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데는 복잡한 주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민규는 나디아가 급히 마련한 의무실 침대 옆에서 구겨진 노란 봉투를 보았다. 봉투 안에는 카일의 사망 확인서가 있었다. 사망 시각은 사흘 뒤 새벽 두 시 십칠 분으로 적혀 있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각이었고, 확인자의 서명도 없었다. 서명란에 대신 그려진 것은 흉터 없는 남자의 얼굴을 형상화한 작은 도장이었다.
“제가 여길 나온 걸 저쪽이 아직 모르는 모양입니다.” 카일이 말했다.
“그럼 더더욱 서류대로 행동할 필요 없죠.” 민규가 대답했다.
카일은 웃으려다 기침했다. 나디아가 물을 건네자 그는 물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병실 창밖에서는 아이들이 급식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카일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자기 기억 속 학생들은 모두 삼십 년 전의 낡은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 바닥을 제가 닦았습니다. 아이들이 뛰면 미끄러질까 봐 밤마다 물기를 확인했죠.”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았다. 카일은 오랜 세월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사람이 걸어 다닐 바닥을 먼저 걱정했다.
그는 사고 전 마지막 점검을 떠올렸다. 중앙에서 내려온 감독관은 모든 피난동에 ‘죽은 사람이 먼저 나간 것으로 처리되면 살아 있는 사람의 통로가 열린다’는 이상한 계산식을 설치하라고 했다. 당시 기술자들은 항의했다. 그러나 감독관은 서류상 사람이 죽는 것과 실제 사람이 죽는 것은 다르다며 승인 도장을 내밀었다.
“그래서 설치했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첫 두 동은 설치했어요. 셋째부터는 겁이 나서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감독관이 제가 이미 사망 처리됐으니 지시를 거부할 자격도 없다고 했죠.”
카일은 손목 안쪽의 작은 화상 자국을 내보였다. 환기 통로 밸브를 열다가 입은 상처였다. 그는 사람의 생사를 대신 계산하는 장치가 지금도 돌아간다고 말했다. 오늘 들린 세 번째 울림은 여덟 번째 피난동이 누군가의 생존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케스는 병실 밖으로 나가 혼자 우산을 폈다 접었다. 그의 여동생 니아는 여덟 번째 피난동의 구조 신호를 남긴 사람이다. 카일이 말한 계산식이 그곳에서 작동한다면, 니아가 살아 있다는 증거조차 죽은 사람의 자료로 분류될 수 있었다. 민규는 케스 옆에 서서 급하게 위로하지 않았다.
“우산이 닳았습니다.” 잠시 뒤 민규가 말했다.
“동생이 제게 준 물건입니다. 삼십 년이나 썼으니 닳을 만하죠.”
“수선할 수는 있겠습니다.”
케스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우산 얘기를 하는 겁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생각해 보려고요. 다른 건 아직 확인이 더 필요하니까.”
케스는 웃다 눈가를 문질렀다. 그는 늘 결과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서류부터 처리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바라는 것은 동생이 살아 있다는 결론을 먼저 적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동생과 다시 말하는 일이었다.
늦은 오후 여덟 번째 피난동의 아녜스에게서 편지가 왔다. 폐선 터널에 설치된 개찰구가 표를 요구하지 않게 된 이후 안쪽에서 신호가 하나 더 들렸다는 것이다. 세 번의 종소리 끝에 누군가 네 번째로 두드렸다. 니아가 어릴 때 오빠에게 가르쳐 준 신호는 원래 세 번이었다.
“네 번째는 무슨 뜻이지?” 미라가 물었다.
케스는 손수건을 펴고 한참 바라봤다. “동생이 어렸을 때 신호를 바꾼 적이 있어요. 집에 돌아가서 할 얘기가 많으면 네 번 두드렸죠.”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요?”
“우리 가족뿐입니다.”
민규는 또 다른 증거가 있는지 확인했다. 특정한 신호는 복제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니아가 직접 알고 있던 사실을 물어볼 수 있다면 대화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아녜스에게 답신을 적었다. 위험한 문을 열지 말고,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세탁소의 통신관으로 돌아온 응답에는 사람 목소리 대신 아주 작은 박자 네 개가 섞여 있었다. 첫 박자는 길고, 둘째는 짧고, 나머지 두 개는 붙어 있었다. 케스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자 같은 박자가 나왔다.
“니아가 젖은 신발을 신고 올 때 이런 소리를 냈어요.” 그가 말했다.
셀레나는 신호가 과거 기록의 단순 재생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간 간격을 측정했다. 마지막 두 박자 사이에 아주 미세한 망설임이 있었다. 그 망설임은 질문이 바뀔 때마다 달라졌다. 단순한 녹음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반응에 가까웠다.
“확실한 생존 판정은 아직 어렵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 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커졌어요.”
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급하게 기뻐하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우산을 접어 옆에 두고 통신관에 가까이 다가갔다.
“니아. 오빠야. 네가 들으면, 집 앞에 심어 놓은 나무 이름을 알려 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어 느리고 불규칙한 소리가 들렸다. 네 번의 박자 뒤에 두 번, 다시 한 번. 케스는 눈을 감았다. 그건 말이 아니었지만, 여동생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물건 이름을 세던 습관과 닮아 있었다.
“버드나무.” 케스가 조용히 말했다.
정민규는 곧바로 대화를 끝내지 않았다. 신호가 끊기면 안쪽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방법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교대로 통신관을 지킬 사람을 배치했다. 이번 근무는 강제가 아니었다. 케스와 셀레나, 아녜스가 각자의 시간을 정하고, 쉬어야 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기로 했다.
카일은 의무실에 누워 있는 동안 자기 사망 확인서를 자꾸 만지려 했다. 나디아는 종이가 피부에 닿으면 몸의 시간이 흔들릴 수 있으니 잠시 봉투에 넣어 두자고 말했다. 카일은 순순히 따르다가 한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저걸 치우면 제 가족도 제가 살아 있는 걸 알아볼까요?”
민규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말했다. “바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카일 씨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전할 방법은 찾겠습니다.”
카일은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고 했다. 사고 당시 아들은 막 걷기 시작했고, 아내는 겨울마다 천으로 된 장갑을 떠서 주었다. 삼십 년이 지났다면 아내는 늙었을 것이고 아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상황을 상상하다가 고개를 떨궜다.
“살아 나왔는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찾아보죠. 그쪽이 원한다면 연락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에일라는 주민 명부를 조사했다. 카일의 가족 이름은 모두 남아 있었지만 주소가 바뀌었다. 아내는 몇 년 전 마을 남쪽으로 이사했고, 아들은 지금 다른 도시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일의 사망 신고는 세 번 접수되어 있었다. 사고 다음 날 한 번, 십오 년 뒤 한 번, 그리고 이번에 사흘 뒤 날짜로 한 번. 모두 다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왜 같은 사람을 세 번이나 죽은 사람이라고 적었을까요?” 에일라가 물었다.
“첫 신고로 끝내지 못했으니까요.” 카일이 답했다. “저쪽 기계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해야 돌아갈지도 모르죠.”
민규는 서류 세 장을 서로 다른 봉투에 넣었다. 하나를 폐기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는 반대했다. 누가 언제 왜 같은 판정을 반복했는지 알아야 다른 실종자의 기록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환자 앞에서 ‘사망자’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일은 피했다. 카일은 살아 있었고, 지금 보건실의 침대에서 따뜻한 수프를 먹고 있었다.
저녁 무렵 카일은 자기 가족에게 직접 보낼 짧은 편지를 썼다. 그는 복잡한 설명을 하려고 몇 번이나 글을 지웠다. 사고와 시간의 차이,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 혹시 만나고 싶지 않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 그러나 글이 너무 길어지자 결국 첫 장을 찢었다.
“뭐라고 쓰는 게 좋을까요?”
민규는 그의 대신 문장을 정하지 않았다. “먼저 지금 안전하다는 사실, 연락받을 수 있는 곳, 상대방이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적으면 어떨까요.”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짧게 썼다. [나는 살아 있습니다. 지금 학교 의무실에 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직접 만나 설명하겠습니다. 원하면 연락해 주세요.] 그 아래에는 삼십 년 전 아내가 부르던 별명을 덧붙였다. 그 별명은 총국 명부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나디아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말렸다. 카일의 손은 아직 떨렸지만 자신의 글씨를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사망 확인서보다 그 편지를 더 오래 바라봤다. 민규는 종이 한 장이 어떤 사람에게는 족쇄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집으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케스는 카일의 가족 기록을 찾는 일을 도우며 오래전 니아의 마지막 편지를 떠올렸다. 동생은 생전에 이름을 크게 쓰는 걸 좋아했다. 편지 봉투에 종종 작은 별을 그렸고, 오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늦게 돌아오면 식탁 위에 [오늘도 잘 자요]라고 적힌 쪽지를 남겼다. 실종된 뒤 케스는 그 편지를 버리지 못했고, 원본 유지과에서 근무하며 수없이 사람의 기록을 지우는 결재를 했다.
“나도 지웠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하루를 빼앗는 장치가 돌아가는 걸 알면서 문서가 정해진 양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민원을 돌려보낸 적이 있어요.”
민규는 그를 바라봤다. 케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변명하는 듯하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네. 그래서 이번에는 신고서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총국에 보낼 정정 요구서뿐 아니라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열람을 허용할 공개 기록도 만들었다. 나중에 어떤 기관이 무엇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다시 지워지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케스는 자기가 과거에 내린 승인 내역을 함께 적었다. 자신의 이름도 기록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한편 은희는 카일이 먹을 죽에 소금을 조금 넣었다. 삼십 년 만에 만난 사람이 끓여 준 밥이 특별한 마법을 갖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직 설명할 말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그런 평범한 식사가 필요했다. 카일은 한 숟가락 먹고 눈을 감았다.
“맛이 예전이랑 비슷하네요.”
“소금은 삼십 년 동안 안 바뀌었나 봐요.” 은희가 말했다.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카일의 다음 기침보다 오래 남았다.
카일은 편지의 봉투를 봉한 뒤 처음으로 사망 확인서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 에일라는 그의 가족에게 바로 편지를 보내기보다 먼저 상대가 연락을 받길 원하는지 확인할 방법을 마련했다. 오래전에 사람이 사라지면 남은 가족도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돌아왔다고 해서 그 삶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디아는 카일의 건강이 회복되기 전에는 무리한 여행을 하지 말도록 조언했다. 카일은 묵묵히 듣다가 학교 창밖의 나무가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고 말했다. 민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학생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오래전 누군가 심어 놓은 나무였다. 사람이 사라진 시간 동안에도 자란 것은 있었다. 카일은 나무의 그림자를 보며 다시 편지 끝에 조그맣게 한 줄을 덧붙였다. [급하게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돌아온 사람이 남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첫 번째 배려였다.
그날 밤 카일이 병실에서 마지막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감독관의 얼굴은 언제나 사진처럼 똑같았다고 했다. 웃을 때도 눈 주위가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얼굴 아래 목덜미에서는 땀을 닦는 손길이 실제 사람 같았다. 얼굴은 가면이었고, 그 아래의 사람은 일을 오래하다 지친 기술자였을지도 몰랐다.
“그가 한 번만 가면을 벗은 적이 있어요.” 카일이 말했다. “소매로 이마를 닦는데, 왼쪽 귀 뒤에 작은 점이 있더군요.”
민규와 은희가 동시에 얼굴을 들었다.
카일은 사망 확인서의 오른쪽 아래를 가리켰다. 정해진 바코드처럼 보이던 점 세 개 사이에 아주 작은 도형이 있었다. 그것은 하셀의 환기 설계도와 같은 형태였다.
“하셀은 저 도형을 남겼어요. 누군가가 거짓 확인을 한다면 진짜 사람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로 쓰라고요.”
도형을 확대하자 숫자가 나타났다.
[8동 외부 유지관. 마지막 대피 접점: 야간 점검로 C.]
니아가 있는 곳은 막연한 과거가 아니었다. 실제로 점검할 수 있는 지점 하나가 생겼다. 그러나 숫자 아래에는 또 한 줄이 있었다.
[점검로 C: 접근 즉시 기준 얼굴 확인.]
민규는 사진 속 흉터 없는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그 장소를 통과하려면 자신을 닮은 얼굴과 맞서야 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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