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삼십이 분.
정민규는 경비실 책상 위에 물건 네 가지를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만능 공구, 손전등, 가죽 장갑, 손으로 쓴 근무일지. 마법학교에서 가장 평범한 물건들이었다. 셀레나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걸 들고 두 번째 경비원을 만나겠다는 거예요?”
“만날 상대가 누군지 모르잖습니까. 그래서 제일 익숙한 걸 챙겼습니다.”
“보호 주문은 최소 열 개쯤 걸어 드릴 수 있어요.”
“주문이 역으로 연결될 수도 있죠. 그보다 경비실 밖에 서 계세요. 무슨 일 생기면 학생들부터 내보내 주시고요.”
루카는 책상 옆에서 낡은 폴더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교장실의 출입 기록 사본, 0층의 손도장 메모, 인쇄실 도면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도 함께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민규는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학생을 위험한 현장에 데리고 가는 건 내 일이 아니야.”
“제가 있어야 그 사람이 누나에 대해 말해 줄 수도 있잖아요.”
“그 사람이 너를 아는 척하면 더 위험할 수 있어. 가짜 미라를 봤잖아.”
루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밖에서 기록할게요. 못 믿을 말을 하더라도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어 둘 수는 있으니까.”
“그건 부탁하마.”
경비실은 본관과 별관 사이의 작은 건물이었다. 유리창에서는 운동장의 동쪽 담장이 보였고, 벽에는 작은 분실물 보관함이 있었다. 민규는 이 방에 처음 왔을 때 낡은 책상과 삐걱거리는 의자부터 손봤다. 이상하게도 유독 한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열쇠 구멍조차 없었다. 그는 서랍 안에 뭔가 오래된 보안 장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직 뜯지 않았다.
오늘은 그 서랍 아래에 얇은 종이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교대 준비 완료.]
그 아래에는 시간만 적혀 있었다.
[23:40.]
민규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밤 열한 시 삼십팔 분이었다. 그는 손전등과 휴대전화의 시간을 맞췄다. 휴대전화는 통신이 없지만 자체 시계는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 마법으로 작동하는 벽시계는 초침이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시간차가 벌어지고 있군.”
그는 책상 아래에 남겨 두었던 분필 선을 확인했다. 어제 두 번째 경비원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문 아래와 창틀에 짧은 표시를 남겨 두었다. 사람이 문을 열거나 창문을 넘어오면 분필 가루가 깨질 것이다. 마법으로 공간을 옮기더라도 방 안의 공기 흐름에는 작은 변화가 남을 수 있었다.
열한 시 사십 분이 되자 조명이 한 번 깜박였다.
바깥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규의 앞쪽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검은 경비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정민규와 똑같았지만 옷깃은 오래된 학교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왼쪽 눈썹 위 흉터까지 같았다. 다만 눈빛이 묘하게 낯설었다. 오래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잊은 얼굴이었다.
“교대 시간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어젯밤 무전기에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민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신원 확인부터 하시죠.”
“정민규. 경비원. 야간 근무.”
“생년월일은요?”
“기록에 없습니다.”
“이 학교 오기 전에는 어디 살았습니까?”
“학교 밖.”
“어느 나라였습니까?”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내 기록에 없습니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예상한 대로였다. 기억을 복제한 존재라면 사건 이전의 정보는 가졌을지 몰라도, 자신이 한국에서 겪은 구체적인 삶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 성함은요?”
검은 경비원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서러움이 떠올랐다.
“그 이름을 부르지 마.”
민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상대의 표정을 살피니 단순한 흉내로 보기 어려웠다.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 지하에서 들었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거짓 영상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실제로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도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너는 잃은 게 아니야. 밖으로 나갔잖아.”
“당신은 여기 남아 있었습니까?”
남자는 웃지 않았다. “나는 매일 그날 밤에 깨어나. 학생들이 계단에서 울고, 문이 닫히고, 누군가 뛰어오고…. 그다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삼십 년 동안요?”
“나에겐 며칠 같기도 하고, 삼십 년 같기도 해.”
민규는 공책을 펴서 상대가 한 말을 적었다. 상대는 손글씨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서류의 글자처럼 즉시 지워지지 않았다.
“너는 왜 기록이 남지?”
“직접 보고 판단해서 적으니까요. 아마 이 학교가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 쉽지 않은 방식인 모양입니다.”
“너를 폐기하면 내가 남는다.”
말이 끝나자 책상 위의 불빛이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벽에는 경고문이 떠올랐다.
[동일 사용자 감지. 중복 제거 절차 개시.]
두 사람의 이름표가 동시에 빛났다. 민규의 손에 있던 펜이 물처럼 녹아내렸다. 검은 경비원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나는 너를 없애러 온 게 아니야.”
“방금 폐기한다면서요.”
“저 장치가 그렇게 결정하는 거야. 나는 매번 똑같이 말할 뿐이고.”
민규는 상대의 손을 보았다. 손끝이 순간적으로 투명해졌다 돌아왔다. 검은 경비원도 장치에 갇혀 있었다. 그가 자신을 지운다면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오랫동안 그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 둘 다 중복 제거 장치를 꺼야겠군요.”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 했겠지.”
“제가 이 학교 온 지는 아직 일주일밖에 안 됐습니다.”
민규는 손전등을 켰다. 강한 흰 빛이 방 안을 가르자 검은 경비원의 그림자가 벽에 비쳤다. 흉터와 얼굴은 같았지만 그림자의 키는 훨씬 작았다. 아이의 그림자였다.
셀레나가 밖에서 외쳤다. “그림자 길이가 다릅니다!”
“밖에 있으세요!”
민규는 손전등 각도를 바꿨다. 검은 경비원이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는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손전등은 마법이 없어서 기록망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빛은 사물이 실제로 가린 자리만 비췄다. 움직이는 어른의 모습 아래에 열 살 아이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당신은 아직 열 살 때의 자세로 서 있는 거군요.”
“뭐?”
“문 닫히던 날의 기록이 그대로 유지된 거죠. 어른처럼 보이게 덧씌운 건 근무표이고.”
검은 경비원은 손을 내려다봤다. 큰 손이 순식간에 어린아이의 손으로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벽의 붉은 글자는 더욱 거세게 깜박였다.
[중복 제거 지연. 관리자 개입 필요.]
민규는 서랍에 손을 뻗었다. 막혀 있던 서랍 손잡이가 뜨거워졌다. 검은 경비원도 동시에 같은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만나는 순간, 민규의 머릿속에 낯선 복도가 떠올랐다.
열 살의 자신이 울고 있었다. 문 앞에는 머리가 짧은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소녀는 국화 무늬가 새겨진 시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는 그 시계를 어린 민규에게 건넸다.
‘네가 밖에 나가면 잊을 수 있어. 그래도 나를 찾으러 와 줘.’
그 순간 장면이 깨졌다. 민규는 책상에 몸을 기댔다. 검은 경비원도 같은 고통을 느낀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누구였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모르겠어. 이름이 지워졌어.”
“그럼 시계는 왜 오르반한테 있죠?”
“그가 가져갔으니까.”
“그 아이는 살아 있습니까?”
검은 경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경비실 서랍을 가리켰다.
“저기에는 네가 떠나기 전에 남겨 둔 것이 있어. 하지만 열면 학교가 알게 돼.”
“학교가 알아도 되는 건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민규는 만능 공구로 서랍의 하단 고정 나사를 풀었다. 앞면이 열리지 않는다면 바닥을 분리하면 됐다. 서랍 아래에서 누렇게 변한 공책과 작은 금속 장치가 나왔다. 장치에는 가느다란 손잡이가 있었고, 시계 같은 눈금이 둘러져 있었다.
[실물 시각 기준기.]
셀레나가 유리창으로 보며 외쳤다. “그건 옛날 시간 고정 실험에 쓰던 장치예요!”
민규는 기준기의 눈금을 읽었다. 02시 17분을 기준으로 앞뒤에 짧은 표시가 있었다. 작은 바늘을 움직이자 교실 벽시계의 초침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벽에서 중복 제거 경고가 잠깐 사라졌다.
“역시.”
그는 다시 손전등을 벽에 비췄다. 검은 경비원의 그림자는 이제 성인과 어린아이의 모습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처럼 일방적으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기준이 하나였을 때만 복사본이라고 판정한 겁니다. 실제 시간 기준이 두 개가 되니까 어느 쪽을 지워야 할지 판단 못 하는 거죠.”
민규는 기준기를 바로 믿지 않았다. 먼저 책상 위의 동전 두 개를 양쪽에 놓고, 각 동전 아래에 마른 먼지를 뿌렸다. 장치를 조금 돌리자 오른쪽 동전은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왼쪽 동전 밑의 먼지만 뒤로 이동했다. 누군가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실제 동전은 움직이지 않았고, 먼지의 '기록된 위치'만 바뀌었다.
“시간을 돌리는 기계가 아니라 시간표를 바꾸는 기계군.”
셀레나가 유리창을 열고 몸을 기울였다. “기준기가 현실의 변화와 기록의 변화를 구분할 수 있다는 말씀이네요. 마법학적으로는 엄청난 발견이에요.”
“그럼 지금부터는 아무도 임의로 돌리면 안 됩니다. 학생들 출석부하고 연결되니까요.”
그는 장치의 눈금에 분필로 작은 선을 남겼다. 다음에는 멈춘 손목시계와 전자식 휴대전화, 벽시계를 나란히 놓았다. 같은 방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보여 주는 도구들이었다. 민규는 셀레나에게 각 시계가 언제 바뀌는지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숫자 기록에 집착해요?” 루카가 창문 바깥에서 물었다.
“나중에 누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대답해야 하니까.”
“누가요?”
“지금 여기에 없는 사람들. 네 누나도 언젠가 물어볼지 모르지.”
루카의 표정이 잠깐 가라앉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춤에 넣어 둔 미라의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누나는 웃고 있었다. 몇 번을 들여다봐도 함께한 시간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자신이 그 웃음을 찾으려고 몇 번이나 지하로 들어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제가 물으면 말해 주세요. 제가 어떤 애였는지도요.”
“지금도 네가 어떤 애인지 보고 있다.”
민규의 대답에 루카가 멋쩍게 웃었다. 셀레나는 그 말을 들으며 수첩에 시간을 적었다. 이상한 장치와 마법이 아무리 많은 것을 지워도, 세 사람이 이 방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남기는 중이었다.
검은 경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장치를 멈추면 다른 이름들도 다시 살아날까?”
“가능성은 있겠죠. 하지만 학생들이 위험할 수 있으니 함부로 전체 장치를 돌리지는 않을 겁니다.”
“넌 여전히 그런 말을 하는구나.”
“뭘요?”
“사람을 먼저 내보내자고.”
검은 경비원의 얼굴에 처음으로 슬픈 웃음이 번졌다.
“그날도 그랬어. 문을 닫으라고 한 어른들 앞에서 끝까지 학생부터 내보내라고 했지.”
민규는 사라진 기억의 무게를 느꼈다. 자신이 지난 삼십 년 동안 평범한 시설 관리자로 살아오면서 지켰던 원칙이 이곳에도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당신이 그때 못 나왔다고 해서 당신이 덜 중요한 사람인 건 아닙니다.”
검은 경비원이 눈을 들었다.
“넌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잖아.”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말을 하고 두려워하고 기억하는 상대를 그냥 폐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비실의 붉은 빛이 천천히 옅어졌다. 검은 경비원은 자신의 가슴에서 낡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민규의 검은 열쇠와 같은 형태였지만 홈이 반대 방향이었다.
“내가 이걸 줄 수는 없어. 쥐는 순간 다시 근무자가 될 거야.”
“그럼 어디에 쓰는지만 말해 주세요.”
“종탑 아래. 열세 번째 종을 막는 장치야.”
“종이 열두 번까지 울리는 줄 알았는데요.”
“열세 번째는 학교가 없는 시간을 만드는 소리야. 그때마다 지워진 학생 한 명이 기록의 아래로 떨어져. 아직 늦지 않았다면…”
남자의 목소리가 끊겼다. 얼굴에서 색이 빠지더니 의자 위에는 낡은 경비모 하나만 남았다. 모자 아래에서 공책 페이지 한 장이 떨어졌다.
[복사본은 인간이 아니다.]
그 문장 위에는 어린아이 글씨로 뒤늦게 수정한 글이 있었다.
[틀렸다. 이름이 지워져도 나는 여기 있다.]
민규는 그 종이를 오래 내려다봤다. 경비실 밖에서는 셀레나가 학생들의 대피가 가능한지 확인하고 있었다. 루카는 열린 문으로 달려와 손목시계를 보여 주었다.
“아저씨, 이상해요. 제 시계가 멈췄어요.”
민규는 운동장 건너편 종탑을 바라봤다. 종탑의 네 면에 걸린 시계는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다가 동시에 두 시 십칠 분으로 바뀌었다. 아직 자정도 지나지 않았는데 종소리가 멀리 퍼졌다.
이번에는 학교 울타리 바깥의 마을 시계들까지 같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르반이 경비실 문 앞에 나타났다. 노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기관이 학교 밖으로 기록을 확장하기 시작했어.”
그가 종탑을 가리켰다.
“열세 번째 종이 울리기 전에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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