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의 그림자는 경비실 문턱 앞에서 멈췄다. 사람의 모습은 여전히 없었다. 바람에 모래가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발뒤꿈치 두 개의 형태로 모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방문객이 보이지 않는 구두를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는 듯했다.
정민규는 출입대장을 탁자 위에 두었다. “이름, 방문 목적, 연락 가능한 곳을 적어 주십시오. 작성이 어렵다면 말로 알려 주셔도 됩니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방문자란에 검은 잉크가 번지며 문장이 나타났다.
[소속: 원본 유지과. 직위: 전임 야간 근무자. 이름: 현장 검증자와 일치.]
“그건 이름이 아닙니다.”
[성명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동일한 사람이 이미 근무 중이다.]
“그럼 저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할 질문 하나 하죠. 제가 어제 저녁에 뭘 먹었습니까?”
잉크가 잠시 흔들렸다. 정민규는 저녁에 거의 먹지 못했다. 어머니가 건네준 수프를 반쯤 남긴 이유는 바빠서가 아니라 수프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가족뿐이었다.
[기록 보존 범위 밖의 질문이다.]
“같은 사람이라면서요.” 민규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모르시면 다른 사람입니다. 당분간 방문객으로 취급하겠습니다.”
그림자의 끝에서 짧은 금속성 웃음이 났다. 누군가 종이 클립을 여러 개 바닥에 쏟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셀레나가 경비실로 들어왔다. 바르트는 뒤쪽 비상문을 확인했고, 에일라는 창가에 서서 그림자가 드리우는 각도를 측정했다.
“빛이 방향을 바꿔도 저 그림자는 그대로예요.” 에일라가 말했다. “실제 방문객이 아니라 출입 기록이 투영된 겁니다.”
민규는 문틈에 작은 나무 막대를 놓았다. 그림자가 밀려들어도 막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출입대장 표지에는 새 글씨가 새겨졌다.
[방문 거부 시 정문 통제권 압류.]
셀레나가 즉시 마력을 펼치려 하자 민규가 손을 들었다. “잠깐. 정말 통제권이 넘어갔는지부터 봅시다.”
그들은 바르트의 동의를 받아 정문의 수동 열쇠와 비상 해제 장치를 점검했다. 잠금쇠는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마법식 봉인도 건드려지지 않았다. 다만 경비실 컴퓨터와 연결된 출입 기록 장부에서 몇 개의 칸이 흰색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권한을 빼앗는 게 아니라,” 바르트가 말했다. “빼앗았다고 표시하는군.”
민규는 즉시 장부 연결선을 뽑지 않았다. 비상사태에서 출입 상태를 확인하지 못하면 학생들이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종이 출입대장과 교사 연락망을 따로 보관한 뒤, 마법식 통신선 하나만 우회했다. 그러자 컴퓨터 화면의 흰색 칸이 멈췄다.
[독립 확인 체계 감지. 권한 압류 지연.]
그림자의 발끝이 문턱에서 한 뼘 물러났다. 민규는 그 반응을 꼼꼼히 적었다. 사기꾼이 계약서를 내밀면서 계약이 끝난 척하는 것처럼, 이 방문객도 서명 이전에 압류가 완료된 척하고 있었다.
케스 감사관이 경비실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하늘 끝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그의 검은 우산에는 밤새 마르지 않은 빗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출입대장에 나타난 문장을 보자 표정이 달라졌다.
“원본 유지과의 전임 근무자라니. 그런 직위는 총국의 현행 규정에 없습니다.”
“옛 규정에는 있었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케스는 입을 다물었다. 곧 자신의 우산에서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오래된 직제표였다. 원본 유지과는 재난을 대비해 보존 원본을 관리하는 조직이지만, 설립 초기에는 사고 전날과 사고 당일 사이를 검증하는 특수직을 두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이름 대신 ‘최초 근무자’라는 호칭이 붙었다.
“시간을 거슬러 간다는 뜻입니까?” 셀레나가 물었다.
“아니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비 계획을 시험하는 일이었죠. 하지만 실험 과정에 실제 시간을 접는 마법이 도입됐습니다. 그 뒤 기록이 사라졌어요.”
케스가 마지막 줄을 짚었다. [검증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절차로 제한한다.] 그 줄 아래에는 날카로운 칼로 긁어 낸 흔적이 있었다. 긁힌 자리의 모양은 유리 명찰을 맞출 수 있는 크기였다.
민규는 케스에게 물었다. “총국에서 누가 보냈습니까?”
“정식 명령은 아직 없습니다. 원본 유지과는 다른 부서의 기록을 빌리지 않고 움직일 수 있어요.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그럼 여기서 확인한 건 총국이 이미 저를 해고했다는 게 아니라, 과거의 기록이 경비실 장부에 접근했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케스는 분명히 말했다. “저 사람이 정말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림자가 반응했다. 갑자기 방 안의 시계들이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듯 바늘을 움직였다. 시계마다 분침이 한 칸 뒤로 갔다. 복도에서 걸어오던 루카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침 수업에 쓸 지도를 들고 있었다.
“교수님, 문을 두 번 지나왔어요.”
“어떤 문?” 셀레나가 물었다.
“경비실 앞 복도요. 한 번 지나온 다음 또 같은 문이 나왔어요. 미라 누나가 뒤에서 불러 줘서 들어왔어요.”
민규는 즉시 복도를 확인했다. 문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출입 기록의 번호가 하나씩 밀려 있었다. 1번 문이 0번으로 표시되자 그곳을 지나간 사람의 동선에도 오류가 생겼다. 출입 장부를 마법학교의 공간 기준으로 쓰는 오래된 설비 때문이었다.
“물리적인 벽은 멀쩡합니다.” 바르트가 바닥의 경첩을 살폈다. “문이 어디로 이어져야 하는지 명령하는 이름표가 잘못됐어요.”
“그럼 번호를 종이로 다시 붙이죠.” 민규가 말했다. “사람이 실제로 걸어 본 방향도 함께 적고요.”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 교사와 시설 담당자들은 주요 복도에 임시 번호판을 붙였다. 문 위에 마법으로 반짝이는 숫자가 있더라도 그 숫자만 믿지 말라는 안내도 걸었다. 루카는 미라와 함께 1층에서 식당까지 안전 경로를 두 번 걸었다. 괜찮다고 하던 학생도 같은 문을 두 번 만나자 무서워했다. 그래서 민규는 안내 담당자에게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보다 “지금 함께 걸어가자”고 하라고 했다.
복도 점검이 끝났을 때 1학년 학생 하나가 셀레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우리 반 문에 왜 종이 표지판을 붙여요? 저희는 어제까지 여기가 교실인 걸 알고 있었는데요.”
셀레나는 학생이 들고 있던 교과서를 보았다. ‘공간 마법 기초’라는 제목이었다. 막 어제 수업에서 길 찾기 주문을 배운 아이가 오늘 자기 교실 번호를 종이로 다시 쓰는 일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화내지 않고 설명했다. 주문으로 확인한 교실과 실제 출입을 확인한 교실이 충돌하고 있으니 두 기록을 나란히 비교 중이라고.
학생은 여전히 입을 삐죽였다. “그럼 우리가 배운 주문은 틀렸어요?”
“아니. 너희가 배운 주문은 정상적인 학교에서 잘 작동해. 지금은 학교에 고장이 생겼고, 고장이 난 도구를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한 공부야.”
“마법이 안 되면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다른 방법을 배워 볼래?”
셀레나는 학생을 데리고 복도 끝까지 걸었다. 먼저 벽돌의 색을 확인하고, 그다음 창문으로 보이는 종탑의 위치를 살폈다. 바닥의 마모된 돌을 손으로 만져 보니 오래된 수레 바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지도 속 숫자가 아니라 실제 사물 세 가지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학생은 친구 둘을 불러 함께 연습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정민규가 길을 안내했다는 사실은 처음에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곧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새로운 길 찾기 놀이를 시작했다. 어떤 학생은 식당 빵 굽는 냄새를 기준으로 삼겠다고 했고, 다른 학생은 그러다 빵이 다 떨어지면 길을 잃는다며 놀렸다. 셀레나는 웃음을 참느라 기침을 했다.
민규는 그 광경을 뒤에서 보았다. 출입 오류는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배우는 모든 시간을 공포로 채울 필요는 없었다. 아이들이 다른 길 찾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교사는 그날 가장 실용적인 마법 수업을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별이 경비실을 찾아왔다. 그의 공책에는 전날 적지 못했던 사람 그림이 하나 있었다. 색연필로 그린 검은 구두, 회색 옷자락, 우산을 펴지 않은 손. 별은 그 그림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어릴 때 봤던 첫 번째 경비원이 이렇게 생겼어요.”
민규는 그림을 오래 들여다봤다. 얼굴은 없었다. 대신 그림 속 남자의 가슴에 유리 명찰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소매에는 검은색 천 조각이 하나 꿰매져 있었다.
“왜 얼굴이 없니?”
“못 본 게 아니에요.” 별이 말했다. “얼굴을 본 날마다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어제는 교장 선생님 같았고, 어떤 날은 어머니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얼굴을 그리지 않았어요.”
케스가 그림의 오른쪽 소매를 가리켰다. “이 표시를 어디서 봤니?”
“그 사람이 복도에서 저한테 손을 내밀 때요.”
케스는 검은 우산을 아주 천천히 접었다. 우산 안쪽에도 똑같은 천 조각이 꿰매져 있었다. 그는 아무 설명 없이 봉합선을 뜯지 않았다. 대신 별에게 그림을 돌려주고, 오래된 사진을 보여 줘도 괜찮은지 물었다.
별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스는 낡은 단체 사진을 펼쳤다. 사진에는 젊은 교사와 기술자들이 피난 시설 앞에 서 있었다. 사진 가장자리의 남자는 구두와 소매가 그림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물이 번진 듯 하얀 얼룩이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군가요?” 민규가 물었다.
“총국의 최초 검증관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적힌 이름은 삼십 년 전 사고 이후 바뀌었습니다.”
케스는 사진 뒷면을 보였다. 이름이 있던 자리에 수정 테이프를 두 번 붙인 흔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도착한 경비원이 마지막으로 떠난다.]
“끔찍한 규칙이네요.” 셀레나가 말했다.
“규칙처럼 보이죠.” 민규는 대답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써 놓았다고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사진을 복사하도록 에일라에게 맡겼다. 원본은 케스에게 돌려주었다. 사건의 중요한 자료를 함부로 빼앗으면 총국이 학교를 공격할 명분을 줄 수 있었다. 서로 같은 기록을 보유하고 비교할 수 있게 하는 편이 안전했다.
사진을 가져간 케스는 잠시 운동장 벤치에 앉았다. 그는 사진 속 최초 검증관의 얼굴이 지워진 부분을 손수건으로 닦으려다가 멈췄다. 오래된 인화지는 물에 닿으면 더 쉽게 손상될 수 있었다. 그의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동생은 그림을 참 좋아했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갔다 와서는 누가 뭘 입었는지 빠짐없이 그렸죠. 나는 그게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놀렸어요. 시험 점수에 도움이 안 된다고.”
민규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았다. 케스는 다시 사진을 펼쳤다. “지금 내게 남은 니아의 기록 중 가장 믿을 만한 건 그림이에요. 총국의 장부는 날짜가 계속 바뀌는데, 니아가 그린 손수건의 별 개수는 변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동생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당장 어디든 뛰어가고 싶어요. 근데 그렇게 하면 누가 다칠 수도 있다는 걸 이제 알아요. 이해는 해도 기다리는 건 여전히 어렵군요.”
“기다리기만 하진 않을 겁니다.” 민규가 말했다. “오늘 밤 누가 오는지 확인한 뒤,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곳부터 찾아보죠.”
케스는 그 대답을 듣고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원한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행동과 아직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구분할 수 있는 동료였다.
바르트가 운동장 건너편에서 소리쳤다. “이쪽 분필 자국은 저절로 지워지는 것 같은데!” 민규와 케스는 동시에 일어났다. 오래된 사건을 쫓는 사람에게도 당장 확인해야 할 오늘의 발자국이 있었다.
해가 완전히 뜬 뒤 운동장의 그림자는 가늘어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경비실 문 아래에 작은 구두 모양의 종이가 남았다. 민규는 집게로 집어 투명한 봉투에 넣었다. 종이 안쪽에는 방문 제한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일정이 찍혀 있었다.
[예비 점검 종료. 실제 방문 예정: 오늘 밤 02시 17분. 방문자 수: 아홉.]
“아홉 명?” 루카가 물었다.
케스의 시선이 여덟 번째 별이 빠진 손수건으로 향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홉 개의 피난동이 있었습니다. 학교는 그중 하나일 뿐이에요.”
민규는 운동장과 멀리 보이는 마을 길을 함께 바라봤다. 학교 한 곳의 출입대장 문제라고 생각했던 일이 다른 여덟 곳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경비 수첩의 첫 장에 크게 썼다.
[확인할 것: 아홉 명이 누구인지. 아홉 시설에 있는 사람부터 안전 확인.]
밤에 올 사람이 적인지 동료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는 먼저 출입 절차를 준비했다. 출입 확인 없이 누구도 대신 근무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실제로 문 앞에 서지 않았는데 기록만으로 도착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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