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다시 밤을 맞을 준비를 하는 동안, 정민규는 운동장에 하얀 선 아홉 개를 그었다.
학생들의 운동 경기용 선이 아니었다. 정문에서 경비실까지의 실제 보행 경로를 표시한 것으로, 선마다 출입 확인 지점을 하나씩 두었다. 어제의 그림자가 나타났던 자리에 손전등 삼각대도 세웠다. 밤 두 시 십칠 분에 방문객 아홉이 온다는 예고를 받았지만 누구도 확인하지 못한 출입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조금 지나치지 않나요?” 루카가 물었다. “마법으로 방문자를 한 번에 찾아낼 수도 있는데요.”
“찾아내는 일과 안전하게 들어오게 하는 일은 달라.” 민규가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었다. “그리고 누구를 찾는지 모르는데 마법으로 사람부터 잡아당기면 위험하지.”
루카가 선을 바라봤다. “그럼 이걸 따라 걸으면 되나요?”
“실제로 길이 이어지는지만 확인해 줘. 선이 엉뚱한 곳으로 연결되면 돌아오고.”
미라는 루카와 함께 경로를 걸어 보았다. 두 사람이 식당 앞을 지날 때 분필 선 하나가 갑자기 지도에서 사라졌다. 바닥의 선은 그대로였지만 셀레나가 펼친 마법 지도에는 그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둘은 안전하게 돌아왔고, 민규는 기록에 ‘지도상 소거, 실제 통행 가능’이라고 적었다.
“왜 기록과 현실이 계속 다르죠?” 미라가 물었다.
“누군가 기록을 현실보다 먼저 바꾸고 있으니까요.” 에일라가 대답했다. “실제 사람들이 무엇을 겪는지 확인하지 않고 장부만 고치던 방식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날 오후 케스는 총국의 오래된 감사지침서 한 권을 가져왔다. 그는 복사본을 만드는 데 동의했지만 원본 표지를 뜯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지침서에는 아홉 피난동의 명칭이 적혀 있었다. 북문 학교, 강둑 제분소, 서쪽 온실, 옛 의료원, 석회 채석장, 시립 목욕장, 남쪽 등대, 폐선 터널, 산길 관측소.
“우리 동생 니아가 실종된 곳은 여덟 번째, 폐선 터널이었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열두 살이었어요. 사고 당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마지막 기록이죠.”
민규는 케스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보았다. 별 여덟 개 가운데 하나가 빠진 자리는 구멍이 아니라 일부러 비워 둔 공간처럼 정교했다. 누군가 실종자 한 명을 기억하려고 자리를 남겨 둔 것이었다.
“아홉 장소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운영됐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처음엔 각각 독립돼 있었어요. 한 곳이 망가져도 다른 곳에서 사람을 받아 주기 위한 구조였죠. 사고를 앞두고 중앙 원본 관리망이 연결됐습니다. 그 뒤로부터 한 곳의 기록 오류가 다른 곳까지 옮겨 갔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이 대피할 시설을 연결한 게 아니라, 사람의 이름을 한데 묶어 버렸군요.” 셀레나가 말했다.
에일라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접힌 설계도를 펼쳤다. 도면을 처음 본 바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홉 시설의 비상문은 물리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었다. 각각 자체 출구가 있었다. 그런데 도면 한가운데 원 하나가 그려져 있었고, 그 원에서 아홉 곳으로 얇은 선이 뻗어 있었다.
“이건 중심 시설이 아니에요.” 바르트가 말했다. “각 시설의 날짜를 맞추는 동기화 장치예요. 시간이 다르면 구조가 어려워지니까 원래는 신호만 보냈겠죠.”
“그럼 어떻게 사람까지 움직인 겁니까?”
“누가 동기화 신호에 근무 배정 정보를 실어 보냈다면 가능해요. 다만 이런 개조는 나 혼자 했을 리가 없겠지.”
종탑에서 내려온 서기관이 도면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 그는 기록망의 설계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가운데 원은 그의 기억 속에서 늘 시커멓게 가려져 있던 부분이었다. 처음 가동될 당시 누군가 ‘모든 출입을 원본 하나에 맞추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제가 그걸 사람을 하나로 맞추라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서기관이 말했다. “그때부터 같은 이름이 여러 곳에 쓰였고, 여러 사람의 근무가 한 사람의 시간으로 바뀌었어요.”
민규는 바로 죄를 묻지 않았다. 서기관은 자신의 오독을 인정했지만 누가 원문을 바꾸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책임을 확인하는 일과 처벌 대상을 서둘러 정하는 일은 달랐다. 그는 서기관에게 당시 읽은 문장을 정확하게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고 발생 시 모든 출입의 원본을 한 명의 검증자가 확인한다.]
“‘한 명’이 왜 들어갔습니까?” 에일라가 물었다. “원본 설계는 복수 담당자 확인이었는데.”
서기관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읽을 때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민규는 유리 명찰을 떠올렸다. 최초 검증자 정민규. 누군가 한 사람만 확인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고 나서 확인자로 미래의 이름을 끼워 넣었다면, 그 규칙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 학교 식당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조리 담당 베티가 만들던 파이 두 판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조리실 출입 기록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오븐 속은 비어 있었다. 루카는 자신이 파이를 태워 버린 일이 들킬까 봐 누군가 시간을 지웠다고 주장했지만, 미라는 그의 앞치마에 묻은 밀가루를 보고 바로 웃었다.
“네가 또 반죽을 건드렸지?”
“모양만 조금 바꿨어. 그게 왜!”
민규는 오븐을 열어 보았다. 아래쪽 받침대가 뒤집혀 있었고 열에 약한 나무 손잡이는 갈라져 있었다. 파이가 마법으로 사라진 게 아니라 오븐 아래 수납장에 미끄러져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바르트가 조심스럽게 받침대를 빼자 반쯤 구워진 파이 두 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마법 사건은 아니었군요.” 루카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마법 때문은 아니지.” 민규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진짜 위험을 놓칠 수 있어.”
베티는 파이를 다시 구웠지만 깨진 받침대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급한 마음에 먹겠다고 했으나, 조리실 직원이 안전하다고 확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저녁식사가 늦어지자 루카가 식탁에 앉아 배고픔을 과장했다. “전 마법학교의 역사적인 경보보다 파이 없는 저녁이 더 무섭습니다!”
사람들은 웃었지만 민규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처음에 문이 사라진 것도, 출입 번호가 바뀐 것도 분명 마법과 관련돼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고장과 마법의 오류를 구분할 수 없다면 학교의 모든 삶이 괴이한 설명 속에 갇히고 말 것이다. 자신이 경비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 두 가지를 하나씩 나누어 확인하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미라는 베티와 함께 오븐 밑바닥을 청소했다. 루카는 남은 파이를 배고픈 교사들에게 나눴고, 별은 별 모양으로 구운 과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챙겼다. 그날 저녁만큼은 모든 사람이 사라지는 시간보다 지금 먹을 음식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 뒤 별이 경비실에 찾아왔다. 그는 자기 이름을 적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어제부터 종이의 ‘별’ 자가 한 획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인지 두려워했다.
“이름이 지워지면 저도 없어져요?”
“이 종이만 지워진다면 종이를 새로 쓰면 돼.” 민규가 대답했다. “네가 없어지는지는 다른 문제야. 네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여러 사람이 보고 있잖아.”
그는 별에게 억지로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공책에 어제 먹은 수프, 아침에 본 나무, 루카와 배운 덧셈을 적으라고 했다. 종이를 오래 보존하는 방법도 필요했지만, 그 아이의 하루가 오직 이름 한 줄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었다.
“그럼 이거도 기록이에요?” 별이 공책을 펼쳤다.
“물론이지. 네가 직접 쓴 기록이니까.”
별은 무척 안심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른들의 설명을 기다렸다. 이제는 자신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자기 말로 남길 수 있었다.
케스는 지침서의 한쪽 구석에서 니아의 이름을 발견했다. 정식 명부가 아니라 물품 수령 확인란이었다. 보호 담요 세 장, 손전등 한 개, 푸른색 분필 두 개. 그날 아이에게 지급한 물품이 적혀 있었다. 물품을 전달한 사람은 ‘최초 근무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동생이 어린데 왜 이런 물품을 받았을까요?” 케스가 물었다.
“사고를 겪은 아이에게 대피 물품을 준 것일 수도 있고, 구조를 돕도록 시킨 것일 수도 있죠.” 민규가 답했다. “다만 그때 니아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케스는 물품 목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니아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선을 긋는 일을 좋아했다. 어른들이 지도를 읽지 못할 때 자신이 분필로 길을 표시하겠다고 나섰을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자랑스럽다가도 화가 났다. 왜 열두 살 아이가 그런 일을 해야 했단 말인가.
“만약 찾게 된다면,” 케스가 말했다. “나는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날 왜 혼자 남았냐고.”
“그 질문을 받으면 아이는 잘못한 것 같을 수도 있겠죠.” 민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무엇이 필요했는지, 누가 곁에 있었는지부터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케스는 한참 침묵하다 수긍했다. 자신이 잃어버린 동생을 다시 만난다면 답을 재촉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동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동생이 기억하는 세월과 자신이 기다린 세월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손수건을 펼쳐 니아가 수놓은 별을 셌다. 여덟 개가 있었다. 니아에게 남겨진 아홉 번째 자리가 정말 어디인지 확인하는 일이 그날 밤의 목표가 되었다.
마지막 안전 회의에서 바르트는 종탑의 비상전원 상태를 보고했다. 전압은 정상 범위였지만 기록망이 시간을 거꾸로 계산할 때마다 경고등이 한 번씩 꺼진다고 했다. 학생들이 자는 기숙사와 경비실의 조명을 별도로 연결해 두었기 때문에 당장은 위험하지 않았다.
“아홉 시설이 연결돼 있다는 말 때문에 당장 거대한 마법 방어막을 만들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루카가 말했다.
“사람이 쉬는 방이 먼저야.” 민규가 대답했다. “방어막을 만들다가 기숙사 불이 꺼지면 아이들이 놀라잖아.”
미라는 교사의 안내를 받아 밤중에 학생들이 무서워할 때 사용할 짧은 신호를 정했다. 문을 세 번 두드리면 교사가 응답하고, 대피가 필요할 경우에는 종 대신 각 층에서 말로 알려 주기로 했다. 종소리가 이미 여러 날짜를 오가며 오류를 일으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는 처음에 신호를 더 복잡하게 만들자고 했다가 미라가 고개를 저으니 바로 생각을 바꿨다. “헷갈리면 안 되겠구나.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하니까.”
민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어도 따라 할 수 있는 안전 절차는 우스워 보이지만 실제 사고에서 사람을 살릴 수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경로를 확인하고 교사가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는 오늘 밤의 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판단했다.
밤 한 시 반, 셀레나는 방호 마법의 최소 범위를 설정했다. 전 학교를 덮는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정문, 기숙사, 의료실 등 사람이 실제로 있는 곳부터 보호하기로 했다. 그녀는 민규에게 마법 선이 닿는 경계점을 알려 주었고, 민규는 도면 위에 발광등 위치를 표시했다.
“왜 전부 막지 않으세요?” 루카가 물었다.
“안에 있는 사람도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하거든.” 셀레나가 답했다. “지키는 마법이 출구를 가로막으면 아무 소용 없잖아.”
밤 두 시 십 분이 되자 정문 앞에 첫 불빛이 나타났다. 누군가 손전등을 든 것 같았지만 빛은 반대 방향으로 흔들렸다. 두 시 십이 분에는 운동장의 분필 선 아홉 개 중 하나가 금빛으로 변했다. 두 시 십오 분, 경비실 전화가 혼자 울리기 시작했다.
민규는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이의 숨소리였다. 이어 작은 여자아이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저씨, 여덟 번째 문은 열지 마세요. 거기에 오빠가 와요.”
케스가 숨을 멈췄다. 그의 손에 쥔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니아?”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짜 하나를 말했다. 삼십 년 전 사고 당일도, 내일도 아닌 오늘의 날짜였다.
“그날부터 우리가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날 밤 경비실 창문에는 학교 곳곳의 작은 신호등이 줄지어 비쳤다. 기숙사 담당 교사가 첫 번째 확인 신호를 보냈고, 의료실의 나디아도 환자들이 안전하다고 알려 왔다. 바르트는 급수실에서 회로 이상이 없음을 보고했다. 민규는 하나씩 답장을 적으며 각자 자신이 지켜야 할 공간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멀리 식당에서는 베티가 남은 파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보통 이 시간에 불을 끄고 잠들었지만 오늘은 구조 인원이 생길 수도 있다며 작은 수프 냄비를 데워 두었다. 실제로 누가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서로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밖의 운동장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가로등 아래 분필 선은 마르고 있었고, 바람에 구겨진 종이 한 장이 굴러갔다. 두 시 십칠 분까지 남은 짧은 시간 동안 민규는 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아이는 겨우 잠이 들었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위험 때문에 깨울 필요가 없었다.
케스는 경비실 앞에서 자신의 우산을 고쳐 잡았다. “어쩌면 우리가 만날 사람은 적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적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친구라고 믿을 필요도 없죠.” 민규가 대답했다. “우선 방문 목적부터 들어 봅시다.”
두 시 십칠 분, 정문 앞에 방문객 아홉이 도착했다. 그러나 민규의 눈에 보이는 건 단 한 사람이었다. 유리 명찰을 단 키 큰 경비원이었다. 나머지 여덟 사람은 그의 발밑 그림자로 겹쳐 있었다.
경비원은 출입대장을 훑고 말했다.
“검증자 정민규 씨. 오늘 밤만 당신의 출근을 취소해 주겠습니다.”
“대신 뭘 요구하시죠?”
“당신이 비운 하루를 나머지 여덟 곳에서 나눠 갖겠습니다.”
민규는 펜을 내려놓았다. 누구의 하루가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거래를 승인할 수는 없었다.
“거절합니다.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근무표부터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대답하자 방문객의 그림자 중 가장 작은 하나가 들썩였다. 신발 자국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발자국이었다. 그 발자국은 여덟 번째 분필 선을 따라 학교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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