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방송이 정정된 뒤에도 주민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같은 목소리로 서로 다른 지시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정은희가 직접 방송했다며 영 번째 피난동으로 가려 했고, 누군가는 교사들의 안내를 믿지 못해 집에 남았다. 민규는 모두를 한곳에 모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출구가 확인된 건물마다 담당자를 배치하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 안전한 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시스템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었다.
영 번째 시설의 벽에는 열두 개의 구리판이 있었다. 바르트는 그중 아홉 개가 실제 피난 통로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열 번째는 관찰자 교대 장치, 열한 번째는 중앙 기록망, 열두 번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승인선이었다. 한서령이 말한 ‘최종 승인자는 기록되지 않는다’는 문구가 바로 이 마지막 선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를 끊으면 모두 멈출까요?” 루카가 물었다.
“아니.” 바르트가 대답했다. “승인선이 다른 곳에 연결되어 있을 수 있어. 그리고 지금 끊으면 안쪽 환기 장치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또 확인해야 하네요.”
“그래. 점검할 때 가장 싫은 말이지만 가장 필요한 말이지.”
민규는 루카에게 일할 장소를 정해 주었다. 영 번째 시설 안에 들어가는 대신 학교 운동장에서 교사들과 출입 인원을 대조하는 일이었다. 루카는 속으로 조금 서운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실종됐던 때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이번에는 자기가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될 차례였다.
“내가 무전 안 받으면 어떻게 해?” 루카가 물었다.
“다른 사람한테 확인을 맡기면 돼. 너 혼자 모든 연락을 받을 필요 없어.”
“아저씨는요?”
“나도 혼자 들어가지 않을 거야.”
작업에 들어가기 전 민규는 구조될 사람들이 처음 마주할 장소를 직접 걸어 보았다. 영 번째 출구에서 의료실까지는 평소라면 몇 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런데 복도 중간에는 과거의 시간을 보여 주는 거울 하나가 남아 있었고, 계단참에는 학생들이 몰리면 빠져나갈 틈이 좁아지는 구간이 있었다. 그는 그 구간을 우회하는 길을 표시했다.
“이 정도 거리면 제가 애들을 업고 가도 되는데요.” 루카가 말했다.
“네가 혼자 다 업고 가야 할 이유는 없어.” 민규가 답했다. “게다가 움직이면 더 위험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나디아는 구조 대상의 몸 상태를 사전에 모두 알 수 없으므로 들것과 휠체어, 따뜻한 담요를 함께 준비했다. 마법 치료가 가능한 학생에게도 먼저 무엇이 불편한지 물어보도록 했다. 몸에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곧장 걷게 해서는 안 되었다. 소율의 발목에 관해 들은 뒤였기 때문이다.
미라는 의료실까지 가는 길에 작은 물그릇을 두었다. 별이 만든 종이배가 물 위에 뜨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통로에 들어왔던 사람이 실제 바깥으로 나왔는데도 몸이 기록망에 묶여 있다면 물건을 잡는 방식에서 차이가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방법이 검사가 아니라 참고용 관찰이라는 사실도 적어 두었다.
“그릇이 넘어진다고 아이를 다시 들여보내면 안 되겠죠?” 루카가 물었다.
“당연하지.” 미라가 웃었다. “이건 아이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준비한 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보는 거야.”
한편 케스는 모든 구조자의 이름을 즉시 발표하라는 총국의 요구를 받았다. 그는 거절 사유를 직접 작성했다. 일부 사람은 아직 자기 이름을 말하지 못했고, 일부는 오랜 시간 갇혀 있어 스스로 공개에 동의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총국은 신원 확인이 늦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늦어지는 게 신원 확인이지 구조 자체가 아니어야 합니다.” 케스가 말했다. “지금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의료 지원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에일라는 임시 번호를 만들되 사람의 정체를 그 번호로 확정하지 않기로 했다. 첫 구조 대상, 두 번째 구조 대상이라는 표시는 이동 경로를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름을 대신하는 표식이 아니었다. 누구든 자기 이름을 되찾으면 원래 번호에 새로운 사실을 덧붙일 수 있었다.
민규는 마지막으로 안쪽과 바깥의 시각을 재었다. 두 곳에서 움직이는 초침은 서로 다른 속도였다. 안쪽은 한 분이 길게 늘어났고, 바깥은 오 분이 지나 있었다. 구조 중 두 시각의 차이가 커지면 다음 사람의 이동을 멈추기로 했다. 누구도 시간차를 몸으로 시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준비됐습니까?” 바르트가 무전으로 물었다.
“아직 한 가지만요.” 민규가 대답했다. 그는 문 아래로 종이를 한 장 더 밀어 넣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데리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우리는 대답을 기다릴 겁니다.’
잠시 뒤 돌아온 종이에는 짧은 대답이 있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그제야 민규는 작업을 시작해도 좋겠다고 말했다.
작업은 세 팀으로 나뉘었다. 바르트와 한서령이 수동 멈춤쇠를 점검하고, 셀레나와 에일라가 안쪽의 마력 변화를 기록했다. 민규와 케스는 소율에게 실제로 밖으로 나올 뜻이 있는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확인했다. 나디아와 은희는 의료실에서 구조될 사람을 받을 준비를 했다. 모두가 자기 역할을 알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중단하는 신호도 정했다.
소율의 대답은 종이를 통해 돌아왔다. 한서령이 만든 얇은 구리관을 문 아래로 넣자 소녀가 짧은 글씨를 써서 밀어 보냈다.
‘밖에 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발목을 다친 친구가 있어요. 제가 먼저 가면 친구가 무서워할 거예요.’
은희는 그 글씨를 보자 잠깐 얼굴을 가렸다. 자신이 소율에게 해 주었던 말과 비슷했다. 아픈 사람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이 삼십 년을 지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 것 같았다.
“친구와 같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만들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친구도 정말 나오고 싶은지 물어봐야 합니다.”
에일라는 문 아래로 질문을 밀어 넣었다. 잠시 뒤 소율과 다른 아이의 글씨가 차례로 돌아왔다. 한 명은 나가고 싶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먼저 바깥이 안전한지 보고 싶다고 했다. 서로 다른 선택이었다. 민규는 그것을 하나의 동의로 묶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안쪽을 볼 방법이 있어야겠어요.”
셀레나는 광학 수정 구슬 대신 작은 반사거울을 사용했다. 수정판이 기록망과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서령이 만든 가느다란 관을 통해 거울을 넣자 좁은 통로가 보였다. 불빛을 비추자 문 안에 있던 아이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민규는 조명을 낮췄다.
“우리가 밖에서 보고 있어요. 불빛이 너무 밝으면 줄일게요.”
종이가 돌아왔다.
‘괜찮아요. 처음엔 무서웠어요. 여기 바닥에는 계속 누가 지나간 흔적이 나요.’
바닥에는 여러 사람의 신발 자국이 겹쳐 있었다. 누군가는 실제로 지나간 것 같았지만 통로 양쪽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없었다. 그 자국이 제10관찰자가 빌린 시간의 흔적일 수도 있었다. 민규는 우선 현재 있는 아이들에게 집중했다.
바르트가 두 번째 환기구의 손잡이를 조절하자 안쪽에서 바람이 움직였다. 은희는 공기 흐름이 너무 세지 않은지 손수건을 걸어 확인했다. 나디아는 산소 공급 장비를 출구에 놓고 아이들이 나오면 상태부터 살필 준비를 했다. 문을 연 뒤 잘 걷는 사람부터 먼저 움직이되, 스스로 걷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따로 안전줄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때 제10관찰자가 새로운 안내를 내보냈다.
“구조 대상 수 일치. 출구 개방 승인.”
민규는 곧바로 손잡이를 당기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숫자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기록은 네 명입니다.”
“사람한테 직접 확인한 숫자는 아닙니다.”
“기록 외 대상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럼 기록 밖에 남아 있는 사람이 보이면 어떡할 겁니까?”
장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틈에 셀레나가 마력의 흔들림을 살폈다. 제10관찰자가 정해진 답을 찾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처리할 수 없습니다.” 장치가 반복했다.
민규는 손전등을 들고 대답했다. “처리하지 마세요. 사람을 처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안전하게 안내할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바르트가 수동 개방 손잡이를 아주 조금 내렸다. 문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로 벌어졌다. 공기가 새어 나왔고, 안쪽에서 종이배 한 척이 바람에 밀려 나왔다. 종이배에는 익숙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밖의 별에게. 내가 오늘은 먼저 문을 볼게.’
별은 의료실에서 그 종이배를 받아 들었다. 종이가 자기 손을 통과하지 않았다. 소년의 눈이 커졌다.
“아저씨, 이건 잡을 수 있어요.”
민규는 무전기를 통해 들었다. “잘됐어. 그런데 아직 손을 놓지 말고 나디아 말 잘 들어.”
문이 더 열리자 안쪽의 바닥이 갑자기 기울었다. 마력으로 접어 둔 복도 사이에 높이 차가 있었다. 바르트는 미리 준비한 접이식 발판을 설치했고, 셀레나는 양쪽의 시간차가 커지지 않는지 확인했다. 민규는 발판이 제대로 고정됐는지 몸무게를 실어 시험한 뒤 아이들에게 안내했다.
“급하게 뛰지 않아도 돼요. 한 명씩 확인하고 나올 겁니다.”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소율이었다. 발목에는 오래된 붕대가 감겨 있었고 손에는 종이로 접은 작은 꽃이 있었다. 그녀는 바깥의 밝은 하늘을 보자 눈을 가늘게 떴다. 나디아가 먼저 다가갔다.
“지금 걷는 건 어떠니?”
“괜찮아요. 그런데 조금 어지러워요.”
“그럼 잠시 여기 앉자. 바로 먼 곳으로 갈 필요는 없어.”
은희는 멀리서 소율을 바라보다 무릎을 꿇었다. “소율아.”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보는 순간 은희는 손을 내밀었다가 멈췄다. 삼십 년 전에는 아이였지만 소율에게 그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은희는 먼저 물었다.
“안아도 될까?”
소율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두 팔을 벌렸다. 그제야 은희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두 번째로 나온 아이는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낯선 곳에 도착하자 고개를 숙이고 발판 끝에 앉아 버렸다. 민규는 이름부터 묻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싶은지, 어디가 불편한지부터 확인했다. 소율은 그 아이가 원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문이 닫힌 뒤부터 발음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민규가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아이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그는 신발끈이 풀어진 것을 가리켰다. 미라가 끈을 묶어 주자 아이는 조금 편안해진 듯했다.
세 번째로 나온 사람은 노인이었다. 그는 영 번째 피난동 안에서 다른 사람이 이동하는 소리만 들으며 기다려 왔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은 기억했지만 바깥에서 몇 년이 흘렀는지는 몰랐다. 케스는 시간을 설명하되 한 번에 많은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구조자에게 필요한 것은 충격적인 역사 수업이 아니라 지금 안전한 장소와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다음에는 안쪽의 별이 문 앞에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바깥의 별보다 조금 희미했다. 둘은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바깥의 별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종이배 만드는 법, 기억해?”
안쪽의 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젖지 않게 접었어.”
“나중에 진짜 물에 띄워 보자.”
두 아이가 함께 웃는 순간 제10관찰자의 얼굴이 벽에 떠올랐다. 이번에는 무수한 얼굴이 아니라 빈 실루엣이었다.
“동일 인원 중복 확인. 한 명을 반환해야 합니다.”
민규가 즉시 대답했다. “두 아이가 각각 자기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누구도 반환하지 않습니다.”
“기록 정합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정합성이 아이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10관찰자가 통로에 압력을 가했다. 문 양쪽에서 찬바람이 몰려들었다. 바르트가 긴급 중단 신호를 보냈다. 모두가 한 걸음씩 물러났다. 안쪽 별은 아직 발판 위에 있었고, 바깥 별은 의료실 입구에서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민규는 아이들 사이로 몸을 들이미는 대신 안전줄과 발판을 먼저 고정했다.
“둘 다 손을 놓지 말고 천천히!”
한서령이 수동 멈춤쇠를 끝까지 밀었다. 금속판이 높은 소리를 내며 떨렸다. 초침의 축이 잠시 헛돌았고, 얼굴 없는 관찰자의 목소리가 멈췄다. 그 틈에 안쪽 별이 발판을 건넜다. 바깥의 별은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아이가 나란히 의료실로 향하는 모습을 본 민규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구조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문 안쪽에는 아직 누군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안쪽에 물었다.
“지금 들리는 분 있습니까?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대답이 어렵다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안쪽 벽에서 낮은 두드림이 한 번 울렸다.
손바닥이 아니라 무거운 금속으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바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소리는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야. 영 번째 시설의 승인실에서 나는 소리야.”
민규는 구조 대상 목록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안쪽에서 추가 응답 확인. 발신자 미확인. 구조 종료 판단 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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