었던 순간을 잊고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기억이 대가로 사라진 것이다.
나는 레온을 안아 올렸다.
“미안하다.”
누구에게 하는 사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너를 처음 만난 날을 또 잊을 뻔했구나.”
레온이 내 턱을 잡아당겼다.
나는 웃었다.
“그래. 다시 알려 주겠다는 것이냐?”
그날부터 나는 레온에 관한 작은 기록들을 쓰기 시작했다.
신의 장부가 아닌, 내 손으로 쓰는 일기였다.
오늘 웃었다.
오늘 울었다.
오늘 내 턱을 붙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하찮아 보이는 기록들.
하지만 내게는 어떤 전쟁 연대기보다 중요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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