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에 찍힌 도장이 살아 움직인다고 하면 대부분은 믿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믿지 않았을 것이다.
마왕성의 회계감사관이 세금 장부를 들고 뛰어다니기 전까지는.
“전하! 도장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도장?”
“천계에서 보내온 회수 명령서의 도장입니다. 종이에서 빠져나와 벽에 붙었어요!”
나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벽에는 작은 은빛 원이 떠 있었다. 그 원 안에서 낯선 손이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보호 실패 확인]
[담보 회수 준비]
나는 손가락으로 원을 눌렀다.
잉크가 아니라 차가운 금속 같은 감촉이었다. 그 안에서 오래된 명령이 같은 방향으로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이게 쿠렌인가?”
노엘이 돋보기를 들고 다가왔다.
“사람은 아닙니다. 그가 남긴 자동 승인 회로예요. 오래전에 죽었더라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럼 누가 지금의 사건에 맞춰 문구를 바꾸었지?”
“회로가 미리 정의한 조건을 읽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지키는 데 실패'라는 입력만 들어오면 무조건 승인하도록요.”
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심사가 아니에요. 결론을 먼저 만든 뒤 증거를 골라 넣는 겁니다.”
“그래. 이제 그 말은 네 전문 분야에서 나보다 잘 알겠군.”
그녀는 내 농담에 웃지 않았다.
“카르딘. 이 회로가 제0기록고의 담보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면 오늘 밤부터 당신 기억이 조금씩 사라질 수 있어요.”
***
나는 즉시 아침에 무엇을 했는지 적기 시작했다.
레온과 나눈 대화, 영이 어제 고른 신발, 이안이 처음으로 그린 지도, 미아가 접시에 남겨 둔 당근까지.
바르톨이 장부를 보더니 감탄했다.
“전하께서 드디어 육아 일지를 쓰시는군요!”
“기억 검증용이다.”
“같은 것 아닙니까?”
나는 펜을 멈췄다.
어쩌면 놈 말이 맞았다.
한 사람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오늘 무엇을 좋아했는지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기록은 나 혼자 쓰지 않았다. 미아에게는 아이들이 말한 내용을, 영에게는 자기 기분을, 레온에게는 자기 그림 제목을 직접 적어 달라고 했다.
“이건 거짓말하면 안 돼?” 영이 물었다.
“왜 거짓말을 하려고?”
“오늘 아저씨가 화난 것 같았다고 쓰고 싶은데, 사실은 조금 웃기도 했거든요.”
“둘 다 써라.”
“그럼 아주 길어지잖아요.”
“내가 지켜보니 기록은 길수록 좋을 때가 있더라.”
영은 혀를 내밀고 종이에 한참 낙서를 했다.
***
정오가 되기 전, 미래의 레온이 나를 찾아왔다.
“어제 싸운 장면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무슨 싸움?”
“붉은 별 제단에서 함께 장치를 끊었잖아요. 그때 제가 한 말을 기억하세요?”
나는 순간 대답할 수 없었다.
성검이 검은 실을 잘랐던 빛은 기억났다. 그러나 그 직전에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희미했다.
나는 두통을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시작됐군.”
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제가 기록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저 혼자 정답을 정하지는 않을게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한 대화를 들으면서도 내 손에 적힌 다른 기록과 비교했다. 기억을 되찾으려는 욕심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사실로 굳히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노엘은 장부의 모서리마다 날짜를 적었다. 마렌은 같은 내용을 성 밖의 독립 기록고에도 보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기록을 서로 대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않나?” 바르톨이 물었다.
“맞습니다.” 라기스가 답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장부만 믿지 않는 겁니다. 수정 날짜와 증인의 기록이 일치하는지 보죠.”
바르톨은 감탄했다.
“마왕성 최고 회의보다 더 엄격한데요.”
“너희가 저녁 식단을 보고할 때에도 이 정도로 엄격했으면 좋겠다.” 내가 말했다.
“전하, 지난주 당근 재고가 사라진 사건은 아직 조사 중입니다.”
“범인은 레온이다.”
“어떻게 아십니까?”
“화분에 숨겼다가 내가 봤다.”
바르톨은 진지하게 보고서를 고쳤다. 그런 모습을 보자 잠시 웃음이 났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걱정이 남았다. 쿠렌의 회로가 오늘의 기억부터 지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수백 년 전의 전쟁 기억보다 아이들이 건네는 작은 선물을 먼저 빼앗아 가려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레온의 낙서 한 장을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림 속 내 얼굴에는 커다란 뿔이 세 개 달려 있었다. 나는 뿔이 둘뿐인데.
기록의 정확성은 중요하지만, 아이가 내게 준 선물은 틀린 그림이어도 소중했다.
***
우리는 쿠렌의 자동 승인 회로를 분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작정 부수지는 않았다. 회로가 제0기록고의 문을 함께 붙들고 있었다. 억지로 끊으면 세린의 의사 기록도 손상될 수 있었다.
노엘이 작은 모래시계를 꺼냈다.
“한 시간 동안 판정 신호만 늦출 수 있는 장치입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한가?”
“어디로 명령이 가는지 확인할 시간은 됩니다.”
나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벽에서 튀어나온 은빛 원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담보 회수 경로: 시작점 확인]
[회수 저장처: 제0기록고 외부]
[목적지: 회색 언덕 지하]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0기록고가 아니라 보육관 지하라고?
“그럼 최초 기억은 창고에 없었던 건가?”
리엔이 답했다.
“창고에는 열람 기록만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맡긴 기억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요.”
그때 손에 든 노트에서 문장 하나가 사라졌다.
[어린 레온이 오늘 아침 꿀을 달라고 했다.]
그 자리에 흰 종이만 남았다.
나는 숨을 삼켰다.
과거의 거대한 전쟁은 또렷한데 오늘 아침 아이가 웃은 일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내 첫 기억을 회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아이를 지킬 마음 자체를 없애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17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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