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반 교장은 종이 한 장을 읽는 데 유난히 오래 걸렸다.
그가 앉은 교장실에는 이백 년 된 시계가 일곱 개 걸려 있었다. 시계마다 시간은 조금씩 달랐지만 자정을 알리는 종만은 정확히 같았다. 민규는 오래전 경비 일지에 적힌 글씨를 책상 위에 놓고 교장이 종이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교장 오르반을 믿지 마. 그날 문을 잠근 건 그다.]
“어린 제가 쓴 편지입니다.”
오르반의 눈가가 잠깐 움직였다. “누가 주었느냐?”
“0층에서 나왔습니다. 누가 철관을 두드려 줬어요.”
“그 안으로 내려갔단 말인가?”
“출입 금지 표지는 못 봤습니다. 계단을 잘못 설계해 놓으셨더군요.”
오르반은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뒤로 기대앉았다. 창문 너머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종이 연을 띄우고 있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학생들은 바람을 직접 만들었고, 아직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그런데 이 방의 대화는 그 평화가 얼마나 얇은 막 위에 있는지 드러내고 있었다.
“서른한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교장이 입을 열었다.
“삼십 년 전, 기숙사에 큰 사고가 났다. 당시 학교는 지하 대피시설을 운영했지. 기억 보존실이라 불리던 0층은 사고를 겪은 아이들의 정신을 안정시키고, 가족을 찾는 데 필요한 기억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좋은 시설이었겠군요.”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다 학교 운영진이 그 기술을 다른 용도로 쓰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배우는 주문과 실험 기록, 교사의 지식, 시설의 관리 기록을 한 번에 연결하면 실수가 없는 학교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누가 생각한 겁니까?”
“당시 기억 마법 위원회다. 위원 중 일부는 지금도 학교 기록에 이름이 남아 있다.”
셀레나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베르안 교수님도 위원이셨나요?”
오르반은 대답했다. “그분은 마지막까지 반대했지. 학생을 기록의 부품으로 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규는 팔짱을 풀었다. “지금 학교 출입 구슬이며 식당 접시며 전부 학생 명단하고 연결돼 있습니다.”
“초기 설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사고 뒤에도 끊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아무것도 끊을 수 없었다. 전력과 마나, 대피 기능까지 하나로 엮여 있었으니까.”
민규는 셀레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실험실에서 발견한 문제와 똑같았다. 하나가 고장 나면 다른 기능까지 함께 멈추는 구조. 강력하지만 위험한 시스템이었다.
오르반은 낡은 은시계를 들어 보였다. 안쪽에 열쇠 모양으로 금이 가 있었다.
“그날 새벽 두 시 십칠 분, 학생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보호 대상 명부에 등록된 아이들이 하나씩 다른 학생의 기록으로 대체되었지. 문을 열면 밖에 있는 사람까지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나는 0층을 봉인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데요?”
“당시에는 문을 여는 순간 전부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게 사실이었습니까?”
오르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민규는 잠시 교장을 바라봤다. 사람이 죽을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문을 닫는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삼십 년이 지나도록 확인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문제였다.
“저 같은 아이가 안에 있었죠?”
“그랬다.”
“그런데 저는 한국에서 어른이 됐습니다.”
“문을 닫기 직전 한 아이가 외부로 탈출했다. 공간을 가로질러 다른 세계로 떨어졌지. 그게 너다.”
민규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에서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젖은 돌계단, 왼쪽 눈썹 위로 따끔하게 흐르던 피, 낯선 교복. 그러나 다음 기억은 한국의 오래된 골목이었다. 두 장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 어린 시절 기억이 거짓이라는 겁니까?”
“아니다. 너는 외부에서 살아온 시간이 있어. 그 기억은 진짜다. 다만 그보다 앞선 사건 하나가 통째로 빠져 있을 뿐이지.”
“그럼 그때 학교에 있던 저는 누구였습니까?”
“외부에서 온 보호 대상이었다. 출생지도, 가족도 확인할 수 없었던 아이. 이름은 정민규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은 그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민규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열 살까지 길러 준 어머니. 만약 열 살 때 다른 세계에 들어왔다가 돌아간 것이라면 기억은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을 수 있었다. 설명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 설명만으로는 사라진 시간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닫은 뒤 안에 남은 저는?”
“보존 장치가 당시 너의 기록을 분리해 놓았다. 바깥으로 나간 몸과 안쪽에 남은 기록이 서로 다른 시간을 보낸 거지.”
셀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록만 남았는데 어제 경비원으로 말을 걸 수 있었나요?”
“그래서 내가 아직도 두렵다. 기록이 스스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단순한 영상이 아니니까.”
오르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사람의 의식이 보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규는 책상 위에 두 번째 종이를 놓았다. 거기에는 루카의 누나 미라가 삼십 년 전 사진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정리해 뒀다.
“이 학생은 두 해 전에 학교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왜 삼십 년 전 사진에 찍혀 있죠?”
오르반의 얼굴이 처음으로 크게 일그러졌다.
“미라가 거기 있었다고?”
“모르셨습니까?”
“그 아이가 0층을 찾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 사진에 남을 줄은….”
셀레나는 책상 위의 시계 일곱 개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0층에서는 시간이 기록된 순서대로만 흐르지 않는 거예요. 같은 시각의 사고들이 겹쳐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미라가 실종된 뒤 삼십 년 전 0층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겠군요.” 민규가 말했다.
오르반은 침묵했다. 그의 손에 들린 은시계의 초침은 어느새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 다른 세계에서 돌아온 저를 왜 뽑으셨습니까?”
오르반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봉인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학교 곳곳의 기록에 손을 대고 있었지. 네 이름을 가진 기록이 지하에 있으니, 살아 있는 네가 돌아오면 공명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경비원 모집 공고를 만들었군요.”
“네가 시설을 살피는 일을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마나가 없는 사람은 기록망의 명령을 곧바로 따르지 않을 수 있지.”
“그건 저를 고용한 이유군요. 설명 없이 위험한 학교에 들여보낸 이유는 아닙니다.”
오르반은 눈을 감았다. “맞다. 그건 내 잘못이다.”
셀레나는 교장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늘 옳은 판단을 내리던 노인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뤄 둔 일을 마주한 사람처럼 보였다.
민규는 종이를 다시 접었다. “그럼 이제 원본 명부를 복사하겠습니다. 기록망이 지우려는 이름을 사람 손으로 남길 겁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복사하는 건 단순합니다. 그걸 막는 장치가 문제지.”
“원본 명부에 접근하면 관리자가 움직일 거다.”
“관리자는 누구입니까?”
오르반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위원회의 서기관. 당시 사고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다. 기록상으로는 이미 죽었어야 하지만, 그의 서명은 여전히 새 문서에 나타난다.”
“서명만 남은 사람인가요?”
“아니면 서명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사람이거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민규가 말했다. “서른한 명 중 기록에 남은 두 사람을 제외하면 스물아홉 명입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죽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없다.”
“그런데 왜 삼십 년 동안 실종자로 처리했습니까?”
오르반은 창밖을 보았다. “죽었다고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언젠가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다음에는 문을 여는 게 무서워졌지. 결국 학교의 안전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그 아이들의 시간을 멈춰 놓았다.”
민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책임을 인정하는 말보다 그 뒤에 무엇을 할지가 중요했다. 그는 창턱에 놓인 오래된 비상 대피 지침을 집어 들었다. 그 지침에는 마법 폭발이 일어났을 때 학교 전체를 비우는 순서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아래에는 '기억 이상 현상 발생 시 현장 봉쇄 및 보고'라고만 쓰여 있었다.
“실종된 학생을 찾는 방법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쓰지 못했다.”
“그러니까 다시 쓰겠습니다. 제가 경비원이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겠습니다.”
셀레나는 민규가 적어 놓은 새로운 지침을 읽었다. 학생이 자기 이름을 잊거나 명부와 다를 때는 격리보다 먼저 증인을 확보할 것, 필요하지 않은 마법 인증을 일시 중단할 것, 오래된 기록은 종이에 재기록할 것, 학생의 말을 사실 확인 없이 거짓으로 판단하지 말 것. 하나하나는 특별할 것 없는 조항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읽으며 자신이 왜 그동안 이 문제를 외면했는지 부끄러워졌다.
“이 지침을 학생회에도 전달하죠.” 셀레나가 말했다.
“교수님 이름으로 가능합니까?”
“교장 승인 없이도 실험실 안전 공지는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실험실 안전 공지라는 제목을 달죠.”
루카가 먼저 손을 들었다. “학생들한테 전달할 방법은 제가 알아요. 공지보다 소문이 훨씬 빨라요.”
“사실 아닌 얘기는 퍼뜨리지 말고.”
“네. 다만 ‘이름 잃어버린 친구를 모른 척하지 마라’는 건 꼭 말할게요.”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알고 시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서로를 기억하게 만드는 일은 당장 시작할 수 있었다.
교장실을 나서기 전에 민규는 책상 위의 은시계를 다시 살폈다. 시계 뒷면에는 학교 문장이 아니라 작은 국화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아주 평범한 꽃이었고 마법학교의 어떤 휘장에도 쓰이지 않는 무늬였다.
“이 꽃은 어디서 난 겁니까?”
오르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아이가 가지고 온 시계야.”
“저요?”
“아니. 네가 0층에 들어올 때 함께 있었던 아이.”
민규의 가슴이 세게 뛰었다. 사진 속 미라는 삼십 년 전의 0층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 시계의 꽃무늬는 그보다 오래된 자신의 집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손수건에 수놓던 꽃과 닮아 있었다.
“함께 있었던 아이의 이름은요?”
오르반은 한참 망설였다. 그가 입을 열자 책상 위의 서류가 바람도 없는데 팔랑거렸다. 새하얀 표지 위로 빨간 선 하나가 길게 그어졌다.
“그 이름을 지금 말하면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려질 거야.”
“누구한테요?”
“아직도 명부를 고치는 자에게.”
민규는 시계의 꽃무늬를 머릿속에 새겼다. 이름을 들을 수 없다면 물건을 통해 찾아보면 된다. 종이에서 사라지는 사람이라도 낡은 시계의 흠집과 수놓은 무늬까지 통째로 없앨 수 있는지는 확인해야 했다. 그는 휴대전화로 시계의 모습을 찍었다. 화면에 사진은 남았지만 꽃무늬 부분만 검은 점으로 뭉개졌다.
“이것도 기록에 걸리는군요.”
민규는 펜을 꺼내 자신의 수첩에 꽃을 그렸다. 꽃잎 여덟 개가 둘러싸인 형태였다. 수첩 속 그림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남아 있는 사람을 찾는 단서 하나가 더 생겼다.
교장실 문 밖에서 발걸음이 들렸다. 누군가 서류를 두 장 겹쳐 내려놓는 소리도 났다. 곧 행정실 직원이 들어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교장 선생님, 정문 통과 기록에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낮에 대피시킨 레온 학생이 학적에서 사라졌습니다.”
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온은 어디 있습니까?”
“급식실 옆 대기실에 있습니다. 친구 둘이 지키고 있어요.”
“바로 가겠습니다.”
오르반이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잠깐. 오늘 밤까지는 지하에 가지 마라.”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밤이 되면 제2경비원이 근무를 시작한다. 그와 마주치면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사본인지 판단할 수 없을 거다.”
“이미 이름이 지워지는 학생이 있습니다.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나한테 계획을 말해라.”
“계획은 간단합니다. 학생을 안전한 곳에 모으고, 기록을 복사하고, 위험한 장치를 격리하는 겁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이제부터 아무것도 숨기지 마십시오.”
민규는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교장실 벽에 걸린 오르반의 초상화가 갑자기 말했다.
“그 아이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있지 않나?”
그림 속 오르반은 실제 오르반과 달리 웃고 있었다. 앉아 있던 노인은 그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너는 누가….”
“기록이 기억하고 있지. 그날 문을 잠근 손은 네 것이지만, 문을 열라고 외친 목소리는 그 아이의 것이었어.”
민규는 손을 멈췄다.
초상화는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이가 열려고 했던 문 뒤에는 아직 네가 모르는 게 있다. 그날 살아 돌아온 사람이 정말 너 하나뿐이었을까?”
말이 끝나자 그림 속 오르반의 얼굴은 빈 캔버스처럼 지워졌다. 진짜 오르반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때 민규의 주머니에서 검은 열쇠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금속 표면 위로 지금까지 없던 문장이 떠오르고 있었다.
[제2경비원 호출 승인. 오늘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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