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름을 빌려 사기를 치는 놈들은 많다.
적국 사신은 우리 군의 이름으로 항복 문서를 위조했고, 어떤 악마는 내 옥새를 훔쳐 휴가 명령서를 발행했다. 그 악마는 정말로 여름휴가를 얻으려고 했다. 한 나라를 뒤집을 만한 힘을 가지고도 바닷가에서 사흘 쉬는 데 썼다는 점은 아직도 존경스럽다.
그러나 나의 과거 서명을 가지고 온 손님은 달랐다.
그날 새벽, 관측소의 접수실에 봉투 하나가 놓였다.
눈 위에는 발자국이 없었다.
봉투에는 내가 쓰던 옛 글씨로 '카르딘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곧장 열지 않았다.
“독과 함정을 확인해라.”
브람이 봉투를 검사했고 로잘린은 신성 마법의 잔흔을 살폈다. 마렌은 글씨를 내 옛 서명과 비교했다.
“닮았어요. 하지만 같은 사람의 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앞에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계약서가 있었다.
'회귀자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합니다.'
'조건: 제로 관측소의 원본 관리자 권한을 인수할 것.'
'대가: 잃어버린 첫날에 대한 진실 제공.'
내가 계약서를 읽고 웃자 브람이 물었다.
“좋은 조건입니까?”
“매우 나쁜 조건이다.”
“무슨 이유로요?”
“내 미래를 안정시키겠다는 말은 남의 미래도 한 가지로 정하겠다는 뜻일 수 있거든.”
마렌은 계약서 뒷면을 가리켰다.
글씨가 더 있었다.
'기존 독립 귀환 장부 및 외부 증인 체계 폐기.'
나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회색다리 시장의 에데, 시각시의 마렌, 동쪽 관문의 나딘. 그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이름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가 내민 한 장의 진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폐기하라니.
이 계약은 내 과거를 미끼로 그들의 목소리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
계약서가 놓인 지 한 시간이 지나자 관측소의 중앙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안내인이 아니었다.
긴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왔다. 얼굴은 노인이었고, 목에는 은색 시계가 걸려 있었다. 그는 검은 장갑을 끼지 않았다.
“저는 서기관 렌오라고 합니다.”
“누구의 서기관이지?”
“과거에는 기록위원회. 지금은 제로 관측소의 미결 권한을 대리합니다.”
나는 그를 관찰했다.
“대리라는 말을 좋아하는군.”
“책임을 공백으로 둘 수는 없으니까요.”
“책임과 권한은 같지 않다.”
렌오의 미소가 옅어졌다.
“전하께서는 참 많이 변하셨군요. 이전 계약을 작성하실 때에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검 끝을 땅에 대었다.
“네가 그때의 나를 알고 있다고?”
“당신의 마지막 명령을 알고 있습니다.”
“말해 봐라.”
렌오는 주머니에서 금속판을 꺼냈다.
그 위에는 내가 전생에 사용하던 왕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멸망 이후에도 이름이 남을 수 있도록,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자리를 보존하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문장은 내가 쓰고 싶었을 법한 말이었다. 멸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던 나의 욕망과 너무 닮아 있었다.
“내가 쓴 것이 확실하냐?”
“서명은 여기 있습니다.”
“서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렌오는 한숨을 쉬었다.
“과거의 자신을 그렇게 불신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를 몰랐을 테니까.”
그는 조용히 금속판을 거두었다.
“그럼 제안을 거절하십니까?”
“당연하다.”
“완전한 진실을 듣기도 전에?”
“조건이 거짓이라면 진실도 살 수 없다.”
나는 계약서를 그의 발 앞에 놓았다.
“거절하겠다. 그리고 이 장부를 밖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보전하겠다.”
렌오가 처음으로 차가운 얼굴을 했다.
“권한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원본 접근권이 없습니다.”
“그 원본이 남의 시간을 빼앗는 데 쓰였다면,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다시 물어야지.”
렌오는 계약서를 손에 쥐고 창밖으로 눈을 바라보았다.
“사람마다 기록을 따로 보관하면 관리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렵겠지.”
“옛날 기록위원회는 전쟁 때 수천 명이 하루에 국경을 넘어오는 일을 겪었습니다. 누가 사라지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알아내려면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죠.”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사람을 번호로만 묶어도 된다는 건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질서가 없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렌오는 자신의 손목을 내보였다. 은시계 자국 아래에 오래된 화상이 있었다. 나는 그가 단지 장치의 명령만 되풀이하는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 전쟁을 겪었나?”
“겪었습니다.”
“누구를 잃었지?”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제 대답이 거래 조건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알고 있다. 그래도 묻는 거다.”
렌오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침묵을 강요해서 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분명하게 말했다.
“그때 누군가를 잃었다면 유감이다. 그렇다고 지금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빼앗을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렌오는 아주 천천히 계약서를 접었다.
“당신은 전쟁의 비용을 모릅니다.”
“알지. 내가 수없이 남에게 떠넘겼으니까.”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다만 궁금하다는 이유로 그를 믿을 생각은 없었다.
***
렌오는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접수실 밖에서 기다리며 매시간 같은 질문을 보냈다. '관리자 권한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나는 일곱 번이나 거절했다.
여덟 번째에는 종이를 꺼내 이렇게 써 보냈다.
'한 가지 조건으로만 협상하겠다. 외부 증인 체계는 유지한다. 기록 당사자의 동의 없이 어떤 서명도 승계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는 자신이 대리하는 상대의 이름을 밝혀라.'
렌오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북부 계곡의 얼어붙은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헤딘이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가 돌아왔다.
“전하! 계곡 입구의 붉은 줄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단순한 길 안내 줄이 아니었다.
우리가 돌아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해 주는 외부의 첫 번째 기록이었다.
렌오는 작게 웃었다.
“관리자가 없는 길은 오래 남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관리자가 아니라 길을 지키는 사람을 더 부르면 되겠군.”
이번에는 내가 연락석을 집어 들었다.
혼자 싸우던 습관을 버린 지 오래됐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선택을 강요할 때마다 옛 손이 검으로 먼저 향하는 건 여전했다.
나는 손을 펴고 동료들의 이름을 불렀다.
제10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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