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왕은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었다. 정확히는, 나는 그 말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했다.
정복전쟁 마지막 해, 남쪽 구호로에는 피란민이 모여 있었다. 인간과 마족이 뒤섞인 무리였다. 나는 그들에게 통행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천계의 군단이 수도로 진군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길 하나를 포기했다.
'남쪽 관문 폐쇄. 수도 방어를 우선한다.'
서명은 내 것이었다.
그 명령을 내린 날의 냄새까지 기억한다. 비에 젖은 양피지, 식어 버린 철제 잉크통, 전장에서 막 돌아온 바르톨의 피 냄새.
그래도 나는 그 뒤로 오래도록 이렇게 말해 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
오르세 계정이 바꾼 '동시 도착'의 원본을 찾으려면 오래된 전쟁 기록이 필요했다. 북부 관측소의 첫 설계자들은 내 수도 방어 명령을 참고해 시간 경로를 만들었다고 했다.
“왜 내 전쟁 기록을?”
마렌이 먼지 낀 문서를 펼쳤다.
“한 곳으로 모두를 옮길 수 없을 때 누구를 먼저 보낼지 결정하는 규칙을 찾았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내 방식을 베꼈군.”
'구할 수 있는 핵심 자원을 먼저 이동시키고 나머지는 경로 유지를 맡긴다.'
그 문장을 읽자 속이 차갑게 식었다.
내가 전쟁에서 쓴 말이었다.
경로 유지.
나는 그때 후퇴로를 지키는 병사들을 그렇게 불렀다. 살아 있는 사람 대신, 길을 오래 열어 두는 부품처럼 말이다.
브람이 내 얼굴을 살폈다.
“전하, 이 기록을 없애고 싶으십니까?”
“당연하다.”
“그럼……”
“하지만 없애지 마라.”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내가 그 명령을 내렸다는 걸, 나도 잊고 싶지 않다.”
***
나는 남쪽 관문의 옛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길이 네 개 있었다. 붉은 길은 군사 보급로였고, 푸른 길은 식량 수송로였다. 검은 길은 내 왕실이 이동할 때 사용하던 비밀 통로였다.
그때 나는 검은 길을 철저히 숨겼다. 왕의 안전이 곧 나라의 안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길도 피란민에게 열 수 있었나?”
마렌에게 물었다.
“그 당시 폭이 좁아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긴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나 환자를 먼저 이동시키는 데는 쓸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오래 침묵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다른 방법은 없었다는 말은 같지 않았다. 나는 다른 방법을 끝까지 검토하지 않았고, 검토했다고 보고하는 장교도 붙이지 않았다. 전쟁 중 왕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판단했으니까.
“이 자료를 도렌에게 보여 주겠다.”
“전하의 판단이 틀렸다고 모두가 알게 될 텐데요.”
“이미 틀린 결정이다. 사람들이 몰랐다고 바른 결정이 되는 건 아니지.”
나는 지도 가장자리에 당시 내 서명이 찍힌 원본을 첨부했다. 나중에 누군가 말을 바꾸려 해도 기록이 남도록.
그 순간 알았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과거의 나를 미워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내가 없앴던 길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도록 되돌리는 일이었다.
***
나는 생존자를 만나러 남쪽 마을로 갔다.
그곳은 전쟁 이후에도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에 남은 작은 시장이었다. 포도주 냄새와 말똥 냄새가 뒤섞인 골목에서 한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도렌.
옛 남쪽 관문의 운송 책임자였다.
“기억하십니까?”
그가 물었다.
“내가 문을 닫으라고 명령한 걸 기억한다.”
“그 뒤의 일은요?”
“보고서에는 피란민의 절반이 북쪽으로 우회했다고 적혔다.”
“그 보고서는 틀렸습니다.”
도렌은 책상 아래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는 이름이 빼곡했다. 어떤 줄에는 동그라미가, 어떤 줄에는 빈칸이 있었다.
“문이 닫힌 뒤에도 이쪽에서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이 떠나면서 여기가 안전하다고 했거든요.”
나는 수첩을 넘겼다.
“어째서 수도로 올라오지 않았지?”
“길이 끊겼으니까요. 당시에는 전하께서 일부러 길을 끊은 것도 몰랐습니다.”
수첩의 마지막 장에는 열세 개의 이름이 남았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왜 이 이름들을 보관했나?”
도렌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잊지 않으려고요. 그날 누가 남았는지.”
나는 한참 수첩을 들고 있었다.
“미안하다.”
그 말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말로 덮을 수는 없었다.
도렌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 말은 듣겠습니다. 대신 이 사람들을 확인해 주세요. 살아 돌아왔다면 이름 옆에 그렇게 적어 주십시오.”
“그러겠다.”
“전하, 이번에는 약속을 기록으로 남겨 주십시오.”
나는 즉시 서명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시간을 대신 승인하는 서명이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
돌아오는 길에 바르톨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 일까지 다시 들추십니까? 이미 오래전입니다.”
“옛날에 저버린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래전 일이 아니지.”
바르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왕성 문 앞에서는 레온이 미아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작은 몸이 달려왔다. 나는 무릎을 꿇어 아이를 받았다.
레온이 내 망토에 묻은 흙을 손으로 털었다.
“넘어졌어?”
“아니다.”
“아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조금.”
녀석은 내 뺨에 조그만 손을 붙였다.
“호.”
단 한 번의 숨결이었다.
내가 저지른 일을 그걸로 용서받을 수는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내게는 이제 도망치지 않고 기억할 이유가 있었다.
***
그날 저녁 레온은 내게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빨간 집과 파란 집, 그 사이를 잇는 긴 선이 있었다.
“이건 무슨 그림이지?”
“레온 집.”
“그럼 이 파란 집은?”
“이안 집!”
“그렇군. 그런데 두 집 사이에 왜 길을 그렸지?”
“놀러 가!”
나는 그림을 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집을 하나로 합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사를 가야 한다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집은 그대로 두고 길만 그었다.
문득 도렌의 수첩이 떠올랐다. 남쪽 관문에 갇힌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도 어쩌면 저런 길 하나였을 것이다.
“아빠.”
“왜?”
“길 길게.”
“길면 힘들지 않겠느냐?”
“같이 가면 돼.”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
아이가 자꾸 정답을 알려 준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문제가 저토록 간단할 리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방법에 너무 많은 성벽이 들어 있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서재에 걸면서 나는 남쪽 관문의 새 통행로 계획도 옆에 붙였다. 위험할 경우 피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을 반드시 만들라고 적었다.
***
밤늦게 마렌이 남쪽 관문의 수첩을 대조한 결과를 가져왔다.
열세 명 중 아홉 명은 다른 마을에서 생존 기록이 확인되었다. 세 명은 기록이 끊겼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의 이름에는 이해할 수 없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귀환 경로 유지 담당. 기록상 이동하지 않음.]
나는 그 이름을 읽었다.
아르헨.
내가 어릴 적 문을 나가던 날을 지킨 여자와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맞지 않았다.
아르헨이라는 이름이 둘이었을 수도 있다. 또는 장치가 두 사건을 잘못 병합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 같은 역할을 다른 이름으로 반복시키고 있었다.
제12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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