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별이 우리를 향해 빛을 내리쬐는 순간, 나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장에서 시간을 번다는 말은 보통 상대 병력의 진격을 늦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아가 레온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시간.
엘라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대피할 시간.
바르톨이 병사들을 무모한 돌격에서 물릴 시간.
그 모든 시간이 필요했다.
“대전 전역에 방어 결계!”
나는 검을 들었다.
붉은 별에서 내려온 빛줄기가 천장을 뚫으려 했다. 내 마력과 부딪친 빛은 폭발하지 않고 빗방울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바닥에 닿은 곳마다 얇은 금빛 문자가 나타났다.
명령식이었다.
'정지.'
'순응.'
'회수.'
신들은 매번 같은 말을 한다.
마치 세상이 그 세 단어만으로 움직인다고 믿는 것처럼.
“바르톨!”
“예, 전하!”
“병사들은 아이들 대피를 돕는다. 신성 병력과 정면으로 붙지 마라!”
“적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요?”
“막아라. 하지만 추격하지는 마.”
바르톨이 이를 악물었다.
“전하의 의중을 알겠습니다.”
예전의 나라면 적을 섬멸하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전보가 아니었다.
누가 무사히 오늘 밤을 넘기느냐였다.
***
이레브는 공중에 떠올랐다.
회색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그의 등 뒤로 수십 장의 기록지가 펼쳐졌고, 서류마다 인간의 이름과 숫자가 빼곡하게 적혔다.
“마왕 카르딘. 예정된 사건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래서 날 죽인다고?”
“현재 사망은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보호자 등록만 해제되면 됩니다.”
“그럼 레온에게서 나를 떼어 놓으면 된다는 뜻이군.”
“맞습니다.”
나는 웃었다.
“그것은 더 어려울 거다.”
이레브는 검은 펜을 들어 서류에 선 하나를 그었다.
바닥의 그림자가 갑자기 길어졌다. 긴 그림자들이 내 발목으로 기어와 달라붙었다. 나는 발을 들어 검을 내리쳤다. 검은 불꽃이 바닥을 타고 번지며 그림자를 밀어냈다.
그러나 끝이 없었다.
이레브는 새 종이를 펼쳤다.
“기록에 따라, 당신은 언제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나?”
“가능성은 구십팔 퍼센트입니다.”
나는 손바닥을 펴고 검을 바닥에 꽂았다.
이레브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짓입니까?”
“나머지 이 퍼센트를 시험해 보지.”
나는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문서 한 장을 붙잡았다.
천계의 문서는 마력으로 만든 종이가 아니었다. 미래의 사건을 기록해 현실에 반영하는 규칙 그 자체에 가까웠다. 잘못 만지면 손이 지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부를 작성하는 자는 모든 항목에 근거를 남겨야 한다.
그것이 규칙이라면 역이용할 수 있었다.
“마렌! 기록을 가져와라!”
내 외침에 궁정 마법사 마렌이 달려왔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흰 종 수도원에서 구해 낸 장부와 지난 며칠간 작성한 레온의 돌봄 일지였다.
“전하, 이게 도움이 될까요?”
“최소한 저놈들이 거짓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나는 기록 두 개를 공중에 펼쳤다.
왼쪽은 천계의 장부.
'후보 13. 레온. 완성형. 회수 후 육성.'
오른쪽은 내 손으로 적은 돌봄 일지.
'밤 두 시. 우유를 조금 먹음. 잠깐 뒤척임. 미아가 안아 주니 잠듦.'
이레브가 비웃었다.
“그런 사소한 기록이 무엇을 증명한다는 겁니까?”
“네 문서에는 이 아이가 무엇을 원한다고 적혀 있느냐?”
“예언의 목적에 따라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건 아이의 목적이 아니라 너희 목적이지.”
나는 돌봄 일지의 다음 장을 펼쳤다.
'새벽 네 시. 종소리에 울음. 어깨 문양 발열. 결계로 안정.'
그리고 또 다음 장.
'밤 열한 시. 할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숙면.'
“레온은 네 명령에 울었다. 네가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다.”
이레브의 펜이 멈췄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네 문서는 이 아이가 자발적으로 신탁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군.”
“유아는 의사를 진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인가?”
나는 수도원에서 구해 낸 유진의 기록을 들어 보였다.
'후보 12. 발성 억제 완료.'
“이 아이는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동의했다고 기록했지.”
이레브가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천계의 문서에서 금빛 글자가 흔들렸다.
[동의 기록 검증 실패.]
[보호자 교정 절차 일시 중단.]
나는 그제야 이레브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내 검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만든 기록이 틀렸다는 증거였다.
***
그러나 천계는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레브가 손을 들어 허공의 서류를 찢었다.
“비상 절차로 전환합니다!”
천장이 갈라지며 붉은 빛 하나가 아이 방을 향해 곧장 떨어졌다.
나는 욕설을 내뱉고 공간을 접었다.
눈앞에 아이 방이 나타났다.
미아가 레온을 안고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엘라와 유진이 있었다. 붉은 빛이 천장에서 내려와 레온의 어깨를 향해 뻗었다.
나는 그 빛을 몸으로 막았다.
아주 오래전, 성검이 가슴에 꽂힐 때 느꼈던 차가움이 밀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전하!”
미아가 외쳤다.
“뒤로 가라!”
하지만 빛은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휘어졌다. 레온의 어깨와 내 가슴 사이에 희미한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보호자 등록.
이레브가 말한 그 관계가 실제로는 일종의 표식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나는 손을 뻗어 실을 잡았다.
실이 손바닥을 태웠다.
레온이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
익숙한 소리였다.
나를 밤마다 깨우고, 군사회의를 중단시키고, 젖병을 데우러 성벽에서 뛰어내리게 했던 목소리.
예전에는 그 울음이 참 성가셨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도 성가시지 않았다.
아이가 살아서 울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실을 끊지 않고 그 힘을 거꾸로 따라갔다.
빛을 보내는 자와 빛을 받는 자 사이에는 반드시 연결이 있다.
그것은 마법의 기초다.
적의 공격을 내게 묶어 놓고 그 연결을 따라 원래의 기록판까지 닿게 했다.
“이레브!”
내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네가 기록을 좋아한다니, 이것도 적어라.”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레온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누구의 물건도 아니다.”
내 목소리가 커졌다.
“신의 그릇도, 용사의 재료도, 마왕의 소유도 아니다!”
나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레온은 레온이다!”
그 순간 아이가 울음을 멈췄다.
작은 손이 허공을 향해 뻗었다.
내 손가락을 잡으려는 듯이.
그리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금빛 실이 산산이 흩어졌다.
하늘의 기록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소유권 등록 불가.]
[대상 의사 확인 불충분.]
[강제 회수 절차 무효.]
붉은 빛이 사라졌다.
***
나는 아이를 안은 채 대전으로 돌아갔다.
이레브는 무너진 기록지 사이에 서 있었다. 그가 쥔 펜에서는 검은 잉크가 떨어졌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연하지.”
나는 레온을 조금 더 단단히 안았다.
“너희는 이 아이를 스무 해 동안 준비했다고 했지. 그 정도 집요한 놈들이 하루 만에 포기할 리 없다.”
“예언은 반드시 완수됩니다.”
“그 예언이 틀렸다는 기록부터 남겨 두어라.”
나는 마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져온 문서가 허공에 펼쳐졌다. 유진과 나머지 아이들의 진술, 강제 침묵 장치, 신탁 후보 장부. 모든 증거가 이레브의 기록과 나란히 놓였다.
이레브는 그것을 찢지 못했다.
관측 장치가 이미 내용을 읽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록 오류 수정 요구 접수.]
[중앙 기록실 심의 회부.]
그 문장이 떠오르자 붉은 별은 마침내 뒤로 물러났다.
빛이 줄어들며 산맥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레브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마왕 카르딘. 당신의 회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당신을 돌려보냈는지 밝혀지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질 겁니다.”
나는 그의 사라지는 형상을 향해 말했다.
“알아내면 내게도 알려라.”
그의 마지막 표정은 분노보다는 난처함에 가까웠다.
기록관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
공격이 멈춘 직후에도 우리는 성문을 열지 않았다.
천계의 빛이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바르톨에게 결계의 손상 부분을 확인하게 했고, 마렌에게는 기록 장치가 남아 있는지 살피게 했다.
그사이 엘라는 아이들 방으로 가서 유진과 나머지 세 아이를 살폈다.
마렌이 내게 보고했다.
“전하. 붉은 별의 접근이 멈췄습니다. 다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먼 하늘에 관측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중앙 기록실의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재접근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이것도 저희 추측일 뿐 확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예전의 나는 마왕 앞에서 자신 없는 말을 하는 부하를 꾸짖곤 했다. 그래서 부하들은 틀린 정보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보고했다.
이제 그런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모르는 것은 계속 확인해라.”
마렌은 안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대전 밖으로 나왔다.
궁정의 복도에는 한밤중에 급히 옮긴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부서진 유리잔, 떨어진 촛대, 그리고 레온의 작은 담요 한 장.
그 담요를 들어 올렸을 때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세계를 기록한다는 천사와 싸우고 돌아온 사람이 아기의 담요를 주워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편이 더 내게 어울리는 듯했다.
해가 뜰 무렵, 마왕성은 다시 조용해졌다.
성벽의 일부가 부서지고 대전 바닥에는 거대한 균열이 남았다. 바르톨은 피해 목록을 읽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전하. 수리 비용이 막대합니다.”
“얼마나?”
“성벽 세 곳, 대전 기둥 넷, 방어 결계 재설치까지 계산하면…….”
“그만.”
나는 손을 저었다.
“사람은?”
“부상자는 있지만 모두 치료 중입니다. 아이들도 무사합니다.”
“그럼 됐다.”
바르톨이 멍하니 나를 보았다.
“전하께서 돈보다 사람을 먼저 확인하시다니.”
“누가 들으면 내가 지금까지 돈만 밝힌 줄 알겠다.”
“전하께서는 예전에도 돈을 밝히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전쟁 비용을 사람보다 먼저 계산하셨습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엘라는 유진의 손을 잡고 복도를 지나갔다. 미아는 창문을 열어 아침 공기를 들이고 있었다. 마렌은 밤새 쌓인 기록을 정리했다.
모두가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이 이상할 만큼 귀했다.
나는 레온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까의 소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온. 네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날이 올지 모르겠다.”
잠든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 불러도 상관없다. 네가 싫다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돼.”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너를 끝까지 키울 생각이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또렷해졌다.
복수도 아니었다.
미래를 피하려는 계산도 아니었다.
나는 이 아이가 살아갈 시간을 지키고 싶었다.
그게 아버지라는 사람의 일이라면.
그래. 그걸 해 보자.
나는 마왕이지만, 이 아이의 아빠가 되기로 했다.
***
그날 오후, 마렌이 봉인된 문서 한 장을 가져왔다.
“전하. 중앙 기록실의 심의 회신을 받았습니다.”
“벌써?”
“예. 아주 짧은 문장뿐입니다.”
나는 편지를 펼쳤다.
금빛 글씨가 적혀 있었다.
[보호자 등록의 효력 인정.]
[대상 레온의 강제 회수 보류.]
그 아래 마지막 문장이 있었다.
[회귀 원인 추적 개시. 최초 기록 복구 대상: 카르딘의 삭제된 출생 기록.]
나는 손을 멈췄다.
삭제된 출생 기록?
그런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마왕의 후계자로 태어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삼백 년의 삶은 황량한 마계 변방에서 홀로 살아남은 날부터 시작됐다.
그 이전의 기억은 흐릿했다.
나는 단순히 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서 아래 작은 그림이 떠올랐다.
낡은 요람 하나.
그 옆에 놓인 검은 망토.
그리고 요람의 테두리에 새겨진 이름.
'카르딘.'
내 이름이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이것은 레온의 과거가 아니었다.
누군가 내 출생의 기록을 지웠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레온을 주웠다고 생각했던 그 숲.
정말 우연히 그곳에 간 것일까.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그 아이에게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서 자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시작을 찾아 주려던 내가, 정작 내 시작부터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붉은 별은 사라졌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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