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류를 싫어한다.
정확히는 남의 의사를 제멋대로 해석해 놓고 마지막에 서명 한 칸만 내미는 서류를 싫어한다. 과거의 나는 그런 종이를 수없이 만들어 부하에게 건넸다. 그러니 싫어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서재의 흰 유리판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회귀 대상 카르딘. 당신은 자신의 회귀를 요청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 문장은 밤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회귀했다. 그건 사실이다. 성검에 꿰뚫려 죽었던 날을 기억하고, 스무 해 전으로 돌아와 어린 레온을 만났다. 그렇다고 해서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요청서'까지 내가 작성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당신이 모르는 과거를 부인하는 것과, 누군가 그 과거를 대신 확정하지 못하게 하는 건 다릅니다.”
마렌이 유리판 앞에 서서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걸 만든 놈은 그 차이를 못 알아듣는 모양이군.”
나는 판에 손을 대지 않고 질문했다.
“누가 언제 어떤 말로 요청했는지 보여라. 요약이 아니라 원문으로.”
[원문 접근: 최초 요청자 인증 필요.]
“요청자를 인증하라니. 나를 회귀 대상이라고 부른 건 너 아닌가?”
[동일인 확인 불충분.]
그 대답은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봐라. 기계조차 아직 같은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바르톨이 감탄했다.
“전하께서 정체를 증명하지 못하신 것을 기뻐하시다니, 마왕성 역사에 없던 일입니다.”
“역사에 적지 마라.”
“이미 필기했는데요.”
나는 펜을 빼앗으려다 말았다. 기록을 지우지 말라고 모두에게 가르친 사람이 나였으니까.
***
유리판의 아래쪽에서 빛이 한 줄 흘러나왔다. 북부 제로 관측소에서 보았던 붉은 별의 궤적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선 끝에 새로운 좌표가 있었다.
[영번 외측 보관함. 접수 전 음성 기록 한 건.]
“보관함이 어딨지?”
마렌이 지도를 폈다. 새 좌표는 관측소의 북쪽이 아니라 남쪽 산기슭의 오래된 국경 마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름은 종이 위에서 지워져 있었지만, 강과 다리의 흔적이 보였다.
“지도에 이름이 없으면 주민들에게 먼저 물어야겠군.”
“직접 가실 건가요?”
“아직은 아니다. 이 판이 알려 준 주소만 믿고 쳐들어갈 수는 없지.”
나는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마렌에게는 독립된 옛 지도를 구하게 했고, 헤딘에게는 그 마을이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되 아이들의 이름을 묻지 말라고 했다.
정작 내가 할 일은 더 어려웠다.
아르헨의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었다. 그녀는 시각시의 깊은 기록실에서 긴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상태였다. 내가 편지를 맡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리판이 재생한 목소리가 정말 그녀의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의문이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아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겠죠.”
“너는 꼭 내가 듣기 싫은 말을 하더군.”
“전하께서는 그걸 듣기 위해 제게 물으셨고요.”
부정할 수 없었다.
***
아침 식사 자리에서 레온이 흰 유리판의 글씨를 보았다.
녀석은 글자를 다 읽지 못하면서도 반짝이는 물건이라면 일단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버릇이 있다.
“아빠, 이거?”
“오래된 질문이다.”
“답?”
“아직 모른다.”
레온이 잠시 생각하다가 내 그릇에서 구운 감자 하나를 집어 갔다.
“그럼 먹어.”
“질문을 모르는데 왜 감자를 먹어야 하지?”
“배고프면 화나.”
미아가 옆에서 웃었다.
“전하께서 어제 저녁 식사를 거르셨거든요.”
나는 감자를 돌려받았다. 뜨거웠다. 천천히 식히자 레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조언이 이토록 현실적일 줄이야.
그때 바르톨이 급히 식당으로 들어왔다.
“전하! 서재의 판이 새로운 질문을 띄웠습니다!”
“말해라.”
“'회귀에 동의하십니까'라는 문장 아래, 선택지가 둘 생겼습니다. 승인과 영구 거절입니다.”
내 손이 잠시 멈췄다.
영구 거절.
그 말을 잘못 읽으면 지금 이 시대로 돌아온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시스템은 그 공포를 노린 걸지도 모른다.
“어느 것도 누르지 마라. 질문에 답하는 것과 질문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
바르톨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선택지가 셋이어야 합니까?”
“그렇다. '자료를 먼저 보여라'를 추가하라고 해.”
“기계에 명령을 내려도 듣겠습니까?”
“듣지 않으면 우리가 종이에 적어 붙이지.”
레온이 내 말을 듣더니 자기 식탁에서 종이를 한 장 가져왔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검은 뿔 두 개와 그 아래 동그란 감자 하나.
“아빠.”
“이게 나냐?”
“응. 감자.”
마렌이 웃음을 삼켰다. 바르톨은 그림을 국가 기록물로 지정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림을 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오래된 누군가의 요청서보다 지금 내 아들이 그린 형편없는 그림이 나를 더 정확히 설명하는 것 같았다.
***
오후가 되자 헤딘에게서 답이 왔다.
좌표에 마을이 있었다. 이름은 '나울'. 강 위에는 반쯤 무너진 돌다리가 남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붉은 별이 옮겨 간 날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무슨 소리지?”
“아이 목소리입니다.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합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한 아이를 본 사람이 있나?”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소리를 들은 장소가 세 군데로 일치합니다. 오래된 세탁장, 우물, 마을 밖의 폐가입니다.”
“기록만 남기고 철수해라. 현장에 남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뜻부터 확인하고.”
연락이 끝났다. 나는 유리판 앞으로 돌아왔다.
[회귀 요청 승인 대기.]
“아직도 기다리는군.”
나는 그 앞에 종이를 붙였다.
'승인도 영구 거절도 하지 않는다. 원문과 당사자 확인을 요구한다.'
마렌이 옆에 날짜와 증인 세 명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유리판의 문장이 잠깐 흐려졌다.
[보류 사유 접수.]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의 첫 승리는 칼이 아니라 보류 신청서였다. 상상만 해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자존심보다 레온의 내일이 중요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울 마을에서 또 다른 전갈이 왔다.
아이 목소리가 울린 직후, 한 노인이 오래전에 잊어버린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영을 데리고 돌아오지 못한 여자.'
노인은 그 여자가 아직 집으로 돌아올 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제11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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