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약을 어긴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많은 도시가 불탔다. 항복 문서에 적힌 날짜를 하루 어겼다는 이유로 성문을 무너뜨린 적도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계약을 지킨 게 아니라 계약을 핑계 삼아 화를 냈던 때도 많았다.
북부 관측소가 보여 준 아르헨의 기록을 마주하자 문득 생각했다.
서명을 하지 않은 계약에도 누군가는 묶일 수 있을까.
종이에는 아르헨의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보호 요청자: 아르헨.'
'대상: 영.'
'이송 승인: 공란.'
나는 안내인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나를 데리고 왔나?”
“접수 기록만으로는 이동 방향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보여 준 거지?”
“당신이 자신의 처음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얼굴 없는 안내인을 노려보았다.
“사람을 찾는 것과 답을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르다.”
안내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런 대답을 들으니 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
마렌은 관측소 외부 기록부에서 아르헨의 서명 양식을 찾아 비교했다. 시각시에 남아 있던 초대 종지기의 필체와 동일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쓴 사람이 아르헨일 가능성은 높아요. 하지만 보호 요청서를 제출했다고 해서 이송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없어요.”
“왜 서명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대신 서명해 주겠다고 했을 수도 있고,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죠.”
라기스가 책상 가장자리의 작은 도형을 발견했다.
“여기, 서명란을 막은 흔적이 있어요.”
나는 몸을 숙였다.
공란을 가로지르는 얇은 흠집. 누군가 펜으로 이름을 쓰려다가 멈춘 자국이 아니었다. 일부러 펜이 들어갈 자리를 긁어 없앤 듯했다.
“아르헨이 직접 지웠을 수도 있나?”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도구가 달라요. 필체와 별도로 봐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말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당장 누가 내 과거를 만졌는지 밝혀내고 싶었다.
바로 그때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사람 살려!”
***
눈사태였다.
관측소 위쪽 비탈의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위험 표지를 확인하러 올라갔다가 밧줄을 놓친 모양이었다. 우리는 건물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절벽 아래로 헤딘의 제자 루카스가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는 어린 길잡이였는데, 북쪽 지형을 배우려고 조사대에 합류한 참이었다. 오른손으로 바위 모서리를 잡고 있었지만 곧 힘이 풀릴 듯했다.
“전하, 제가 결계를 펼치겠습니다!”
로잘린이 외쳤다.
나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눈사태 전체를 검은 불꽃으로 태워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 바로 아래에 얼음이 있었다. 갑자기 녹이면 더 위험해진다.
나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낙하하는 눈덩이만 옆으로 밀어냈다. 헤딘이 던진 밧줄 끝을 잡아 루카스의 허리에 묶었다.
“놓지 마라!”
“네, 전하!”
놈의 장갑 낀 손이 미끄러졌다.
나는 그 손목을 붙잡았다.
손바닥 안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작은 맥박이 느껴졌다. 이 아이가 내가 아는 제국의 운명을 바꿀 존재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추락하면 죽을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끌어올렸다.
뒤에서 헤딘과 브람이 밧줄을 당겼다. 로잘린의 결계가 남은 눈을 막아 주었다.
루카스가 땅에 엎드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표지를 보러…….”
“나중에 이야기하자. 손가락부터 움직여 봐.”
그는 떨리는 손을 들었다.
나는 브람에게 담요를 가져오게 했다. 헤딘이 소년을 끌어안았다.
“왜 혼자 올라갔느냐, 이 바보야.”
“아저씨가 위험할까 봐 먼저 보려고…….”
“그래서 내가 더 위험해졌잖아.”
헤딘은 울 듯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저렸다.
아르헨도 이런 얼굴을 했을까.
나를 지키려다 자신의 시간을 문 안에 남기던 날에.
루카스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 내고도 한동안 몸을 떨었다. 나는 마법으로 따뜻한 돌을 만들어 천막 안에 놓았지만 헤딘은 돌이 너무 뜨겁지 않은지 먼저 손등으로 확인했다.
“전하, 불꽃으로 데우신 것이라면 조금 식혀야 합니다.”
“난로보다 약한 불인데도?”
“루카스는 전하처럼 용암에서 목욕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돌을 내려놓았다.
루카스는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왜 절 구하셨어요?”
“살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는 전하의 비밀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늙은 길잡이의 제자인 자신이 대륙의 비밀을 아는 마왕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것이다.
“네가 중요한지 정하는 건 네가 가진 정보가 아니다.”
“그래도 제 탓에 조사가 늦어졌어요.”
“조사가 늦어진 일은 나중에 판단하면 된다. 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는지부터 확인해야지.”
루카스는 다시 손가락을 굽혔다. 조금 아픈 듯했지만 움직였다. 헤딘은 고개를 끄덕이고 담요를 한 장 더 덮어 주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아이를 구하는 것은 영웅처럼 아이를 안고 나오는 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젖은 신발을 벗겨 주고, 아픈 곳을 살피고, 오늘 밤 잠들 수 있게 곁을 지키는 일까지 남는다.
미아가 레온을 돌보는 방식이 그랬다. 내가 이제야 이해하는 것을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
눈사태 이후 우리는 조사를 중단했다.
루카스의 체온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고, 무너진 통로는 구조대와 함께 안전을 확인했다. 관측소를 더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무리해서 얻는 답은 누군가의 다친 몸 위에 세워질 수 있었다.
늦은 밤, 내가 장갑을 벗어 불가에 손을 녹이고 있자 안내인이 나타났다.
“그 사람을 구했군요.”
“눈이 조금 무너졌을 뿐이다.”
“아르헨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지?”
“오래전에 이곳에서 작은 아이를 데려가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르헨은 그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고, 그는 '그 아이 하나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아르헨은 그 아이를 두고 혼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안내인이 낮게 덧붙였다.
“다만 아이를 데리고 나갔는지까지는 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는 돌아서려다 멈췄다.
“관측소에는 서명을 강제로 완성할 수 있는 장치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르헨은 그 마지막 칸을 망가뜨렸을지 모릅니다.”
나는 종이의 흠집을 떠올렸다.
누군가 이름을 지운 게 아니라, 남의 이름을 억지로 쓰지 못하게 만든 흔적.
처음으로 그 공란이 두려움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날 밤 나는 일기장에 적었다.
'서명하지 않은 사람을 도망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 것.'
그리고 한 줄을 더했다.
'아르헨. 당신이 그날 누구를 지키려 했든, 이번에는 내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겠다.'
제10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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