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물론 지금의 내가 거짓말을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에 믿었던 것을 앞으로도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스무 해 뒤 성검에 죽은 나와, 지금 레온의 이를 닦아 주는 나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모든 생각이 같지는 않다.
그래서 마왕성의 장치에서 미래의 내 목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다.
***
브람은 장치에서 두 개의 음성을 추출했다. 첫 번째는 레온의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아주 낮고 짧았다.
'문을 열어.'
정확히 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의 앞뒤가 잘려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어느 문을 열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음성만으로는 명령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마렌이 말했다.
“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앞뒤를 찾아야지. 전장에서 내 목소리를 녹음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기록도 남아 있을 것이다.”
로잘린에게 부탁해 성왕국의 전쟁 기록을 조회했다. 신관들의 승전 영상은 이미 여러 번 봤다. 대부분 내 얼굴이 불길에 가려지거나 레온의 검이 빛나는 부분만 반복해 보여 줬다. 사람들이 승리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상의 가장자리까지 살폈다.
부서지는 성벽 아래 피란민이 달리고 있었다. 마왕성의 작은 동쪽 문이 닫혀 있었다. 그리고 젊은 내 모습이 포효했다.
'문을 열어! 아이들을 먼저 내보내!'
나는 얼어붙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전투에서 내내 검만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대전으로 쳐들어온 용사와 싸우기 직전, 성 안의 피란민들을 옮기라고 명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록 속에서 나의 외침은 구조 명령이었다.
그러나 장치에 저장된 것은 앞부분만이었다.
'문을 열어.'
“잘라서 다른 명령으로 썼군.”
브람이 이를 악물었다.
“저런 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겠지.”
나는 사람의 말을 잘라 내는 자가 가장 싫다. 물론 나도 과거에 적장의 항복 선언에서 조건을 지우고 내게 편한 문장만 남긴 적이 있다. 그 죄를 기억했기에 이번에는 더 화가 났다.
영상에는 내가 잊었던 작은 장면도 있었다.
성이 무너지기 직전, 복도에 갇힌 늙은 마족과 인간 하인이 서로를 부축하며 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게 충성 맹세를 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인은 내 영토에서 일했지만, 제국의 전쟁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문을 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바르톨이 그 장면을 보더니 낮게 말했다.
“전하, 제가 저 문을 잠갔었습니다.”
나는 돌아보았다.
“왜?”
“적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복도에 민간인이 남아 있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지요.”
“그럼 내가 네 명령을 뒤집은 건가?”
“그렇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전하께서 제 군사적 판단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그 명령 덕분에 나간 사람도 있었군요.”
나는 화면 속 열린 문을 오래 바라봤다.
나는 훌륭한 왕이 아니었다. 저 한 장면이 나의 잔혹했던 세월을 지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오직 싸움만을 원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문을 열어'라는 세 글자짜리 명령에 누가 그 문을 통과해야 했는지를 빼버리면, 구조 명령조차 침입 허가로 바뀔 수 있다.
렌오는 그런 식으로 내 과거를 사용하고 있었다.
***
그날 오후 나울 마을에 다시 갔다. 주민들과 합의해 사용을 중단한 종을 해체하지 않고, 바깥에 독립 녹음 장치를 놓고 실험했다. 종 자체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대신 장치가 스스로 내보내는 음성을 기록했다.
첫 번째 소리.
'집에…….'
두 번째 소리.
'돌아…….'
그리고 세 번째로 아주 낮은 속삭임이 흘렀다.
'그 아이가 떠나면 안 돼.'
나는 마렌을 바라봤다.
“아르헨이 말한 것인가?”
“아직 모르겠어요. 문장이 어느 때의 것인지도 불분명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배워야 할 건 문장의 뜻뿐 아니라 문장을 누가 언제 왜 했는지였다.
네라가 멀리서 다가왔다.
“그 소리가 나면 가끔 과거가 돌아오는 것 같아. 하지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잘려 나간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는군.”
“그렇지. 모든 기억이 거짓이라고 할 필요는 없어. 조각이 진짜라면 다른 조각을 찾아 맞춰야 한다.”
네라는 내게 작은 나무빗을 건넸다.
“아르헨이 여기 있을 때 쓰던 물건이야. 버린 줄 알았는데 상자에 남아 있었네.”
빗의 뒷면에는 서툰 그림이 있었다. 뿔 달린 어린아이와 그 곁에 앉은 여자. 여자는 웃는 입을 크게 그려 놓았고, 아이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이유 없이 손끝이 뜨거워졌다.
“내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겠다.”
네라가 미소 지었다.
“그냥 보고 싶으면 봐. 가져갈 필요는 없고.”
나는 그렇게 했다.
***
밤에 레온과 이안이 놀이방에서 작은 연극을 했다. 이안은 목소리를 굵게 낮춰 마왕 역할을 맡았고, 레온은 나무 검을 든 용사 역할이었다.
“멈춰라, 마왕!”
레온이 외쳤다.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나는 무서운 아빠다!”
“아빠 안 무서워!”
“그럼…… 과자 안 준다!”
그제야 레온이 놀란 척했다.
나는 문가에서 웃음이 터졌다.
미아가 속삭였다.
“아무리 무서운 마왕이라도 과자를 끊으면 안 된다는 설정이네요.”
“그건 진짜 악당이지.”
두 아이가 나를 발견하더니 연극에 참여하라고 했다. 내가 거절하자 레온이 나무 검을 건넸다.
“아빠 마왕!”
“원래 마왕인데.”
“더 마왕!”
결국 나는 오래전 전쟁에서나 입었던 목소리로 외쳤다.
“세상의 모든 장난감을 내놓아라!”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런데 곧 다시 달려와 내 망토를 잡아끌었다.
그 광경에 웃음이 났다. 내가 정말로 무서웠다면 저렇게 되돌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
한밤중 로잘린에게서 긴급한 연락이 왔다.
성왕국의 전쟁 기록 뒤쪽에 지워진 소리의 파형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같은 시간대의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카르딘이 한 말과 레온이 한 말 사이에 세 번째 소리가 있어요.”
“누구의 목소지?”
“목소리보다 먼저 종소리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뒤에 아주 짧은 명령이 있죠.”
로잘린은 그 문장을 읽었다.
'선택이 성립하면 보호자 기록을 과거에 역송하라.'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스무 해 전으로 돌아온 일과, 레온을 보호자로 선택한 일이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직 없었다.
누가 역송을 명령했는가?
그때 서재의 유리판에 두 개의 문장이 동시에 떠올랐다.
[최초 요청: 영, 귀가 희망.]
[두 번째 요청: 카르딘, 역송 승인.]
나는 숨을 삼켰다.
내가 기다리던 원문이 둘로 갈라졌다.
어린 날의 '돌아가고 싶다'와, 마지막 전쟁의 '되돌려 보내라'는 같은 요청이 아니었다.
그 둘을 하나로 묶은 자가 있었다.
제11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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