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번째 피난동의 두 번째 문은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당장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이었다.
문 옆에는 구리판이 열두 개 붙어 있었다. 각 판에는 사람 이름 대신 피난 시설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여덟 개는 이미 바깥으로 이어진 통로를 표시했고, 아홉 번째는 지도에 없는 빈 공간을 가리켰다. 나머지 세 판에는 숫자와 글씨가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시설을 늘린 흔적인지, 처음부터 별도의 기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르트가 마지막 판을 만지려 하자 민규가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요. 이 판이 뭘 하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알고 있어.” 바르트는 손을 내렸다. “이상해서 그래. 피난동은 아홉 개라더니 판은 열두 개잖아.”
“처음부터 열두 곳이었다면 말이 다르겠죠.”
셀레나는 구리판 사이의 연결선을 살폈다. 선은 단순한 배열이 아니었다. 아홉 번째 이후부터는 중앙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선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중앙으로 들어오는 선이었다. 피난 시설이 아니라 기록을 공급하는 통로일 가능성이 있었다.
“열 번째 관찰자가 이 선을 타고 올지도 몰라요.”
루카는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예전이라면 가장 먼저 들여다봤을 것이다. 누나를 찾던 일과 니아를 구하던 일을 겪고 나서 그는 호기심과 무모함을 구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하는 건 아직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네요.”
“맞아.” 민규가 말했다. “밖으로 나올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있다면 문을 열어도 구조라고 할 수 없지.”
한서령이 보관해 온 도면에는 각 피난 시설의 인원 수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숫자는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확인 불가’라는 도장이 찍힌 줄도 있었고, 한 장소에는 ‘인원 0, 사용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규는 숫자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실제로 구조된 사람들의 말을 다시 모았다.
니아는 여덟 번째 피난동의 물소리를 기억했고, 미라는 언니와 함께 기다리던 아이 둘의 옷차림을 기억했다. 별은 자신과 종이배를 접던 안쪽 아이를 알고 있었다. 폐선 터널에서 나온 에른은 자신이 지나친 문 뒤에서 최소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어느 누구도 숫자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기억에서 일치했다.
“몇 명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전부 데리고 나와요?” 루카가 물었다.
“몇 명인지 모르니까 문을 닫아서는 안 되는 거지.” 민규가 답했다. “구조가 끝났다는 도장부터 찍는 게 아니라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거야.”
에일라는 전교생에게 남은 실종자의 이름을 적어 달라는 공지를 보냈다. 하지만 곧 문제가 드러났다. 이름이 지워진 사람은 친구의 기억에는 남아 있어도 학교 명부에는 없었다. 누군가를 신고하려 하면 기록망이 ‘존재하지 않는 인원’이라는 오류를 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 출석부를 좀 더 자세히 써 둘걸.” 루카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미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한테는 출석부가 없었어도 같이 밥 먹은 사람이 있어. 누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기억하면 적어도 흔적은 찾을 수 있겠지.”
그녀는 기숙사 식당의 낡은 식권을 모았다. 발행 번호와 수량이 맞지 않았다. 어제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처리된 학생이 실제로는 식권을 받아 갔던 기록이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그 아이가 매번 수프를 두 번 받아 갔다고 기억했다. 기록망은 아이 이름을 지웠지만 남은 수프 냄비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루카가 식권 뒷면에 ‘수프를 두 번 먹는 아이’라고 적었다. 이름이 아니라 특징으로 사람을 찾는 방식이었다. 에일라는 그것을 확인되지 않은 증언으로 보관했다. 숫자를 확정하지 않으면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정은희는 마을 의료실에서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에는 사고 이후 환자들에게 주었던 약봉지가 담겨 있었다. 어떤 봉지에는 환자 이름이 없었고, 어떤 봉지에는 똑같은 날짜가 수십 번 쓰여 있었다. 그녀는 약봉지의 남은 수량과 실제 치료 기록을 비교했다. 동시에 소년 별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대신해 손에 쥘 수 있었던 종이별도 한 장 넣었다.
“어머니, 이건 왜 여기 넣으세요?” 민규가 물었다.
“먹을 수 없다고 환자가 아닌 건 아니니까. 그 아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아.”
민규는 약봉지와 식권, 남겨진 낡은 신발의 크기를 서로 비교했다.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붙이지 않았다. 아직 누구인지 모른다고 적되 수색 대상에서는 제외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오늘 해야 할 일의 핵심이었다.
운동장에는 긴 책상 세 개가 놓였다. 첫 번째 책상에는 학생들이 그린 얼굴 그림이 쌓였고, 두 번째에는 빵집과 세탁소에서 가져온 장부가 놓였다. 세 번째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았다. 누군가 새로운 증거를 가져왔을 때 어디에 둘지 정해 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에일라는 그 빈 책상 앞에 ‘아직 모르는 일’이라고 써 붙였다.
처음에는 그 문구를 보고 웃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그 책상에 다가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적어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는 실종된 아이의 얼굴을 선명하게 그릴 수 없다고 털어놓았고, 다른 학생은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면 항상 다른 이름이 끼어든다고 말했다. 에일라는 기억이 흐릿한 사람을 뒤로 보내지 않았다. 대신 ‘확신 정도’를 별도로 표시하게 했다.
마을의 제과사는 갈색 바구니 하나를 가져왔다. 바구니에는 식어 굳은 작은 빵이 들어 있었다. 실종된 학생에게 매주 한 번씩 주던 빵이라며, 그 아이가 땅콩을 먹지 못하므로 늘 따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라는 그 빵의 모양을 알아봤다. 주방에서 일할 때 누군가 항상 같은 모양을 주문했었다. 서로 다른 두 기억이 맞물렸다.
“그 아이는 이름을 말한 적 없나요?” 루카가 물었다.
제과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때도 있었겠죠. 그런데 이름보다 얼굴과 웃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군요.”
루카는 바구니에 이름표를 달지 않았다. 대신 ‘특별 주문 빵을 받았던 학생. 제과사와 미라가 같은 특징을 기억함’이라고 적었다. 기록망이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을 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곧 다른 문제가 생겼다. 주민 한 명이 자신은 어젯밤 실종된 형제를 보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형제가 실제로 어디에서 보였는지 묻자 설명이 계속 달라졌다. 주민은 당황해 화를 냈다. “당신들은 내가 거짓말한다는 겁니까?”
민규는 정면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기억이 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장 확실한 부분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주민은 한참 뒤에야 자신이 본 것이 형제의 얼굴이 아니라 형제가 늘 메고 다니던 파란 가방이었다고 인정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스쳤다. 루카가 가방의 특징을 묻자 주민은 어깨끈이 한쪽만 짧다고 답했다. 그 가방은 나중에 폐선 터널 입구의 사진에서도 확인되었다. 확신할 수 없다고 인정한 말이 오히려 새로운 단서가 된 것이다.
오후 세 시, 학교 운동장에 임시 연락소가 차려졌다. 학생들의 그림을 받는 자리, 의료 기록을 확인하는 자리, 옛 지도를 대조하는 자리로 나뉘었다. 누구나 실종 사실을 신고할 수 있었지만 신고한 사람에게 자동으로 증인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민규가 직접 붙인 규칙이었다.
“여기 제 동생 얘기해도 되나요?” 어린 학생이 물었다.
“물론이지. 기억나는 걸 말해 주면 돼.”
“그런데 제가 틀릴 수도 있어요.”
“틀릴 수 있다고 먼저 말하는 건 중요한 일이야. 틀린 부분은 나중에 고칠 수 있어.”
아이는 안심한 듯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머리가 곱슬거리고 오른쪽 신발끈이 늘 풀리는 동생이었다. 미라는 그 그림을 보자 눈이 커졌다.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나르던 아이와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의 기억만으로 동일인이라고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탐색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한편 영 번째 피난동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빈자리라고 표시된 구리판 가운데 하나가 사람 목소리를 냈다.
‘구조 완료. 미확인 인원 없음.’
바르트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방금 우리가 숫자를 모르는 걸 확인했는데 뭐가 완료야?”
셀레나는 구리판을 두드렸다. “기계가 기록된 숫자를 읽고 있어요. 실제로 안에 있는 사람을 센 게 아니에요.”
민규는 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구조 완료라는 주장의 근거가 뭡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판 위에 작은 글씨가 떴다.
[승인된 인원 수와 현재 인원 수가 일치함.]
“승인된 숫자가 틀리면요?”
[오류 신고를 접수할 수 없음. 승인자는 부재중.]
루카가 입술을 비틀었다. “승인자가 없는데 승인됐다고 하는 것도 웃겨요.”
“웃기면서 위험하지.” 민규가 대답했다. “그래서 이 장치를 멈춰 세워야 해.”
그러던 중 학교 바깥에 이상한 안개가 깔렸다. 평소에는 마을 정류장에서 보이던 종탑이 희미해졌고, 길을 걷던 주민 두 명이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출구를 봉쇄하기 전 아홉 번째 공간의 경계가 이동하는 현상이었다.
민규는 교사에게 주민들을 모으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대신 위치가 확인된 가까운 건물 안으로 안내하고, 출입구마다 사람이 실제로 지나가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미라는 세탁소와 인쇄소를 연결하는 안전한 골목을 표시했고, 케스는 마을 방송망을 이용해 확인되지 않은 지하 출입구에 들어가지 말라고 알렸다.
별은 경비실 책상에 앉아 안쪽 별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 밖에서 수프 두 번 먹던 사람을 찾았어. 안쪽에도 그런 사람이 있니?’
한참 뒤 종이의 가장자리에 흐릿한 글씨가 나타났다.
‘있어. 하지만 수프가 아니라 물을 두 번 마셨던 아이야. 그 아이는 이름을 알려 주려고 했는데 문이 닫혔어.’
별은 편지를 민규에게 가져왔다. 안쪽 아이의 기억이 바깥의 수색 기록과 꼭 같지는 않았지만 다른 단서가 되었다. 민규는 편지를 복사하고 종이 그대로 보관했다.
“아저씨, 안쪽 애를 꼭 데려와야 해요.”
“그래야지. 다만 언제, 어떻게 데려올지 우리가 제대로 확인해야 해.”
“저는 그 애랑 직접 약속했거든요.”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려고 안전한 길을 만드는 거야.”
연락소가 문을 닫을 무렵, 낮에 그림을 그렸던 아이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동생이 실종된 줄 알았는데 동생이 다른 마을 친척 집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그림을 돌려달라고 했다. 에일라는 그림을 없애지 않고 신고 정정 기록을 붙여 보관했다. 아이는 잠시 의아해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실종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사건도,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는 동생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해가 지기 전에 두 번째 문의 경고가 바뀌었다. 사람이 모두 나갈 수 있을 때만 열린다는 원래 문구 아래에 총국 명령이 겹쳐졌다.
[일괄 출구 봉쇄까지 6시간.]
케스는 즉시 총국에 정식 이의를 제기했다. 응답은 단 한 문장이었다.
[증인 인증을 완료하면 봉쇄를 연기할 수 있음.]
즉 누군가의 하루를 제10관찰자에게 넘기면 구조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케스는 그 선택지를 바로 공개했다. 사람을 속여 증인으로 세우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당장 한 명만 동의하면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의견과, 동의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반박이 나왔다.
민규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동안 문이 닫혀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겠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으면, 그들은 지금까지 상대해 온 기록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시간이 여섯 시간뿐이에요.” 케스가 대답했다.
“여섯 시간 동안 찾을 수 있는 걸 찾죠. 못 찾으면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다시 말하겠습니다. 사람을 속여서 증인을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바르트가 오래된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그럼 다시 벽 안을 보자고. 막는 장치에는 늘 고정 나사가 있고, 고정 나사에는 이유가 있지.”
민규는 손전등을 받아 켰다. 빛이 영 번째 피난동의 두 번째 문 아래를 비추었다. 먼지 속에 작은 발자국 하나가 나타났다. 성인도 학생도 아닌, 유난히 작은 신발 자국이었다.
도면 어디에도 없던 열 번째 통로에서 발자국은 문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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