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실의 가장 아래 서랍은 그날 새벽까지 잠겨 있었다.
정민규가 직접 꺼낸 열쇠로 잠근 것은 아니었다. 원본실을 관리하는 늙은 경비원이 서랍의 바깥쪽 잠금쇠를 풀었고, 사람의 기록을 마음대로 옮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에일라가 두 번 확인한 뒤에야 서랍은 열렸다. 그런데 안에 들어 있던 낡은 사진이 펼쳐지는 순간, 약속을 받아 적던 펜이 에일라의 손에서 멎었다.
“저 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뜻인가요?” 셀레나가 물었다.
사진 속 남자는 마흔 전후의 모습이었다. 정민규와 같은 높이의 눈, 똑같이 구부러지는 입꼬리, 야근을 오래 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듯한 눈 밑의 잔주름까지 같았다. 그러나 왼쪽 눈썹 위는 말끔했다. 민규가 열 살 때 사고로 얻은 가느다란 흉터가 없었다. 사진 아래의 인장은 삼십 년 전 것이었다.
“제 얼굴을 닮은 사진이지, 제가 찍힌 사진은 아닙니다.” 민규가 말했다. “사진을 찍은 장소와 방법부터 확인하죠.”
루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거울이 뒤집혀서 흉터가 반대편으로 간 건 아닐까요?”
민규는 사진을 거꾸로 돌렸다. 경비복 왼쪽 주머니 위에 달린 깃표식, 벽에 붙은 피난동 번호, 바닥의 균열은 뒤집히지 않은 상태였다. 사진 자체를 뒤집어도 오른쪽 눈썹에 흉터는 보이지 않았다. 루카는 입을 다물었다.
“좋은 가설이었어. 확인하고 나면 다음 걸 생각하면 돼.”
에일라는 종이 뒷면에 있는 솜씨 좋은 필체를 판독했다. [피난동 통합 사고 이전. 총괄 설계 변경 승인, 검열 처리.] 승인란에 찍힌 것은 서명이 아니라 손바닥 크기의 희미한 사각형이었다. 잉크가 없는 곳만 네모꼴로 하얗게 남아 있었다.
“이런 지움 자국은 처음 봅니다.” 에일라가 말했다. “사람 이름을 지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칸째로 바꿔 넣은 것 같아요.”
옆에 서 있던 늙은 경비원은 유리 명찰을 가슴에서 떼어 책상에 놓았다. 그에게서는 여전히 사람의 몸보다 흐릿한 그림자가 먼저 보였다.
“설계자 얼굴은 수없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저 사진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언제부터요?”
“제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날부터요.”
“그날이 언제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기록에는 사고 하루 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규는 사진을 투명한 판 위에 놓았다. 날짜, 인장, 장소가 한꺼번에 믿을 수 없는 자료라면 셋을 따로 검사해야 했다. 그는 유리 가장자리와 종이 뒷면, 사진 속 그림자를 각기 다른 방향에서 비추었다. 셀레나는 마력을 감지하는 얇은 실로 사진과 원본실의 연결을 확인했다. 실은 종이가 아니라 사진 속 남자의 얼굴에만 가볍게 끌려갔다.
“살아 있는 마법의 흔적이에요.” 셀레나가 말했다. “저 종이가 누군가를 따라 얼굴을 바꾸는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여기서 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이 바뀌면요?”
셀레나는 사진을 가렸다. 에일라가 다시 펼쳤을 때 사진의 얼굴은 여전히 정민규였다. 루카가 혼자 보고, 오르반이 보아도 같았다. 다만 별이 의무실에서 원격 화면을 보았을 때는 잠깐 낯선 청년의 얼굴이 비쳤다. 별은 화면을 끄고 자신이 본 것을 조심스럽게 그렸다. 눈썹은 달랐고, 왼쪽 귀 뒤에 작은 붉은 점이 있었다.
“이 사람은 아저씨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별이 말했다. “근데 사진이 저를 보고 있었어요.”
민규는 아이에게 더 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사진은 다시 봉인했고, 별이 그린 그림은 아이의 동의를 얻어 복사했다. 아무리 중요한 단서라도 아이를 위험한 관측 장치로 만들 수는 없었다. 잠시 뒤 정은희가 화면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사진이 아니라 그림에 오래 시선을 두었다.
“저 귀의 점.”
은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가 삼십 년 전에 본 사람도 저랬어. 문을 잠그기 전에 설계도를 들고 왔던 남자였지. 그 사람은 분명 네 얼굴이 아니었어.”
오르반은 즉시 반발하지 않았다. 그는 삼십 년 전 보고서를 펼치고 자기 이름이 있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폐기된 서류의 빈칸은 이제 자기 실수까지 감출 수 없었다.
“그날 감독관은 외부 감사에서 파견됐다고 했어. 신원을 묻자 검증 완료 도장이 찍힌 사진을 내밀었지.”
“실제 얼굴을 보셨습니까?”
“모자를 썼고, 먼지가 많았어. 눈을 제대로 마주친 기억이 없군.”
“그럼 확인하지 않은 사람에게 문을 맡긴 겁니다.”
오르반은 오래 숨을 들이켰다. “그래. 그게 당시 내가 한 일이지.”
낮이 밝자 민규는 학교를 돌며 평범한 순찰을 했다. 어젯밤의 사진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화재 통로를 비워 두거나 기숙사 보일러 점검을 미룰 수는 없었다. 북쪽 기숙사 창문은 결로가 심했고, 학생 하나가 난간에 젖은 담요를 널어 놓았다. 민규는 담요를 치우도록 돕고, 물기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받침통을 놓았다. 루카가 옆에서 웃었다.
“아저씨는 세계를 구하고도 수도꼭지 걱정을 하네요.”
“수도꼭지가 터지면 오늘 저녁에 아무도 씻을 수 없거든.”
“그건 큰일이네요.”
“네 입장에선 특히 그렇지.”
두 사람은 웃었다. 그 웃음이 멈추자 루카는 사진에서 본 어른 민규의 얼굴이 정말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지 물었다. 그 아이는 삼십 년 전 자신의 누나가 갇혔던 구조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타인의 얼굴이 자기 앞에 나타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겁나는 건 당연해.” 민규가 답했다. “그래도 누군가 내 얼굴을 쓰고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따로 확인할 수 있어.”
정민규는 그날 오전 사진의 바깥쪽을 검사할 장소로 인쇄실을 골랐다. 이름을 지우는 마법과 관계없는 도구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 알고 싶었다. 낡은 확대기와 현상용 접시를 꺼내자 루카는 책상에 앉아 손전등을 켜고 끄는 일을 맡았다. 그는 제대로 된 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
“너무 밝게 비추면 안 될까요?”
“오래된 필름은 빛에 상할 수 있어. 한 장 더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조심하자.”
사진에서 빛이 통과한 자리는 균일하지 않았다. 얼굴 주변에는 가느다란 테두리가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보이지 않았던 선이 옆에서 비출 때만 떠올랐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림 위에 투명한 종이를 대고 다른 얼굴을 그려 붙인 듯했다. 에일라는 그 선의 모양을 일지에 베껴 그렸다. 테두리가 턱에서 목 아래까지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했다.
“얼굴만 올린 게 아닙니다. 목을 자르고 새로운 인물 사진을 붙인 거예요.”
루카는 서랍에 있던 다른 오래된 사진들을 가져왔다. 사고 전 수업 사진, 교무실에서 찍은 행사 사진, 우수한 학생들에게 상을 주던 장면. 교장 오르반은 젊어 보였고 은희는 열 살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마다 뒤쪽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자가 조금씩 달랐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구석에 서서 그림자 안으로 몸을 숨긴 사람 같았다.
“모자를 바꿨는데 같은 사람일까요?” 루카가 물었다.
“지금은 모릅니다. 다만 같은 위치에 여러 번 등장한 사람을 찾아보자.”
민규는 사진의 배경에 있는 사물들을 기준으로 촬영 장소를 정리했다. 벽돌 벽의 깨진 자리, 나무 기둥의 홈, 종탑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방향. 시간을 바꾸는 마법이 있는 곳에서도 물건에는 오랫동안 남는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을 맞추자 세 장의 사진이 모두 같은 건물 앞에서 찍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건물은 지금 학교 지도에 없었다.
“동쪽 실습동이에요.” 바르트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사고 직후 지붕을 뜯었죠. 환기 장치가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아서요.”
민규는 건물을 뜯을 때의 작업 지시서를 요청했다. 그 서류에는 실습동 동쪽 벽을 보존하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누가 왜 보존해야 하는지는 빠져 있었다. 단순한 공사 기록이 아니라 나중에 숨겨진 물건을 찾는 지도일 수도 있었다. 그는 서류를 사진과 함께 봉투에 넣고 [현장 대조 필요]라고 표시했다.
루카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결국 오늘도 범인을 못 찾았네요.”
“오늘은 사진이 바뀌어 보이는 이유를 하나 찾았잖아.”
“그건 범인 잡는 거랑 다르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는데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부르면 엉뚱한 사람을 잡을 수도 있어.”
루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건 사진들을 번호 순서대로 다시 정리했다. 한 장의 사진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고 다른 장에서는 거의 없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묻자 민규는 다시 설명했다. 그림자의 길이만으로는 시간을 확정할 수 없지만 촬영 방향과 주변 물체를 함께 보면 대략적인 시간대를 구분할 수 있다고. 루카는 그 말을 자기 수첩에 적었다.
실습동 이야기가 나오자 은희도 옛 기억을 꺼냈다. 한참 전 어린 민규는 학교에서 진행하던 공개 시설 체험에 따라왔다. 그날 아이는 기술자들이 쓴 노란 안전모에 손가락으로 별을 그리며 놀았다. 한 기술자는 아이에게 장난감 망치를 건네주었고, 다른 기술자는 장난감이어도 함부로 두드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은희는 두 기술자의 이름을 모두 잊었지만 한 사람이 오른손으로 장갑을 벗고 왼손으로 종이에 표시하던 모습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 사람 손에 무슨 상처가 있었어요?” 민규가 물었다.
“흉터는 잘 모르겠어. 다만 왼손으로 글을 쓸 때 펜을 위쪽으로 세우던 버릇이 있었어.”
에일라는 즉시 원본의 승인 표식과 일지의 빈 서명을 비교했다. 빈 서명이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펜 끝이 종이를 눌러 놓은 자국은 빛을 비스듬히 비추면 드러날 수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종이 밑에 부드러운 판을 대고 표면을 살폈다. 희미한 압흔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끊겼다.
“서명을 하다가 중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에일라가 말했다.
“누가 옆에서 종이를 가져갔을 수도 있겠네요.” 은희가 답했다.
민규는 어머니가 자기가 모르는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새삼 느꼈다. 은희는 삼십 년을 빼앗겼지만 그 이전의 시간까지 없어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사진을 더 보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오래전 사고를 떠올리는 일이 어떤 고통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생각나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진을 내려놓기 전 한 가지를 덧붙였다. 어린 민규가 사고 당시 왼쪽 눈썹을 다쳤을 때 자신이 상처를 닦았다는 것이다. 그 상처는 사고가 벌어지던 밤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니었다. 공개 시설 체험이 있던 날 실습동 문틀에 부딪혀서 생긴 것이었다. 따라서 사고 하루 전부터 흉터가 없었던 어른의 사진은 어린 민규가 미래에 성장한 모습이더라도 단순한 시간 이동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날 너 엄청 울었어.” 은희가 말했다.
“제가요?”
“응. 그런데 간호사가 소독하는 것보다 창피해하는 걸 더 무서워했지. 같이 온 애들이 놀릴까 봐.”
루카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민규는 오랜만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삼십 년간 낯선 사람의 사진을 쫓다가 자기 어린 시절의 우스운 장면 하나를 되찾은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말을 일지에도 남겼다. 그날의 상처가 단순한 외모 차이가 아니라 시간을 확인하는 단서였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에일라가 새 소식을 가져왔다. 서랍을 만든 목수의 제작 일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서랍은 사고 하루 전이 아니라 사고 사흘 뒤 설치되었다. 그 안에 있던 사진은 날짜가 자기보다 앞서 있었다. 일지에는 기묘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서랍은 인물을 보관하지 않는다. 사람을 알아보는 관찰자의 빈자리를 보관한다.]
민규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사진 속 얼굴이 바뀌는 까닭이 관찰자에게 있다면, 사진을 만든 사람은 이름을 지운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보고 있는지, 누가 보고 있기를 바라는지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밤이 되자 원본실에서 다급한 호출이 왔다. 삼십 년 전 사진 위에 새로운 날짜가 나타났다. 오늘이었다. 날짜 아래로 한 줄이 추가되었다.
[피사체 입실 대기. 실물 확인 시 원본 갱신.]
그날 밤 경비실에는 방문 예약이 없었다. 그런데 운동장의 마지막 가로등이 흔들렸을 때, 사진 속 남자만큼 긴 그림자 하나가 학교 담장 바깥으로 지나갔다. 민규는 곧바로 담을 넘지 않았다. 출입대장 옆에 새 봉투를 놓고 관찰 시각을 적었다.
“이제는 얼굴이 아니라 발자국을 확인할 차례군요.”
제8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