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명탑에서 돌아오자마자 유진을 불렀다.
정확히는 먼저 물었다.
“유진이 오늘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느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이제 그런 것도 물으세요?”
“왜? 이상한가?”
“전에는 질문할 틈도 없이 명령하셨으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은 엘라와 함께 작은 응접실에 들어왔다. 말은 아직 하지 못했지만, 빛의 판에 글씨를 적는 속도가 빨라졌다. 전보다 사람의 눈을 더 오래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흰 종 수도원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왜 레온을 동생이라 불렀는지. 그리고 후보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러나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네가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유진이 판을 들었다.
'제가 먼저 알고 싶어요.'
엘라가 소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찾아보자.”
***
우리는 수도원에서 확보한 장부와 무명탑의 금속판을 나란히 놓았다.
마렌은 두 기록을 겹쳐 보며 설명했다.
“이상합니다. 흰 종 수도원의 열두 후보는 나이가 다르고 출생 지역도 달라요. 그런데 모두 같은 그림이 반복됩니다.”
그녀가 특정 문양을 확대했다.
반달 모양.
레온의 어깨에 있던 표식과 같았다.
“그런데 유진에게는 문양이 보이지 않지 않느냐?”
“현재 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장부에 시술 흔적이 남아 있어요.”
유진은 빛의 판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적었다.
'열둘은 사람 수가 아니에요.'
나와 마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열두 번 실패한 거예요.'
“무엇을 실패했지?”
유진은 망설였다.
'종을 들으면 선택이 사라져요.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나는 손을 꽉 쥐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안 따랐어요. 그러면 기록에서 지웠어요.'
“지운다는 게 무슨 뜻이지?”
유진의 손이 떨렸다.
엘라가 곁에서 기다려 주었다.
마침내 소년이 한 문장을 적었다.
'친구를 모두가 잊었어요. 저만 기억나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우리는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방법을 안다. 이름을 돌에 새기고, 남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그 이름 자체를 잊게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면?
죽음보다 잔인할 수도 있었다.
“이름을 기억하는 아이가 있는 한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겠지.”
나는 말했다.
유진이 나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저는 이름을 적었어요.'
그는 판의 가장자리를 뒤집었다.
거기에는 희미한 긁힘들이 있었다.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가 수십 줄 이어졌다. 소년은 아무도 없는 밤마다 그것들을 적었다고 했다. 수도원에서 판을 빼앗기면 벽에, 벽을 지우면 이불의 실 사이에 남겼다고 했다.
나는 첫 번째 이름을 읽었다.
'다렌.'
다음.
'수아.'
그리고 또 다른 이름.
그중 열네 개는 장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마렌. 이 이름들을 기록에 옮겨라. 단,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곳에 공개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실종된 아이들의 가족을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해.”
엘라가 낮게 말했다.
“이 아이들이 모두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모르지.”
나는 대답했다.
“그러니 살아 있다고도, 죽었다고도 멋대로 적지 말자.”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라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카르딘. 유진의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들어 주겠니?”
나는 장부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좋아했던 것?”
“응. 이름과 실종 날짜만 알면 사람을 찾을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유진이 판에 무언가 적었다.
'다렌은 비 오는 날을 좋아했어요.'
잠시 뒤 다른 줄이 이어졌다.
'수아는 책을 거꾸로 읽어도 웃겼어요.'
소년은 오랫동안 묵혀 둔 기억을 하나씩 꺼냈다.
'배가 고픈 날에는 서로 빵을 반으로 나눴어요.'
나는 그 내용을 따로 적었다.
공식 기록에는 필요 없는 정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름을 되찾는 일을 한다면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미아가 작은 종이를 가져왔다.
“전하, 기록을 두 종류로 나누면 어떨까요? 가족을 찾기 위한 사실 기록과, 아이들이 스스로 남기고 싶은 기억으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만 원하는 이야기만 적도록 해라.”
유진은 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엘라가 웃으며 말했다.
“승낙한대.”
그런데 내가 기억 기록의 첫 장을 펼쳤을 때, 유진이 갑자기 손을 잡았다.
'마왕님도 어렸을 때 친구가 있었나요?'
나는 숨을 멈췄다.
어릴 적의 친구.
나는 그런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명탑에서 발견한 요람의 눈금과 나이라가 남긴 장갑을 떠올리자, 왠지 혼자였다는 확신이 흔들렸다.
“모른다. 아직은.”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래서 찾아볼 생각이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 앞에서는 강한 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
그날 저녁, 바르톨이 예상치 못한 보고를 가져왔다.
“전하. 마왕성의 하급 관리들이 새 명령을 두고 논쟁 중입니다.”
“무슨 명령?”
“이름 없이 번호로 불리는 사람을 조사하라는 지시 말입니다.”
나는 그 지시를 내린 기억이 있었다. 장부에 적힌 후보들뿐 아니라 마왕군에서도 번호만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다.
바르톨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군에는 이름 대신 번호를 쓰는 노역대가 있습니다. 전쟁 포로 출신들입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만든 제도였다.
병력과 물자를 빠르게 관리하려고 포로들의 이름을 모두 번호로 바꾸었다. 이름은 복잡하고, 숫자는 편리했다.
나는 신성 기록실의 장부를 보며 분노했다.
그런데 내 성에도 같은 장부가 있었다.
“바르톨. 명단을 가져와라.”
“전하…….”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으면 그 이름을 다시 확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스스로 고르도록 해라.”
바르톨은 잠시 망설였다.
“우리 군의 징계 규정이 흔들립니다.”
“그럼 흔들리는 이유부터 봐야겠지.”
나는 창밖을 보았다.
마왕성이 어둠 속에 떠 있었다. 한때는 저 수많은 불빛이 모두 내 승리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의 잠자리, 누군가의 식사, 누군가의 불안과 희망이 있는 곳으로 보였다.
“내가 남의 이름을 마음대로 다루지 않겠다고 말하려면, 먼저 내 성부터 바꿔야 한다.”
바르톨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
국경에서 온 작은 소식 하나가 그날 회의를 바꾸었다.
돌개울 마을에서 나무상자를 만들어 보낸 것이다. 상자 안에는 얇은 수첩과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흰 종 수도원에 아이를 맡겼던 가족들이 남긴 메모라고 했다.
나는 가장 위의 편지를 펼쳤다.
'열병을 고쳐 주겠다고 데려갔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리엔입니다. 돌아온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음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신전에서는 아이가 신께 선택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편지를 접었다.
돌개울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마왕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성왕국에서 의심받을 수 있다.
“마렌. 보내온 사람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마라.”
“왜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저 그들을 위험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마렌은 확인 표시를 했다.
바르톨이 수첩을 가리켰다.
“전하. 그럼 조사 방법은 어떻게 합니까? 직접 증언을 요구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을 줘라. 필요한 기록만 요청하고, 거절하면 거기서 멈춰라.”
그는 낯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정보가 부족해질 겁니다.”
“정보가 부족한 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그들이 감당해야 할 벌이 아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쥐었다.
수많은 가족이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나이라 역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삼백 년을 기다렸다.
나는 그런 기다림이 어떻게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며칠 뒤 기록실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렌이 유진의 판에 적힌 첫 번째 이름을 새 장부에 옮기는 순간, 방 안의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다렌.'
아무것도 없는 책장 사이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검을 뽑지 않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구슬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푸른색 유리구슬.
내가 어린 시절 갖고 놀았던 것과 똑같았다.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 장난감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손에 쥐는 순간 나는 알았다.
그 구슬은 내 것이었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누군가 그것을 나보다 작은 아이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네 이름을 잊지 마.'
나는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적자 내 기억이 돌아왔다.
왜?
마렌은 흥분해 소리쳤다.
“전하! 삭제된 기록들이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복구하면 다른 사람의 기억도 영향을 받는 거예요!”
나는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내 과거와 레온의 미래가 한 권의 장부로 연결되어 있다면, 지금 우리가 되찾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지워진 사람들의 시간이었다.
그날 밤 유진이 내게 빛의 판을 내밀었다.
'아저씨. 저는 동생을 지킬 수 있을까요?'
나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혼자서 지킬 필요는 없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와, 엘라와, 미아와, 바르톨과 함께 지키는 거다. 레온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지킬 수 있겠지.”
유진은 판 위에 작은 별 하나를 그렸다.
그것은 붉은 별과 달랐다.
어느 누구의 명령도 적혀 있지 않은, 아이가 제 마음대로 그린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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