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시의 원점 저장고는 지하 일곱 층에 있었다.
첫 번째 층은 차가웠고, 두 번째 층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세 번째 층에 들어서자 벽의 이끼가 거꾸로 자라고 있었다. 네 번째부터는 발소리가 실제보다 늦게 들렸다.
나는 이런 장소에 왜 의자를 놓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장고 가장 깊은 곳에 나무 의자 한 개가 있었다. 낡은 등받이, 다리 하나에 감긴 붉은 실, 그리고 옆에 놓인 아주 작은 컵.
영이 그린 그림과 똑같았다.
“이건 실제로 있는 물건이었군.”
라기스가 컵을 살펴봤다.
“잔류 구역을 만든 모형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안쪽 방이 이 장소를 복제한 것일 수도 있고요.”
“아이가 나올 때 이 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뜻인가?”
“아직 모릅니다.”
나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의자 곁의 바닥에는 원형 홈이 있었고, 그 둘레에 이름표를 끼우는 장치가 있었다. '정본' 한 칸, '잔류' 한 칸. 두 칸 가운데에는 거대한 자물쇠가 놓여 있었다.
그 순간 천장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정본 규칙 폐기. 일치 여부 확인 불가. 전체 기록 소거.]
“멈춰라.”
[명령 수행 중.]
“어린 영이 아직 안에 있다.”
[미등재 신원은 보호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화를 낸다고 기계가 사람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라기스. 기록 소거와 통로 유지 회선을 분리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 단, 저장고 전력을 완전히 끊으면 안쪽 방의 공기와 빛까지 없어질 수 있어요.”
“그렇다면 전력을 끊지 마라. 명령만 분리하자.”
브람은 이미 양쪽 감시인과 연결하고 있었다.
“등대의 영에게 상황을 알리겠습니다. 통신은 유지돼 있습니다.”
“위험하다는 것만 설명하되 아이를 겁주기 위해 기계의 말을 그대로 전하지는 말아라. 어디로 물러나면 안전한지도 같이 알려 줘.”
***
나는 자물쇠 앞에서 옛날 기억을 더듬었다.
아르헨과 문턱을 넘던 날, 나는 신발 한 짝을 잃었다. 그리고 다른 영의 손을 잡았던 것 같다. 그 아이는 나였을까, 아니면 나와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다른 사람일까.
내가 알고 싶은 진실은 많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안에 있는 아이는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선택을 가로막을 권리를 누가 갖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자물쇠 옆에 작은 명판이 있었다.
[기존 귀환자 승인으로 잔류자 지위 변경 가능]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직도 내 승인부터 요구하는군.
“내 이름을 쓰면 그 아이가 나오는 것인가?”
[기존 귀환자가 잔류자의 권리를 양도할 경우 가능합니다.]
“권리를 양도한다고?”
[정본 지위 포기. 정본 귀환 기록 소거.]
명확했다.
내가 나를 지우면 아이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예전의 나였다면 거절할 수 없는 영웅적 희생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를 기다리는 레온이 있고, 내 손으로 지킨 나라가 있으며,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계속 책임져야 할 삶이 있었다.
내가 사라져야만 아이가 돌아온다면, 장치는 또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거절한다.”
[잔류자 소거를 승인하십니까?]
“그것도 거절한다.”
[유효한 선택 없음.]
“아니. 선택은 있다.”
나는 라기스에게 손짓했다.
“두 이름표를 모두 빼라.”
“전하, 잠금장치가 반응할 텐데요.”
“이름표를 지우는 게 아니라, 어느 쪽이 정본인지 가르는 장치를 비우는 거다. 기록은 따로 보존한다.”
라기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름표 하나를 뽑아 저장고의 별도 기록판에 옮겼다. 다음 이름표도 따로 옮겼다. 이제 자물쇠는 누구를 먼저 열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었다.
기계가 격하게 떨렸다.
[선택 누락. 정본 식별 불가.]
[소거 명령 중지. 운영자 재지정 필요.]
“좋아.”
나는 바르톨에게 말했다.
“종루에 남은 종이띠를 모두 가져오되, 원본의 순서를 기록해라.”
“예, 전하!”
“그리고 어떤 이름도 찢지 마라.”
“……베는 일이 아닙니까?”
“아니다.”
바르톨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오늘도 검이 놀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네가 더 훌륭한 병사가 됐다는 뜻이다.”
그는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전하. 혹시 이게 칭찬입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마왕군 비검 전투 부대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칭찬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
우리가 찾은 방법은 대단한 마법이 아니었다.
저장고의 운영자 권한을 한 명에게 몰아주지 않고, 기록을 보관하는 사람과 출입을 확인하는 사람을 분리했다. 등대에서 실험한 독립 시계를 다시 연결하되, 이름이나 출생일 대신 통로 자체의 안정만 확인하게 했다.
그동안 영은 문 안에서 계속 통신을 받고 있었다.
'아저씨.'
“왜?”
'의자에 앉아도 돼요?'
나는 숨을 멈췄다.
“왜 의자에 앉고 싶지?”
'다리가 아파요.'
그 대답은 너무 평범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래. 네가 앉고 싶다면 앉아라.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진짜요?'
“내가 확인했다.”
잠시 뒤, 의자가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저장고의 자물쇠가 조용히 풀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라기스가 손을 떨며 말했다.
“의자가 잔류자 인증 장치였나 봅니다. 하지만…….”
“하지만?”
“원래는 정본을 선택하는 장치였습니다. 이제 두 기록을 나눴으니, 그냥 안에 있는 사람이 앉았다는 사실만 확인하는군요.”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영은 영웅적인 희생도, 마왕의 서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리가 아파서 자기 의자에 앉았다.
그것만으로 문이 열릴 준비를 시작했다.
***
통로의 안정 기록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나는 저장고를 정리한 뒤 동쪽 섬으로 이동했다. 사람을 실제로 건너오게 하는 결정을 서두를 수 없었다.
페룬이 항구에 나와 있었다.
“또 돌아왔구려.”
“그렇다. 이제는 사람이 빠져나올 길이 있는 것 같다.”
“그럼 문을 여실 건가?”
나는 등대 쪽을 바라봤다.
“먼저 그 아이에게 물을 거다. 그리고 오늘 바다가 안전한지도 확인해야지.”
등대에는 따뜻한 옷 한 벌과 작은 신발 두 짝이 준비돼 있었다. 미아가 여러 크기로 보내 준 옷 중 하나였다.
나는 신발을 만지지 않았다.
그 아이가 밖으로 나오면, 어떤 신발을 신을지도 스스로 고르게 할 생각이었다.
제15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