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 뒤에 쓰인 날짜는 내일이었다.
정민규는 날짜를 세 번 읽었다. 복도 끝 벽시계는 새벽 두 시 십칠 분을 막 지나고 있었고, 그의 손목시계는 그보다 한 분 빨랐다. 며칠 전이라면 두 시계 가운데 무엇이 맞는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시계가 정확해도 그것을 기록하는 장치가 틀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제10관찰자 현장 도착 예정. 증인: 정민규.]
“내일 누구를 데려오겠다는 얘기입니까?”
흉터 없는 얼굴의 남자는 대답 대신 명찰을 반듯이 놓았다. 왼쪽 귀 뒤의 작은 점이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얼굴은 민규 자신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얼굴을 빌린 관찰자 에른과 달리, 이 남자는 누군가의 모습으로 움직이는 데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명찰을 벗은 뒤에는 손가락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도 도착할 사람을 모릅니다. 내가 받은 명령은 도착 전에 출근부를 완성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럼 명령서 원본을 보여 주세요.”
“원본은 없습니다.”
“복사본이라도.”
“그것도 없습니다. 내일의 기록이 어제의 기록을 덮었습니다.”
바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일을 시킨 사람도 없고 시킨 일만 남았다니. 우리 학교 회계실보다 더하군.”
평소 같았으면 루카가 웃었겠지만, 오늘은 아무도 쉽게 웃지 못했다. 학교의 복도에 이름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누군가 사라졌던 일을 그들은 이미 겪었다.
민규는 명찰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근무실의 빈 상자에 올리고 상자 뚜껑을 열어 두었다. 셀레나가 마법으로 봉인하려는 것을 손으로 막았다.
“닫아 놓으면 다음 사람이 우리가 뭘 봤는지 확인할 수 없어요. 일단 그대로 둡시다. 대신 두 사람이 번갈아 지켜보죠.”
“그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마력이 새어나가는 걸 막을 수 있을까요?”
“못 막을 수도 있죠. 그러니까 먼저 거리와 상태부터 재 봅시다.”
셀레나는 마력 잔광을 재고, 바르트는 상자 바닥의 진동을 확인했다. 에일라는 명찰을 정면과 뒷면에서 스케치했다. 기록은 셋으로 남았다. 기록망에 연결되지 않은 종이,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수정판, 마을의 공공 게시판에 걸어 둘 요약본. 한 장의 기록이 사람의 기억 전체를 대신하는 일은 다시 없게 하자는 약속이었다.
정은희는 끝내 명찰을 만지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직접 보지 못했다는 사람, 목소리는 들었나요?”
남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목소리라기보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 뒤에 명령이 나타났어요.”
“문이 세 번 닫혔나요?”
“어떻게 알죠?”
은희가 손가락을 오므렸다. 삼십 년 전 보건실 북쪽 창문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구조 신호가 세 번의 짧은 두드림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나던 날에는 그와 반대로, 문이 세 번 닫히는 소리가 들린 다음 바깥에서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닫는 소리만 들리고 여는 소리는 없었어요.” 은희가 말했다. “우린 누가 문을 잠갔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문이 잠겼다는 사실을 기록하도록 만든 걸지도 몰라요.”
민규는 이 이야기를 첫 출근 날의 이상한 기억과 연결했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전 누군가가 왼손으로 명찰을 달아 주었고, 그 사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세 번 닫히는 문. 얼굴 없는 담당자. 도착 예정인 열 번째 관찰자. 서로를 연결할 근거는 아직 없었지만 확인할 항목은 충분했다.
“내일 오기 전에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민규가 물었다.
“만나지 마십시오.” 남자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열 번째 관찰자는 만나는 순간부터 목격자가 필요합니다. 증인란이 비어 있으면 주변 사람을 빌려 씁니다.”
“빌려 쓴다는 게 어떤 뜻인지 정확히 말하세요.”
“한 사람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의 지난 하루를 가져갑니다. 가져간 하루는 도착자의 기억에 붙습니다.”
루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내일 그 사람이 도착하면 우리 중 한 명은 어제 일을 잊는 거예요?”
“최소한 한 명.”
루카의 손에서 연필이 떨어졌다. 그는 니아를 구하러 갔던 폐선 터널의 차가운 난간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미라와 다시 만났던 날의 파이 냄새도 기억하고 싶었다. 빼앗기기 쉬운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하루일 수 있었다.
민규는 연필을 주워 루카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기억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겠지. 네가 어제 한 일을 네 말로 적어 둬.”
“글씨를 지우면요?”
“다른 사람이 확인해 주면 되잖아.”
“그 사람 기억도 지우면요?”
민규는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우리가 안전을 확인했다는 말보다, 실제로 안전한 게 중요하니까.”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 민규는 기숙사 계단을 한 바퀴 돌았다. 삼층 계단참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오늘은 분홍색 우산이 걸려 있었다. 우산 끝에 매단 이름표가 매분 달라졌다. ‘로엔’, ‘수잔’, ‘미기록’. 민규는 이름표를 떼지 않고 교사에게 우산의 주인을 아는지 물었다.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자 기숙사 사감이 오래된 분실물 장부를 찾아왔다. 지난주 같은 우산을 신고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지난주부터 기숙사에 살지 않았다는 답이 함께 붙어 있었다.
“분실물만 없어지는 줄 알았더니 주인까지 없어지네요.” 사감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규는 우산 아래에 표지를 하나 붙였다. ‘주인 미확인. 보관 중. 아는 사람은 담당자에게 말할 것.’ 이름표가 다시 바뀌어도 표지는 그대로였다. 그는 우산에 매달린 작은 유리 구슬이 기록망과 연결된 통신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셀레나에게 점검을 의뢰했다. 그런데 셀레나는 구슬을 만지기 전에 우산에서 빗물이 계속 떨어지는 걸 발견했다.
“오늘 비가 왔나요?”
“밤새 맑았어요.”
“그럼 우산이 기억하는 비와 실제 날씨가 다르네요.”
그들은 우산을 밖으로 옮기지 않고 물받이부터 놓았다. 떨어진 물은 차갑지 않았고, 물받이에 고인 뒤에도 증발하지 않았다. 민규는 샘플을 작은 병에 담아 나디아에게 보내고 시간별 수량을 적었다. 기숙사에서는 이상한 우산 하나 때문에 계단을 봉쇄하지 않아도 됐다. 다만 그 앞을 지나가는 학생은 담당 교사와 함께 움직이도록 했다. 별것 아닌 점검 같았지만, 이름표를 따라간 아이가 엉뚱한 날짜로 넘어가는 일을 막는 데는 그런 절차가 필요했다.
이후 기숙사 사감은 학생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오늘 여기서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하니?’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같은 복도를 지나면서 서로 다른 친구를 봤다고 했다. 한 아이는 로엔을, 다른 아이는 수잔을, 또 다른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민규는 정답을 정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언제 어디에서 보았는지 적게 하고, 각 기록 옆에 작은 시계를 그리게 했다. 그중 두 기록에서 시계 바늘이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회의장으로 향하며 그는 수첩 한쪽에 적었다. ‘기록이 앞서가면 실제 길을 먼저 본다. 이름이 흔들리면 사람에게 묻는다.’ 그가 하는 일은 마법 이론을 증명하는 게 아니었다. 오늘도 이 계단을 지나 수업에 가야 하는 학생들을 지키는 일이었다.
아침 회의는 예정보다 일찍 열렸다. 오르반은 학교 수업을 전면 중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라가 손을 들었다. 이미 여러 날 학교가 멈췄고, 쉬어야 할 학생과 집에 돌아갈 학생을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를 복도에 세우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이라고 했다. 나디아도 동의했다. 사람을 모아 두는 것만으로 대피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시간별로 움직이는 작은 모둠을 만들었다. 바깥 출입구가 확인된 학생은 교사의 안내를 받아 귀가하고, 기숙사에 남는 학생은 창문과 계단을 점검했다. 루카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 일기를 직접 쓰게 도왔다. 누군가는 마법 시험을 망친 일을, 누군가는 동생과 싸운 일을 적었다. 특별한 사건만이 한 사람의 하루를 이루는 건 아니었다.
“왜 시시한 것도 다 적어요?” 한 아이가 물었다.
“그게 네 하루니까.” 루카가 대답했다. “누가 가져가려고 하면 시시하다고 주지 말고.”
민규는 경비실 출입문에 새 규칙을 붙였다.
[새 방문자는 동의 없는 증인을 지정할 수 없다. 출입이 확인되지 않으면 기록 보류.]
에일라가 그 문장을 읽고 말했다. “총국 규정에는 없는 규칙이에요.”
“총국 규정대로 했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보았으니까요.”
“기록을 남길 근거가 필요하겠군요.”
“방금 붙인 종이가 근거의 시작입니다. 더 나은 방법을 찾으면 바꾸죠.”
정오가 다가오자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학생들이 적은 일기 가운데 셋의 날짜가 엉뚱하게 바뀌었다. 어제 먹은 아침을 기록한 아이의 문장에는 아직 오지 않은 저녁 식단이 나타났고, 미라가 작성한 식재료 주문서에는 받아 보지도 않은 빵이 수령 완료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원본 종이는 그대로였다. 자동 기록판만 내일의 내용을 미리 받아 적고 있었다.
셀레나는 수정판을 밀봉했다. “누군가 우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보기에는 세부 사항이 너무 틀려요. 내일의 사실이 아니라 내일 있어야 한다고 정해 놓은 기록이에요.”
“그럼 오늘 저녁 메뉴를 바꿔 보면 알겠네요.” 미라가 말했다.
그녀는 원래 만들 예정이던 호박수프 대신 감자전을 내놓았다. 기록판은 한동안 저녁 메뉴를 ‘호박수프’라고 고집했다. 마을 주방에는 감자 굽는 냄새가 퍼졌다. 작은 검증이었지만 사람들은 안도했다. 내일의 장부가 오늘의 선택을 완전히 결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 번째 시험은 달랐다. 바르트는 예정에 없던 시간에 실습동 문을 열었다. 기록판에는 그가 그 문으로 들어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쓰여 있었다. 바르트는 실제로 문 앞에 서 있었는데도 그 문장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기분 나쁘군.” 그가 말했다. “내가 여기 서 있는데 저놈은 벌써 내 장례식이라도 치른 모양이야.”
민규는 그 자리에서 출입증을 바르트의 목에서 빼게 했다. 셀레나가 확인해 보니 출입증 안쪽의 작은 확인 부호가 내일의 기록과 동기화되고 있었다. 바르트가 움직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이 출입증의 미래 이력을 사람보다 먼저 받아들인 것이다.
“출입증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출입증을 따라갈 순 없죠.” 민규가 말했다.
그들은 실습동의 자동 인식기를 잠시 끄고 사람 두 명이 출입을 확인하는 임시 절차를 만들었다. 바르트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자 기록판의 사망 표시는 한 글자씩 깨졌다. 그 아래에 작고 낯선 문장이 남았다.
[제10관찰자 도착 경로 확보 실패. 대체 경로 요청.]
경비실로 돌아온 민규는 사건 지도에 붉은 선 하나를 그었다. 새 관찰자는 정해진 미래를 알려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을 이용해 정해진 미래를 만들려고 하는 장치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막아야 할 것은 내일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내일을 빌미로 누군가를 증인으로 삼는 방식이었다.
그날 밤 은희는 민규의 소매를 만지며 말했다.
“출근 전날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면접 전날 밤은 기억해요. 다만 회사에서 전화가 온 뒤 한 시간쯤이 흐릿해요.”
“그때 너한테 어떤 물건이 있었어?”
민규는 한참 생각했다. 통장 사본, 주민등록증, 구겨진 이력서, 그리고 작은 영수증.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어디선가 고장 난 시계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 같았다. 그 대가로 돈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영수증이 있었어요.”
“어디서 받은?”
“기억이 안 나요.”
“그럼 영수증부터 찾아보자. 잊은 사람을 탓한다고 기억이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민규는 어머니를 보았다. 아직 삼십 년이라는 거리가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같이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새벽 한 시, 에일라가 경비실로 달려왔다. 열 번째 출근부의 도착 예정 시각이 한 시간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날짜는 여전히 내일이었지만 시각은 모든 시계에서 다르게 나타났다. 그리고 최초 관찰자 칸에는 새로 한 줄이 쓰여 있었다.
[증인 후보 우선순위 1: 정은희.]
민규는 서류를 움켜쥐지 않았다. 그저 경비실 전화기를 들어 은희에게 알렸다.
“엄마, 지금 어디예요?”
“의료실 앞이야. 나디아랑 같이 있어.”
“거기서 움직이지 마세요. 제가 갈게요.”
전화를 끊으려는데 은희가 말했다.
“민규야. 늦어져도 알려 주겠다는 약속, 이번에는 엄마도 지킬게.”
경비실 밖에서 문이 세 번 닫히는 소리가 났다. 학교 어딘가에서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문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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