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올라왔다.
점검로 C의 금속 계단 네 번째 칸까지 물이 차오르자 정민규는 통신선으로 루카에게 신호를 보냈다. “학교의 기계실 도면에서 여덟 번째 피난동 배수관을 찾아 줘. 오늘자 수정본 말고 구형 종이도면.”
“찾아볼게요. 잠깐만요!”
루카의 목소리가 통신관을 타고 빠르게 멀어졌다. 미라가 옆에서 도면 서랍을 여는 소리도 들렸다. 터널의 한쪽에는 물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서가를 뒤지는 평범한 소리가 들렸다. 민규는 두 곳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바르트는 배수구 덮개를 열려다 손을 멈췄다. “여기 볼트가 두 개 빠져 있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잠근 것 같아요.”
루엔은 자를 대고 깊이를 재었다. “이건 완전히 막힌 게 아니에요. 아래에서 다른 수로가 밀어 올리는 겁니다. 반대편 수압부터 빼야 해요.”
점검로 C의 사진 확인 장치는 여전히 흉터 없는 정민규를 보여 주고 있었다. 화면에는 조건을 승인하라는 글씨가 반복됐다. [확인자 원본 1건 삭제.] 민규는 그 장치를 시험 삼아 두드리지도 않았다. 동의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긴 뒤 화면의 작동 상태를 살폈다. 유리 뒤에서 희미한 모터음이 났다. 마법 장치인 줄 알았던 문은 오래된 기계식 잠금장치를 함께 쓰고 있었다.
“전원이 끊기면 어떻게 됩니까?” 민규가 물었다.
“닫힌 채로 멈출 거예요.” 바르트가 답했다.
“그럼 전원을 끊는 건 지금 해결책이 아니군요.”
케스는 통로 너머로 몸을 숙여 소리쳤다. “니아! 듣고 있다면 대답해!”
처음에는 재생기에서 흘러나오는 과거의 목소리만 들렸다. [기준 얼굴 불일치.] 그런데 두 번쯤 숨소리가 섞이더니 사람 목소리가 나왔다.
“오빠… 거기 있어?”
케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규는 그에게 통신관을 잡게 하고 말했다.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지금은 공기를 아껴야 합니다.”
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뒤 겨우 말했다. “있어. 오래 기다렸어. 이제 나오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야.”
그 말에 일행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화면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만 보였기 때문이다. 니아는 자기 옆에 작은 아이가 있고, 아이는 물에 젖은 종이 표를 한 손 가득 쥐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제대로 이름을 말하지 못하지만 문이 닫힐 때마다 자기 그림자가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고 했다.
“몇 명입니까?” 민규가 물었다.
“나까지 둘. 아니….” 니아가 숨을 골랐다. “계단 위에 누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아까부터 대답을 안 해.”
민규는 경비 수첩에 [최소 2명, 추가 1명 가능]이라고 썼다. 장치가 내세운 구조 대상 1명이라는 숫자는 이미 틀렸다.
루카에게서 답을 기다리는 동안 구조대는 터널 입구에 작은 대기 구역을 만들었다. 토마는 차에 있던 방수포를 꺼내 바닥에 깔았고, 루엔은 젖지 않은 상자에 여분의 손전등과 배터리를 놓았다. 케스는 신호가 끊기지 않도록 통신선을 손에 쥐고 있었다. 누구도 오래 기다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계획 없이 뛰어 들어가면 사람 하나를 더 구해야 할지도 몰랐다.
“니아는 물을 무서워했어요.” 케스가 말했다. “어릴 때 강에서 미끄러진 뒤로 비가 와도 다리를 건너기 싫어했죠.”
민규는 그의 말을 듣고 통신관에 가까이 다가갔다. 니아에게 보낼 설명을 더 차분하고 짧게 정리했다. 물이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 계단 아래에 높낮이가 있는지, 손을 붙잡을 벽이 있는지 물었다. 니아는 기억을 더듬듯 한 문장씩 답했다. 발밑이 미끄럽고, 아이가 자꾸 계단을 오르려 하지만 손잡이가 떨어져 있어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아이에게 계속 올라가라고 하지 마세요. 물이 흐르는 반대편에서 움직이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민규가 말했다.
“알았어요.”
“아이한테 제 말이 들립니까?”
“네. 듣고 있어요.”
“그럼 아이에게 말해 주세요. 지금은 손잡이를 놓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요.”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니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 건 느껴졌다. 케스는 통신관을 붙잡은 채 자기 어린 시절의 동생을 생각했다. 물에 빠질 뻔한 날에도 니아는 자기를 구해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 했다. 지금도 자기 옆의 아이를 먼저 내보내려는 성격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셀레나는 수로에 물이 들어오는 주기를 측정했다. 세 번 빠르게 밀려왔다가 한 번 느리게 멈췄다. 그 간격은 터널 개찰구가 시간을 회수하던 박자와 비슷했다. 물의 흐름까지 기록망에 영향을 받는다면 단순한 배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이쪽 물은 바깥의 비 때문만은 아니에요.” 셀레나가 말했다. “기계가 사고 당일의 수위를 재생하고 있어요.”
“실제 물은 맞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맞아요. 가상 수위가 아니라 발을 적시는 물이에요.”
“그러면 원인을 나중에 고치더라도 지금 물은 빼야겠네요.”
바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학교에서 가져온 수동 펌프를 배수관에 붙였다. 손잡이를 눌렀다 당기는 데는 꽤 힘이 들었다. 루엔이 교대하자고 제안했지만 바르트는 조금만 더 해 보겠다고 했다. 그는 힘이 부치는 순간까지 버티다 손잡이를 넘겼다.
“기계가 낡아서 힘든 게 아닙니다. 제가 늙었나 봅니다.”
“둘 다일 수도 있어요.” 루엔이 말했다.
바르트는 한숨을 내쉬다 웃었다. 작은 농담 덕분에 긴장한 사람들의 어깨가 잠깐 내려갔다. 그러나 펌프의 물통이 차는 속도보다 안쪽 수위가 올라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다른 배수로를 찾는 일이 절실했다.
토마는 자기 차로 돌아가 길 안내 표식을 가져왔다. 터널 입구까지 드나드는 주민이 있다면 누구나 위험 구간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표지판에 커다랗게 [진입 금지, 구조 작업 중]이라고 썼다. 반대편에는 [기다리는 분은 이쪽]이라고 적어 급히 들어오려는 가족들이 안전한 장소에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했다.
아녜스는 차를 우려 종이컵에 따라 나눠 주었다. 그녀는 직접 터널 아래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주민들이 쌓아 놓은 방수포와 담요를 정리했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되려면 꼭 문 앞에서 영웅처럼 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물에 젖어 돌아왔을 때 마른 수건이 기다리는 것도 구조의 일부였다.
루카의 무전이 다시 왔다. “수로 도면을 찾았어요. 그런데 옛날 도면에서 네모를 지운 흔적이 있어요. 지운 자리를 빛에 비추니까 물길이 하나 더 나와요.”
민규는 그에게 도면 사진을 두 번 보내 달라고 했다. 한 번은 빛을 정면에서 비추고, 다른 한 번은 옆에서 비춘 상태였다. 두 사진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삭제된 물길은 원래 폐선 터널 바깥의 작은 하천으로 이어졌다. 민규는 물길을 만들 때의 높낮이를 확인했다. 학교에 있는 사람이 찾은 한 장의 종이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잘했어, 루카. 덕분에 배수로를 찾았어.”
루카는 숨을 들이켰다. “정말요? 그럼 빨리 열어요!”
“확인하고 열 거야. 하지만 네가 없었으면 확인할 길도 없었을 거다.”
무전 너머로 루카가 미라와 손바닥을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라는 동생에게 다음 도면도 확인해 보자고 말했다. 구조대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듣고 민규는 잠시 미소 지었다. 아이들은 위험한 통로에 들어가지 않고도 이 구조 작업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카메라가 물속에 잠기는 순간 영상이 한 번 흔들렸다. 바르트는 신호를 살리려고 선을 급하게 잡아당기려 했지만 민규가 고개를 저었다. 선이 팽팽해지면 안쪽 사람이 붙잡고 있던 물건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대신 여유분을 풀어 카메라를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화면이 돌아왔을 때 작고 젖은 손이 철제 난간을 잡고 있었다. 니아 옆에 있다는 아이의 손일 가능성이 컸다. 민규는 아이에게 자기 목소리가 들리는지 물었다. 곧바로 대답은 없었지만 손가락이 두 번 움직였다. 그 작은 반응을 확인한 뒤 그는 팀원들에게 상황을 다시 전했다. 누구도 아이가 구조에 동의했다고 섣불리 적지 않았다.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만 기록했다. 아이의 몸이 움직일 만한 통로를 마련하는 일이 먼저였다. 케스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자기가 동생을 구한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를 잊을 뻔했다고 조용히 말했다. 민규는 지금 알았으면 된다고 답했다. 그들은 구조 대상을 숫자가 아니라 각각의 사람으로 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녜스는 물이 빠진다는 소식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컵을 씻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면 더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토마가 터널 입구에서 나온 빈 물통을 가져왔다. 주민들이 돌아온 사람에게 따뜻한 물을 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었다. 아녜스는 통에 물을 채우고 깨끗한 수건을 옆에 뒀다. 구조대의 승리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밖에 나온 사람이 추위에 떨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마음은 분명했다. 토마는 그 통을 바람이 덜 부는 곳으로 옮겼다. 기다리는 사람의 노동도 현장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 루카가 소리쳤다. “찾았어요! 구형 도면에는 공공 우수관이 하나 더 있어요. 그쪽이 학교 실습동 배수관과 이어져 있어요.”
민규는 바르트에게 도면의 치수를 읽어 주었다. 바르트는 오래된 볼트 한 개를 돌려 공공 우수관의 차단판을 열었다. 막힌 수로가 갑자기 움직이며 바닥에서 낮은 진동이 올라왔다. 물이 한꺼번에 빠질 것 같았으나 배수관 입구에서 무언가 걸렸다.
“이쪽이 막힌 게 맞네.” 바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쇠창살이 휘었어.”
민규는 작은 카메라를 수로에 내려 보냈다. 철망에 걸린 것은 나뭇가지가 아니라 낡은 수선표 다발이었다. 얼굴 한 벌, 원본 확인, 확인자 삭제 같은 문구가 적힌 종이들이 비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문서를 배수관에 버렸다. 종이가 물을 막아 사람을 죽이는 지경이 된 것이다.
“기록은 버린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니까.” 바르트가 욕처럼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장갑을 끼고 철망을 분리했다. 루엔이 줄로 고정한 뒤 종이 다발을 한 묶음씩 끌어올렸다. 수로의 압력이 빠지면서 금속 계단의 물 높이가 천천히 내려갔다. 점검로 C 쪽에서 기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공기가 들어와요!” 니아가 외쳤다.
물이 빠진 뒤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진 확인 장치가 오히려 더 밝게 빛났다. [구조 정원 1명. 대상 초과.] 민규는 잠금장치의 기계식 부분을 조사했다. 오래된 설비는 구조대가 쓰는 수동 해제 손잡이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손잡이가 있는 자리는 벽 반대편이었다.
“안쪽 사람이 돌려야 하겠군요.”
“니아가 그곳까지 갈 수 있을까요?” 케스가 물었다.
민규는 바로 지시하지 않았다. 통신관으로 니아에게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지, 아이와 떨어지지 않고 갈 수 있는지 물었다. 니아는 바닥에 남은 물 때문에 조심해야 하지만 벽을 따라 이동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손잡이의 위치와 회전 방향을 설명하고, 힘들면 중단하라고 덧붙였다.
안쪽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서 니아가 신음했다. 케스의 손이 떨렸다. 그가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장치를 끌어당기려 하자 셀레나가 손등을 잡았다.
“안쪽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세요.”
마침내 오래된 걸쇠가 풀렸다. 문이 손바닥 너비만큼 열렸다. 민규와 바르트가 문틀을 받쳤고 루엔이 작은 등불을 밀어 넣었다. 니아는 먼저 젖은 종이 표를 든 아이를 내보냈다. 아이는 빛을 보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니아는 그 아이의 어깨를 잡은 채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케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막 마주한 동생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니아가 그를 알아보고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수건 끝을 잡자 그는 그제야 동생을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니아가 물었다.
“길을 너무 잘못 배웠어.”
두 사람은 오래 울었다. 그러나 민규는 구조 완료라고 적지 않았다. 계단 위에 누군가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인원을 다시 물었고, 아이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에 한 사람 더 있어요.”
니아는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람은 우리를 내보내려고 자기 얼굴을 문에 걸어 두었어.”
바르트의 손전등이 문 안쪽에 걸린 낡은 보호 유리를 비췄다. 그 유리에는 사진 속과 똑같은 흉터 없는 정민규의 얼굴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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