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탑의 유리 명찰은 불빛을 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본 유지과 현장 접속. 다음 출근자가 도착합니다.]
정민규는 명찰이 들어 있던 철제 상자에서 손을 뗐다. 종탑 창밖은 밤이었다. 학교 아래로 이어진 마을 골목에는 빵집의 마지막 등이 켜져 있었다. 삼십 년 전 멈춘 시계를 겨우 움직여 놓았는데, 누군가는 다시 야간 근무를 시작하겠다는 통보를 보내고 있었다.
“출근자 이름은 안 적혀 있네요.” 그가 말했다.
에일라가 주머니에서 확대경을 꺼냈다. 그녀는 유리 명찰을 들지 않고 상자 바닥에 새겨진 홈부터 살폈다. 홈은 세 개였지만 자국은 네 개였다. 금속 명찰 두 장 사이에 얇은 물체를 끼운 흔적이 있었다. 마치 원래는 장부 한 장이 있어야 했던 자리 같았다.
“이 상자는 기록을 보관하는 물건이 아니에요.” 에일라가 말했다. “기록을 옮기는 물건이에요. 여기 놓인 명찰에 적힌 직위를 다음 사람에게 넘기도록 만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민규가 손전등을 낮췄다. “상대가 접속했어도 교대가 성립한 건 아니죠.”
셀레나는 명찰과 바닥 사이에 가느다란 은색 선을 그렸다. 선이 한 번 떨리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력 흐름이 밖에서 들어오는 게 아니에요. 이건 안쪽에 남아 있는 장치가 누군가의 접속을 기다리는 상태예요. 접속 표시만으로 학교를 통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는 순간 소년 별이 한 걸음 물러섰다. 구겨진 종이별이 소년의 손에서 작은 파도처럼 흔들렸다.
“저 문장 알아요.”
“어디서 봤니?” 민규가 물었다.
“제가 쉬면 안 된다고 했을 때요. 누가 대신 온다고 적혀 있었어요. 저는 그 사람이 오면 바깥으로 나가는 줄 알았는데, 다음 날이 되어도 아무도 안 왔어요.”
별은 마치 혼날 일을 고백한 아이처럼 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제가 다시 근무표에 사인했어요. 사인할 줄도 몰랐는데, 제 손을 누가 잡고 글씨를 썼어요.”
민규는 바로 명찰을 닫으려던 생각을 멈췄다. 아이가 했다는 서명은 동의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으로 그려진 이름을 가져다가 다른 사람의 의사처럼 쓴 것이다. 그는 경비 수첩을 꺼내 별이 말한 문장을 그대로 적었다. 기억이 불확실한 부분에는 ‘추가 확인 필요’라고 표시했다.
“지금은 네가 근무자가 아니야.” 민규가 말했다. “그 명찰을 손대지 않아도 돼.”
별은 수첩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내려가서 자도 돼요?”
“그게 오늘 밤 가장 중요한 일정이야.”
루카가 별의 어깨에 겉옷을 둘러 주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웃는지부터 살피다가, 아무도 웃지 않자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미라가 기다리는 대기실까지는 복도 세 개를 지나야 했다. 둘이 내려갈 때까지 민규는 손전등을 켜 두었다.
종탑의 나무 난간에는 날씨 때문에 갈라진 금이 길게 나 있었다. 바르트가 지난주에 교체하겠다고 했던 부분이었다. 민규는 난간을 흔들어 보았다. 조금 흔들렸고, 그 옆에 누군가 오래전에 철사로 묶어 둔 흔적이 보였다. 그는 수첩에 ‘종탑 3층 동측 난간 보강 필요’라고 적었다. 거대한 마법 장치의 비밀을 추적하는 중에도, 손을 대면 무너질 것 같은 난간은 그대로 위험한 물건이었다.
에일라는 그런 민규를 보고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전설적인 최초 경비원의 명찰이 나타났는데 난간부터 고치겠다고 적으세요?”
“이쪽으로 누가 넘어지면 그건 전설이 아니라 사고니까요. 누군가 아침에 이곳에 올 수 있잖아요.”
에일라는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점검 항목에는 방금 생긴 괴현상뿐 아니라 수돗물 냄새, 식당의 창문 걸쇠, 종탑 아래의 계단 조명까지 적혀 있었다. 도대체 하루에 몇 가지를 확인하는 거냐고 묻자 민규는 꼭 필요한 것만 적는다고 했다. 에일라는 그의 수첩이 이미 두꺼운 책 한 권만큼 부풀었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셀레나는 대신 조그마한 나무 패를 가져왔다. 그녀가 학생들에게 마법으로 만든 표식을 붙이지 말라고 가르칠 때 쓰는 교구였다. 패 앞면에는 ‘통과 가능’, 뒷면에는 ‘확인 필요’라고 적혀 있었다. 민규는 패를 난간에 매달았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글씨를 남기자 그제야 오래된 종탑이 새삼 살아 있는 학교 건물처럼 느껴졌다.
아래층에서 종이별 하나가 계단을 올라왔다. 별은 이미 내려가던 중이었지만 민규가 난간을 점검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아저씨, 제 공책에 그린 종탑은 난간이 멀쩡해요. 그럼 제가 잘못 그린 거예요?”
“아니. 그림은 네가 본 걸 그린 거야. 지금 상태와 다를 수는 있지.”
“그럼 고친 다음에 다시 그려도 돼요?”
“물론이지. 그땐 난간이 반듯하게 그려지겠네.”
별은 자기 그림을 수정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른들이 오래된 기록을 고치려 싸우는 동안, 이 아이는 새 그림을 한 장 더 그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규는 그 차이를 오래 기억해 두고 싶었다.
종탑에 남은 사람은 민규와 셀레나, 에일라였다. 에일라가 상자 측면을 한 번 눌렀다. 감춰져 있던 종이띠가 서서히 흘러나왔다. 표면에는 그날 밤의 날짜가 아니라 삼십 년 전 사고 전날의 날짜가 찍혀 있었다. 그 아래 작은 문구가 있었다.
[검증자 본인 부재 시 가장 가까운 생체 기록을 대체 사용한다.]
“가장 가까운 생체 기록?” 셀레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별이와 어릴 때 제 기록이 같다고 본 거겠죠.” 민규가 대답했다. “원본 대신 아무 아이나 앉혀도 되는 체계였다는 소립니다.”
“그건 원본 규칙이 아니었어요.” 에일라가 말했다. “피난동을 만들 당시 설계의 첫 조항은 대체 인원 강제 배정 금지였어요.”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잘못은 단순한 오타가 아니었다. 누군가 분명한 금지 조항 위에 새로운 명령을 덧씌웠다. 서기관이 그 문장을 원래 규칙으로 오독하면서 수십 년의 강제 근무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서기관 이전에 누가 조항을 바꾸었는지는 비어 있었다.
에일라가 상자 밑면을 거울 쪽으로 비췄다. 유리 명찰의 뒷면에 작은 음각 글씨가 나타났다.
[최초 사고 설계 검증자 정민규. 검증 완료: 사고 발생 하루 전. 검증 방법: 현장 소거 시험.]
“소거 시험이라니.” 셀레나가 숨을 내쉬었다. “그건 출입구를 폐쇄하고 사람의 기록을 일시적으로 지워 보는 위험한 시험이에요. 실제 사람이 있는 시설에선 금지된 방식입니다.”
민규는 어린 시절 사고가 난 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니가 늦는다고 했고 그는 경비실 의자에서 잠들었다. 누군가 유리창 밖에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경비복을 입었고, 시계가 고장 나면 날짜를 확인하라고 말했던가. 그러나 기억은 비 오는 창문처럼 군데군데 흐렸다.
“제가 열 살 때 설계를 검증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습니다.” 민규는 종이띠를 다시 살폈다. “누가 제 이름을 쓴 건지, 아니면 제가 아닌 다른 정민규가 있었는지 확인해야겠죠.”
에일라가 동의했다. “그리고 기록 자체가 어떤 절차로 만들어졌는지도요. 이 명찰을 부수면 근거가 사라집니다.”
그때 종탑 문 아래로 얇은 그림자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종이를 접은 모양이었는데, 바닥의 먼지를 밀어내며 멈췄다. 그림자는 곧 검은 봉투로 변했다. 겉면에는 학교의 국화 문양 대신 아홉 개의 꽃잎이 겹쳐 있었다.
[원본 유지과 현장 감사 예고. 모든 경비 권한을 임시 동결한다. 현장 관리자 응답 제한 시간: 삼십 분.]
민규는 시계를 봤다. 시침과 분침은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봉투 옆에 붙은 작은 유리 모래시계는 아래가 아니라 위쪽으로 모래를 흘리고 있었다.
“봉투부터 만지지 마세요.” 그는 말했다. “남이 가져온 제한 시간을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응답하지 않으면?” 셀레나가 물었다.
“그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봐야죠. 지금 겁나서 사인하면 사고가 또 납니다.”
그는 우선 종탑 문을 열어 복도 상태를 확인했다. 아래층에서 카트 바퀴 소리가 났다. 바르트가 복구한 급수관을 점검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자고 있었고, 학교는 평화로웠다. 원본 유지과가 보내 온 명령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직 삶을 바꾸지 못했다.
민규는 셀레나에게 학생 대피를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기숙사 담당 교사의 야간 연락망을 확인하고, 에일라에게 봉투와 명찰의 모습을 여러 방법으로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위험 징후가 확인되면 대피할 수 있게 준비하되, 근거 없이 학생들을 또 밤거리로 내몰 필요는 없었다.
종탑에서 내려오자 경비실의 전등이 켜져 있었다. 정은희가 의자에 앉아 오래된 주전자를 닦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고 했다. 민규는 새로 발견한 명찰의 문구를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은희는 손끝으로 ‘검증자’라는 단어를 짚었다.
“이 이름은 네가 어린 시절 쓰던 글씨가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명찰 글씨를 보고 아세요?”
“아니. 글씨보다 이 구멍을 봐. 명찰을 달았던 자리야.”
은희는 녹슨 끝부분을 들어 올리지 않고 가리켰다. 아이에게 맞는 옷에 달았다면 바늘 자국이 작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 명찰 가장자리의 홈은 어른이 입는 두꺼운 방한 경비복의 잠금쇠와 같은 간격으로 뚫려 있었다.
“그날 밤 유리 명찰을 단 어른을 봤어.” 은희가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은 네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어. 하지만 네 이름을 알고 있었지.”
민규는 컵을 들다 멈췄다. 어머니는 그때 제대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누군가 피난동의 문을 열어 달라며 급하게 찾아왔고, 문 뒤에서는 울음소리가 났다. 그 남자는 자신이 처음 근무한 사람이니 문을 열 책임이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문을 열려면 다른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희는 그 조건을 거절했다.
“엄마가 남겠다고 한 거예요?”
“그 사람 대신 남은 건 아니야.” 은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이 빠져나올 때까지 문을 확인하려 했지. 그런데 문이 닫혔고, 누군가 내 근무 종료 시간을 지워 버렸어.”
민규는 어머니의 손등에 남은 작은 흉터를 바라봤다. 그녀가 거절한 건 안전을 지키는 일이 아니었다. 안전을 핑계로 누군가를 영원히 가두는 조건이었다.
경비실 벽에는 오래된 출입표가 두 장 걸려 있었다. 은희는 그중 누렇게 바랜 종이를 조심스럽게 떼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맨 위에는 ‘현장 근무 수칙’이라는 글씨가 있었고, 아래에는 열 살짜리 아이가 연필로 그린 미완성 별이 있었다. 민규의 어린 시절 그림이었다.
“그날 네가 이걸 그렸어. 밤이 되면 경비실이 너무 커 보여서 무섭다고 했지.” 은희가 말했다. “내가 종이에 별을 하나 그려 주면 밤이 조금 짧아진다고 했더니, 넌 별을 여덟 개 더 그렸어. 별이 아홉 개면 밤을 아홉 조각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고.”
민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계산을 제가 했다고요?”
“조금 틀린 계산이었지만 그때는 그게 너한테 중요했어.”
은희는 종이를 뒤집었다. 연필 자국 아래에 다른 손이 적은 작은 문장이 있었다. [불안할 때는 시간을 나누어 세지 말고 숨을 쉬어라.] 그 글씨는 은희 것이 아니었다. 민규는 자신을 이름만 알고 있던 방문객이 쓴 문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아이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훗날 강제 근무를 만들었다는 혐의는 따로 확인해야 했다.
은희는 종이를 다시 벽에 걸지 않았다. 별이가 보면 자신의 그림과 비교할 수 있게 깨끗한 봉투에 넣었다. 민규는 어린 시절의 그림이 오늘의 사건에서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거대한 규칙은 수십 년의 세월을 덮쳤지만, 아이가 심심해서 그린 별 아홉 개는 아직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경비실 전화가 울렸다. 마법학교에서 오래 쓰던 황동 전화였다. 민규가 수화기를 들자 잡음 사이로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후임에게 알립니다. 인수인계는 반드시 정시에 해야 합니다.”
“성함부터 말씀해 주시죠.” 민규가 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수화기 반대편에서 낡은 신발 밑창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그 이름을 달고 있잖습니까.”
“그래도 신원 확인은 별개입니다.”
상대는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민규가 창밖을 보자 경비실 앞 운동장에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다. 가로등 빛이 바로 그 위를 비추는데도, 그림자에는 사람의 몸이 없었다.
“명찰은 빌려 줄 수 있겠죠.” 상대가 말했다. “그러나 첫 출근일은 누구에게도 빌려 줄 수 없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경비실 시계는 정확히 두 시 십팔 분을 가리켰다. 삼십 분의 응답 제한 시간은 열아홉 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운동장의 그림자는 이미 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민규는 경비실 문을 잠그지 않았다. 대신 방문객 출입대장을 펼치고 볼펜 뚜껑을 열었다.
“아무리 오래 근무했어도,” 그가 말했다. “방문 기록은 남기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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