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안에서 들린 별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미라였다.
“지금 별이는 의무실에 있어요. 루카랑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정민규는 바로 마법 통신관으로 의무실에 연락했다. 나디아가 받았다. 별은 의자에 앉아 종이 모자를 만들고 있었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민규가 통신관 가까이에서 별의 목소리를 듣자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왜요? 무슨 일 났어요?”
“아직 확인하는 중이야.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전 여기 있어요. 루카가 모자 접는 걸 잘못 가르쳐 줬어요.”
옆에서 루카가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규는 둘의 말다툼을 조금 듣고 통신관을 끊었다. 사소한 다툼이 이어지는 의무실의 분위기는 어딘가 안심이 됐다. 별은 분명 지금 여기에 있었다.
“목소리가 같아도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민규가 거울에 말했다.
원본실 의자 아래에 웅크린 작은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별을 닮은 소년이었지만 머리카락이 종이 대신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 소년은 빈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나갈 수 없어요. 나가면 밖에 있는 애가 없어지니까.”
“누가 그렇게 말했니?”
소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적혀 있어요.”
에일라는 소년을 즉시 ‘복제체’로 분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기록을 그대로 믿은 탓에 일어난 일을 너무 많이 봤다. 그녀는 서기관에게 유리 명찰과 종이 명찰의 기록을 비교하게 했다. 두 문서에는 같은 시간이 기재돼 있었지만 근무 시작 사유가 달랐다. 종이 명찰에는 ‘대기자’, 유리 명찰에는 ‘관측 원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 아이는 별이의 원본이라고 주장하려는 장치인가 봐요.” 셀레나가 말했다.
“주장과 사실을 구분합시다.” 민규가 대답했다. “별이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할 권한이 저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원본실 안의 아이가 일어나면서 책상 끝에 놓인 유리잔 하나가 쓰러졌다. 잔은 깨지지 않고 그대로 종이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이는 놀라 손을 뻗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여기선 물건도 자꾸 없어져요.”
“누가 너를 여기에 두었는지 기억하니?”
“첫 번째 경비원이요. 근데 그 사람이 자꾸 얼굴을 바꿔요. 어떤 날은 저를 만들었다고 하고, 어떤 날은 저를 구했다고 해요.”
아이의 말은 별의 증언과 닮았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달랐다. 밖의 별은 자신의 출생 기록을 모른다고 했고, 안쪽 아이는 누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는지를 기억했다.
케스가 거울 옆에 섰다. “저 아이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원본실이 우리의 반응을 시험하는 건지도 몰라요.”
“그래서 바로 열지 않고 있는 겁니다.” 민규가 말했다. “그렇다고 겁나서 대화조차 중단할 필요는 없죠.”
그는 아이에게 현재 시간을 말해 주고, 오늘 날짜를 적은 종이를 거울 앞에 놓았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가리켰다. 유리 명찰이 한 번 빛났다. 곧 종이 위의 숫자가 흐려지더니 십 년 전 날짜로 바뀌었다.
“지금 저 안에서는 다른 날을 보여 주는군요.” 에일라가 말했다.
민규는 종이를 치웠다. 날짜를 강제로 맞추려 하면 원본실이 또 누군가의 시간을 가져갈 수 있었다. 그는 별도로 두 날짜를 적고 그 차이만 확인했다. 위험한 실험을 계속하기보다 지금까지 관찰한 내용으로 충분했다.
그때 원본실 책상 위에서 종이뭉치가 솟아올랐다. 서기관의 이름이 적힌 문서였다.
[불일치 기록 폐기 승인 요청.]
서기관이 손을 떨었다. 그는 오랫동안 불일치한 문서를 처리하기 위해 한쪽 기록을 삭제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절차가 어떤 사람의 존재를 지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인하지 않겠습니다.” 서기관이 말했다.
“그러면 기록들이 서로 다르잖아요.” 거울 안의 경비원이 답했다.
“서로 다른 사실을 하나로 만들기 전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너무 빨리 고쳤습니다.”
경비원은 잠시 고요해졌다. 그는 서기관이 자신의 명령을 거절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원본 유지과의 목적은 하나의 진실을 남기는 것입니다.”
“하나의 서류만 남기는 건 진실과 달라요.” 케스가 말했다.
그는 검은 우산 안쪽에 숨겨 두었던 폐기 명령서를 모두 펼쳤다. 총국은 자기에게 지우라고 명령했지만, 그 문서들에는 누가 어떤 때 명령을 바꾸었는지 추적할 수 있는 흔적이 있었다. 일부는 과거 자신의 동료가 서명한 문서였다. 케스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문서를 없애지 않기로 했다.
“이건 공개가 필요할 겁니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실종자 개인 정보까지 전부 공개할 수는 없어요.”
에일라는 접근 권한을 나누자고 제안했다. 주민이 겪은 시간 손실은 동의받은 범위에서 공개하고, 개인의 이름과 의료 내용은 보호하며, 책임자들이 바꾼 명령의 이력은 별도 보관하는 방식이었다. 오르반은 학교장 명의로 그 절차를 승인했다.
설명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작은 갈등이 생겼다. 학생 대표들은 자신들도 참석하고 싶다고 했지만 몇몇 교사는 위험한 내용을 알면 아이들이 더 불안해할 거라고 걱정했다. 미라는 학생 대표로 나와 조용히 말했다.
“모르는 채로 방에 있는 게 더 무서울 때도 있어요. 다만 알고 싶지 않은 학생도 있겠죠. 듣고 싶은 만큼 들을 수 있도록 하면 안 될까요?”
오르반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강당 뒤쪽에는 조용히 나갈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하고, 설명 자료는 쉬운 말로 따로 인쇄했다. 이름이나 의료 기록 같은 개인 정보는 애초에 자료에서 제외했다. 질문을 적는 종이에는 본인의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표시했다.
설명회가 시작되기 전 루카는 책상 위에 종이별을 세 개 놓았다. 별에는 질문을 적어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말을 하기 어려워할까 봐 생각한 방법이라고 했다. 미라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카는 어색해서 손을 뿌리쳤지만 얼굴은 뿌듯해 보였다.
설명회가 끝난 뒤 학생들은 생각보다 평범한 질문을 많이 했다. 내일 수업은 있는지, 기숙사 창문은 잠가야 하는지, 빵집에서 산 과자는 먹어도 되는지. 셀레나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거대한 비밀보다 오늘 밤 잠들 곳을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규는 마지막까지 남아 조명과 비상문을 확인했다. 어린 학생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 실종자가 돌아오면 저희도 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어요?”
“그분이 원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 다만 먼저 쉬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거야.”
학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환영 편지만 써 둘래요. 나중에 읽고 싶으면 읽을 수 있게요.”
그날 강당 한쪽에는 누군가의 이름을 미리 정해 놓지 않은 봉투 몇 개가 쌓였다. 사람을 기다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시키지 않는 편지가 가장 다정한 방법일 때도 있었다.
그날 밤 학교 강당에서 긴급 설명회가 열렸다.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거울 속 소년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폐선 터널에서 회수한 통행료 기록이 학생과 주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규는 알지 못하는 부분은 모른다고 말했고, 잘못된 설명으로 불안하게 만든 부분은 바로 정정했다.
한 주민이 손을 들었다. “그럼 우리 아이가 잊었다는 생일도 누군가 빼앗아 간 겁니까?”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민규가 대답했다. “잊은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게 하거나 아는 날짜를 바꾸지 마세요. 본인이 편할 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또 다른 주민이 물었다. “기록을 전부 태우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케스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록을 태우면 실종자를 가둔 명령의 흔적까지 사라집니다. 필요한 건 무작정 보존하거나 무작정 삭제하는 일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를 지키면서 책임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날 저녁 케스는 동료 감사관에게서 개인적인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총국 내부에 모든 정보를 공개하면 자신의 직위도 지키기 어렵다는 경고였다. 케스는 편지를 구겨 버리지 않았다. 한동안 책상에 앉아 자신의 급여 명세서와 오래된 가족 사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총국에서 일해 온 시간이 길었다. 그곳을 잃는다면 지금까지의 생활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문서를 보며 잘못된 명령을 정상으로 처리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이 지닌 지위 때문에 입을 닫는다면 이번에도 니아와 다른 실종자들의 기록은 뒤로 밀려날 수 있었다.
민규가 보고서를 받으러 왔을 때 케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두렵습니다. 이번엔 내가 조사하던 사람이 아니라 조사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혼자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민규가 대답했다. “우리는 각자 확인한 것에만 서명하면 됩니다.”
케스는 그 말에 잠시 웃었다. 과거의 자신은 모든 결론이 하나의 도장 아래 모여야 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이제 그는 여러 사람의 기록이 서로 견제해야 잘못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편지에 답장을 썼다. 조사 대상자의 개인 정보는 보호하되 절차를 중단하라는 명령의 근거와 책임을 명확히 밝혀 달라는 내용이었다. 굳이 분노를 과장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확인한 사실과 확인하지 못한 사실을 구분해 적었다. 천천히 쓴 편지는 그날 케스가 내린 가장 큰 결심이었다.
강당의 뒤쪽 벽에는 학생들이 만든 그림이 몇 장 걸려 있었다. 하나는 밤하늘을 그린 수채화였고, 다른 하나는 학교 기숙사 앞에서 친구끼리 웃는 모습이었다. 그림 가운데 한 장에는 얼굴이 없었다. 화가 난 학생이 일부러 지운 게 아니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친구를 위해 빈자리를 남겨 둔 것이었다.
오르반은 그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삼십 년 전 자신은 학교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문을 닫았다. 그 뒤로 그 문 안에 있던 사람들을 확인하는 일을 미뤘다. 지금은 학교 학생이 가장 먼저 친구의 빈자리를 그려 두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건물만 지키려고 했나 봅니다.” 그가 혼잣말했다.
에일라가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는 건물만으로 존재하지 않죠. 학생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어야 학교예요.”
오르반은 벽에 걸린 그림을 떼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작은 안내문을 붙였다. 돌아온 학생이 원한다면 이 그림의 빈자리를 채워도 된다고,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남겨 두겠다고 적었다.
그날부터 강당에는 이름을 미리 정하지 않은 환영 편지들이 하나둘 쌓였다. 그림을 그린 학생은 자기 종이를 보며 조금 웃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방식은 바꿀 수 있었다.
설명회 뒤 오르반은 혼자 남아 텅 빈 강당을 바라봤다. 그는 삼십 년 전 사고 당시 자신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떠올렸다. 모두가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오늘 확인한 자료를 학생과 부모에게 설명할 책임이 있었다.
민규는 강당 문을 정리하다 그를 만났다.
“교장 선생님, 전등 끄기 전에 문 두 곳만 더 확인하겠습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실 생각인가?”
“교대할 사람이 있으면 그만하죠. 혼자 여기서 늙을 생각은 없습니다.”
오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삼십 년 전 우리가 했어야 했네.”
종탑의 유리 명찰에 새로운 통고가 나타났다.
[불일치 기록 폐기 실패. 최초 근무자 권한 재심.]
이어 두 번째 줄이 떠올랐다.
[원본 유지과 제안: 검증자에게 하루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원본실 내부자 한 명의 기록을 삭제한다.]
민규는 종이를 그대로 봉투에 넣었다. 협상처럼 보였지만 상대가 제시한 대가는 다른 사람의 존재였다. 지금의 학교에서는 그런 조건으로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울 속 아이는 그 통고를 보고 웃었다. 아주 슬픈 얼굴이었다.
그 아이가 말을 고르는 모습을 본 순간 경비실 안의 사람들이 침묵했다. 누구도 다른 사람 대신 희생을 선택할 수 없었고, 아이에게 그런 선택을 맡기는 것도 옳지 않았다. 민규는 아이의 말을 정확하게 수첩에 적었다. 그의 마음이 바라는 것은 복잡한 사고를 해결할 열쇠가 아니라, 지금 안전하게 지켜져야 할 한 사람의 요청이었다. 그는 기록할 때 가장 앞에 이름 대신 ‘안쪽에서 대화한 아이’라고 적었다. 아직 아이의 이름을 몰라도 그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어른들은 늘 한 명을 고르라고 했어요. 이번엔 아무도 안 골라 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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