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약서를 싫어하지 않는다.
영토를 양도받을 때도, 포로를 돌려보낼 때도, 용병에게 월급을 지급할 때도 서류가 필요하다. 말로 한 약속은 전쟁이 끝나면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서명이 있는 계약서가 나타났는데 정작 서명한 기억이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도 세상을 스무 해 되돌린 계약이라면 더더욱.
***
새벽의 마왕성 서재에는 잉크 냄새 대신 미지근한 우유 냄새가 났다. 나는 레온을 재운 뒤에도 병을 치우지 못했다. 녀석이 한 번 더 물을 달라고 깨는 바람에 책상 옆에 그냥 두었기 때문이다.
마렌이 보낸 수정판에는 문서 세 장이 떠 있었다.
[회귀 승인 원본]
[신청인: 카르딘]
[신청 사유: 예언의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미래를 남길 것]
[담보: 신청인의 최초 기억]
[회수: 보호를 포기하는 날]
나는 서명 옆의 마력 흔적을 살폈다. 내 것이 맞았다. 단순한 위조였다면 손톱 끝에 걸린 잔향이 이렇게 정확할 리 없었다.
하지만 서명의 획은 달랐다. 평소 내 서명은 시작이 날카롭고 끝이 길다. 이 문서에는 끝획이 두 번 끊겨 있었다. 펜을 쥔 손이 떨렸던 것처럼.
“죽어 가던 사람이 썼다면 가능하겠군.”
내가 혼잣말하자 열린 문 쪽에서 대답이 들렸다.
“그때 당신 손은 이미 성검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레온이었다.
청년은 잠옷 위에 외투만 걸쳤다. 요즘 그는 검보다 수프 그릇을 잡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도 야간 경계병처럼 발소리가 없었다.
“넌 안 자나?”
“서재 불빛이 켜져 있어서요.”
“내 방 불빛까지 감시하는 건가?”
“습관입니다. 전쟁 중에는 지휘관 방에 불이 켜지면 나쁜 소식이 있었거든요.”
나는 수정판을 돌려 주었다.
레온은 문서를 읽더니 유난히 오래 서명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제 손목을 잡았어요.”
“그랬나?”
“네. 제가 검을 빼려 하자 놓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주를 거는 줄 알았죠.”
“그때라면 얼마든지 저주했을 수 있지.”
“아니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제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분명히 들은 말은 하나뿐이에요. '다음에는.'”
다음에는.
나는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패배한 왕이 복수를 맹세할 때 쓰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문서의 사유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넌 나를 죽였다. 내가 다시 살아날 줄은 몰랐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 서명이 왜 여기 있지?”
“저도 답을 몰라요. 다만 서명 옆에 작은 자국이 있습니다.”
레온이 가리킨 곳에는 검은 얼룩이 두 개 있었다. 나는 처음에 마력 누수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성검의 날이 긁은 흔적이고, 다른 하나는 손가락 끝이 눌린 모양이었다.
“한 사람의 인장이 아닌가?”
“기록을 보존할 때 누군가 곁에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겠죠.”
내 서재의 시계가 세 번 울렸다.
그때 문밖에서 바르톨의 갑옷 소리가 들렸다.
“전하! 불침번 중 이상 보고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또 무엇이냐?”
“어린 레온 님께서 주방을 정복하셨습니다!”
내가 벌떡 일어섰다.
“왜?”
“물 대신 꿀을 드시겠답니다. 미아가 협상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미간을 눌렀다.
천계의 회귀 계약보다 더 급한 교섭이 벌어지고 있었다.
***
주방에서 레온은 두 손으로 작은 꿀단지를 붙잡고 있었다. 미아가 단지를 빼앗지 않고 옆에 앉아 설명했다.
“한 숟갈만, 그리고 물.”
“두 개.”
“오늘은 한 숟갈.”
아이는 잠시 나를 보더니 물었다.
“아빠도?”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는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도 물잔을 놓았다.
“두 분 다 먼저 물부터 드세요.”
마왕 카르딘과 미래의 용사를 쓰러뜨린 최강의 교섭인이 미아라는 사실을 오늘도 인정해야 했다.
레온이 물을 마시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녀석은 꿀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고, 미아는 이유를 설명하며 다른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 누구도 아이 손에 도장을 쥐여 주지 않는다.
그런데 천계는 사람 하나의 기억을 담보로 세상을 되돌리고도 신청서의 작성 경위를 알려 주지 않았다.
나는 수정판을 잠시 껐다가 다시 켰다. 혹시 원본이 아닌 사본이 문장을 왜곡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변화는 없었다. 글씨의 끝과 잉크 번진 자리까지 같았다.
미래의 레온이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마지막 전투에서 당신은 숨을 가쁘게 쉬었지만, 제게 검을 놓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뭘 원했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이기는 것만 생각했으니까요.”
우리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오래전의 원망을 쏟아낼 수 있었다. 녀석도 내가 벌였던 전쟁의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테이블 위에는 서명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죽음 직전의 내가 무슨 결정을 했는지 확인하는 일이 먼저였다.
“이 원본을 네가 읽어도 괜찮겠나?” 내가 물었다.
“당신 기억인데 제가 먼저 읽어도 됩니까?”
“이미 네가 본 부분은 함께 확인하고 싶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문서 옆에 서로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나란히 적었다. 처음부터 일치하는 항목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 기록 작업이 조금 쉬워졌다.
***
아침이 밝자 나는 마렌에게 답장을 보냈다.
'원본을 봉인하지 마라. 계약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 성립했는지 순서대로 확인하라. 특히 그 옆에 있던 두 번째 흔적의 주인을 찾아라.'
곧 응답이 왔다.
[검증 중]
[최초 접수 장소: 시각시 제0기록고]
[동반 신청인: 공란]
[참관인: 기록 없음]
마지막 줄이 한동안 깜빡였다.
[주의: 최초 기억의 열람은 담보 회수 절차와 동일하게 처리될 수 있음]
나는 웃음이 나왔다.
기억을 찾으려 하면 기억을 빼앗겠다고?
“서류 한 장으로 사람을 협박하는 솜씨만큼은 신들도 훌륭하군.”
나는 문서를 덮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빈칸이 있었다. 빈칸을 채우기 전에 그 자리에 사람을 집어넣는 실수는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제0기록고.
우리는 이미 시각시에 다녀온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진 창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제17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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