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학교에는 학교 규정이 열두 권 있었다. 그중 가장 두꺼운 제4권은 지각과 출입 관리에 관한 책이었다. 정민규는 그 책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망토는 허용되지만 바닥에서 삼 센티미터 이상 떠다니는 신발은 복도 통행량에 포함하지 않는다니, 사람이 이런 규정을 어떻게 외우는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규정은 한 줄뿐이었다. 사람의 이름을 적지 않고 학교 운동장에서 쉬게 할 수 있는가.
“그건 규정에 없는데요.” 루카가 말했다.
“그럼 없는 대로 쉬면 되지.”
민규가 고무공을 발로 차자 공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지 못하고 축축한 잔디에 툭 떨어졌다. 경비원으로 일하며 운동이라고는 계단 오르내리기와 순찰이 전부였던 탓이다. 소년은 공을 주워 민규에게 다시 찼다. 생각보다 정확한 패스였다.
루카가 뻐기며 마법으로 공을 띄우려 했다가 민규에게 들켰다.
“운동장 임시 규칙. 공은 발로 차기.”
“마법학교에서 마법 쓰지 말라니 너무하잖아요!”
“너 방금 축구 시합에서도 빗자루 타려고 했잖아.”
서로 웃는 동안 소년은 골대 근처에 가지 않았다. 앞선 며칠 동안 그는 다른 사람이 하지 말라는 말을 잘 지켰지만, 자신이 해도 되는 일을 결정하는 데는 오래 걸렸다. 민규는 공을 멈추고 물었다.
“왜 저쪽으로는 안 가?”
“거기 줄이 그어져 있어요.”
“안전줄이지, 너한테 그어 놓은 선이 아니야.”
소년은 줄을 바라보았다. 땅에는 노란 밧줄이 놓여 있었고 그 건너편에는 공사 인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선이 자기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구역을 표시한다는 설명을 두 번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후, 셀레나는 소년에게 간단한 시험을 제안했다. 시험이라는 말을 듣고 소년의 손이 잠깐 굳었다. 셀레나가 잽싸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성적이 아니에요. 너한테 불편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거죠.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고요.”
교수는 둥근 수정 세 개를 책상에 놓았다. 첫 번째는 이름을 말하면 반짝이는 출석 수정, 두 번째는 과거의 장면을 비추는 기억 수정, 세 번째는 손을 대면 현재의 체온을 읽는 치료 수정이었다.
소년은 첫 번째를 피했다. 두 번째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세 번째를 가리켰다. “이건 만져도 제가 없어지지 않죠?”
나디아가 먼저 손을 올렸다. 수정은 노란빛을 냈다. 셀레나가 눈앞에서 여러 번 시범을 보이고 난 뒤에야 소년은 손을 올렸다. 수정은 오래 침묵하다가 파랗게 빛났다. 기록망이 그를 ‘과거 인원’이라 부르던 때와 달리, 그의 손끝에는 현재의 체온이 있었다.
“열이 좀 낮군요.” 나디아가 말했다. “그래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수치예요.”
소년은 그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시험이 끝났을 때 그가 받은 것은 학점이 아니라 두툼한 양말 한 켤레였다.
운동장 한쪽에서는 아이들끼리 공놀이가 이어졌다. 루카는 소년에게 상대 팀 골대까지 공을 몰고 가는 법을 알려 주었지만, 설명의 절반은 손짓이었다. 소년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발치에 공이 오면 먼저 주변을 둘러보고 누가 자신을 지켜보는지 확인했다.
“공을 차려면 허락 받아야 해요?”
“지금은 네 차례잖아.” 루카가 대답했다.
처음 패스는 골대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학생들이 킥킥 웃었지만 누군가 소년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공은 한 바퀴 굴러 기숙사 앞 장미 덤불에 걸렸다. 소년은 사과하려다 말고 직접 공을 가지러 갔다.
그때 같은 나이 또래의 여학생 아린이 말을 걸었다. “나도 처음엔 공을 못 찼어. 근데 여긴 잘 차는 애보다 골대 무너뜨리지 않는 애가 더 인기 있어.”
“왜?”
“작년에 루카가 골대를 세 번 무너뜨렸거든.”
멀리서 루카가 억울하다고 소리쳤다. “두 번이었거든!”
“세 번째는 교장 선생님이 몰래 고쳐서 기록에 안 남았지.”
아린이 눈을 찡긋하자 소년도 웃었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두어 가지 말했다. 치즈를 싫어하고 소리가 나는 풍선을 무서워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조금 망설이다 자기 이야기를 했다.
“저는 파란 커튼이 싫어요. 그리고 뜨거운 빵을 좋아해요.”
“그럼 빵집에 같이 가면 되겠다.”
그 약속에는 출입 명부도, 마법적 검증도 없었다. 그러나 어린 사람들은 때때로 그런 약속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오후 간식 시간, 아린은 소년에게 작고 얇은 공책을 선물했다. 표지에 아무 이름도 쓰여 있지 않은 연습장이었다.
“여기에는 네가 좋아하는 걸 적으면 돼. 난 화요일마다 재미있었던 일을 적어.”
“글씨를 잘 못 쓰면요?”
“그림 그려.”
소년은 첫 장에 감자빵을 그렸다. 빵인지 돌멩이인지 알아보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다음 장에는 운동화 한 켤레를 그렸다. 세 번째 장에는 병실에서 창문을 열고 있는 정은희를 그렸다. 얼굴을 완성하지 못해도 그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침대 옆에 작은 컵을 그려 넣고 나서 공책을 덮었다.
저녁에 민규가 공책을 보고 뭐냐고 묻자 소년은 한참 망설였다.
“제 일기예요.”
“보여 주고 싶지 않으면 안 보여 줘도 돼.”
소년의 눈이 커졌다. 기록망에서는 하루가 끝날 때마다 일지가 자동으로 제출됐다.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종이가 있다는 사실은 낯설었다.
“그럼 여긴 문을 닫아도 돼요?”
“응. 다만 위험할 때는 어른에게 말해야 하고, 누군가 너를 다치게 하려 하면 도와 달라고 해야 해. 그 밖에는 네 물건이니까.”
소년은 공책을 가슴에 품었다. 밖에서 들리는 종소리가 일기장을 열라는 명령으로 느껴지지 않는 날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날 그는 종이 한 권을 자신의 것으로 가졌다.
민규는 아린의 어머니에게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확인했다. ‘아무 때나 마을로 나가라’는 말보다 일정한 약속이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린의 어머니는 빵집 앞에서 아이들을 만나기로 했다. 민규는 그 약속을 소년에게 알려 주고, 혹시 마음이 바뀌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약속을 안 지켜도 벌받지 않아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걱정하겠지. 하지만 사정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어. 너한테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소년은 공책 맨 뒤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그 동그라미가 무엇인지 민규는 묻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아린이 붙여 준 ‘약속 표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약속한 날이 오면 스스로 동그라미를 채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 사이 에일라는 오래된 생일 명부를 뒤지고 있었다. 삼십 년 전 정민규의 자료가 처음 작성된 해에는 두 개의 출생 기록이 있었다. 하나는 학교 밖의 평범한 병원에서 발급된 기록, 다른 하나는 사고 다음 날 학교 역일 관리실에서 생성된 등록증이었다. 후자의 부모 칸은 비어 있었다.
[발생 원인: 긴급 대피 시각 보존. 최초 생성 시각: 02:17.]
“출생과 생성이 같은 말은 아닙니다.” 에일라가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 “누군가의 생물학적 탄생을 적은 게 아니라 사고 당시에 생겨난 역할을 등록한 것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아이는?” 오르반이 물었다.
“역할에서 나왔으니까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결론을 내리시려고요?” 에일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오르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다만 우리는 그를 어디에도 넣을 수 없는 상태야.”
셀레나가 서류의 여백에 한 단어를 썼다. ‘사람’. “넣을 칸이 없으면 칸을 만들면 되죠. 이 학교가 마법보다 서류가 어려운 곳이라지만, 원래 새 학과도 만들 수 있었잖아요.”
오르반은 고개를 문질렀다. 셀레나가 교수가 되던 해 그가 새 학과 개설을 승인하면서 겪은 고생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저녁 무렵 마을 주민들이 학교 정문 앞에 작은 바구니를 놓았다. 빵과 과일, 담요가 담겨 있었다. 미라는 앞에 선 할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제 돌아온 아이가 있다면서요. 우리 마을에도 예전에 이름을 잃었던 사람이 있었지.”
할머니는 바구니 위에 놓인 검은 장갑을 집어 들었다. “그 애가 돌아왔을 때 다들 이름부터 물었어. 기억 못 한다고 하니까 가짜라고 했지. 나중에 보니 우리가 잊은 거더라고. 그 뒤로는 먹는 게 먼저라고 마음먹었어.”
미라는 할머니의 이름을 물었다. 노인은 자신을 린타라고 소개했다. 기록에는 평범한 제분소 직원의 어머니로 적혀 있었지만, 은희는 침대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한참 멍하니 있었다. 삼십 년 전 통로를 함께 지켰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린타, 네가 아직 여기 있었니?”
“내가 움직이기가 싫어서 그렇지.” 린타는 웃었다. “너는 이제 좀 쉬어야지.”
서로의 손을 잡는 동안 소년은 문가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린타가 그에게 바구니를 밀어 주었다.
“이름이 뭐니?”
소년의 표정이 굳었다. 린타는 바로 손을 들어 보였다. “안 해도 돼. 오늘은 내가 쓴 빵이 맛있는지 그것만 말해.”
소년은 작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다.
“달아요.”
“아이고. 또 실패했네.”
“그런데 맛있어요.”
린타가 크게 웃었다. 누구도 종이 위에 그를 적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 그를 만난 사람들은 서로가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하루가 끝나기 전 에일라는 시청에서 가져온 오래된 주민 등록 예외 조항을 보여 주었다. 마을이 전쟁과 홍수로 피난민을 받아들였던 때 만든 임시 규칙이었다. 태어난 장소를 알 수 없는 아이에게는 ‘발견된 날’을 적되 그 날짜가 생일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규칙이지만, 최소한 아이가 살 수 있게 하려고 만든 것이죠.” 에일라가 말했다.
오르반은 종이를 읽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 학교가 마을보다 늦게 배웠군.”
“배워도 됩니다.” 민규가 답했다. “지금 고치면 되죠.”
세 사람은 학교 임시 보호 절차를 마련하기로 했다. 자동 출석 마법에서 분리된 보호실을 만들고, 진료 내용과 개인 일기는 본인 허락 없이 공유하지 않으며, 강제 인계가 필요한 상황에는 최소 두 명의 독립 검증인이 참여하도록 했다. 누군가 그 조항을 악용할지도 몰랐지만, 악용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피해자의 선택권부터 빼앗을 수는 없었다.
소년은 회의가 끝난 뒤 민규에게 시청 규정을 읽어 달라고 했다. ‘발견된 날’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제가 만난 날은 아저씨랑 같아요?”
“응. 우리가 서로를 처음 만난 날은 같지.”
“그날을 생일이라고 해도 돼요?”
“네가 그러고 싶으면 기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꼭 정해야 하는 건 아니야.”
소년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날은 공을 처음 찬 날이니까 공놀이 날로 할래요.”
민규가 웃었다. “그것도 좋은 이름이네.”
창밖에는 반딧불처럼 작은 빛들이 날아다녔다. 학교의 시계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마을의 평범한 밤에는 자기 방식대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날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린이 친구에게 건네준 공책에는 작은 규칙이 있었다. 누구든 원하지 않는 페이지는 보여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그 규칙을 표지 안쪽에 다시 적었다. 한 번 적고 나자 마음이 놓였는지, 그동안 감춰 두었던 그림도 더 그렸다. 식당의 주전자와 미라의 무대, 그리고 처음으로 바깥에서 본 하늘이었다.
“이렇게 많이 그리면 금방 다 쓰겠네.” 민규가 말했다.
“그럼 다음 공책을 사면 되죠?”
“그럼. 네가 원하는 걸로.”
소년은 잠시 웃었다. 끝이 나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근무일지와 달리, 다음 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공책이었다.
밤 열한 시, 경비실 팩스 기계가 두 번째 통지를 내보냈다. 민규는 전날 전원을 뽑아 두었는데 종이는 복사기 대신 벽의 출석함에서 나왔다.
[임시 보호 관찰 종료까지 1시간. 개인 신원 미확인 시 자동 인계 수행.]
그 아래에는 보호자를 선택하는 항목이 있었다.
[1. 정민규. 2. 하른. 3. 중앙 기록보존총국.]
민규는 세 칸 모두에 줄을 그었다. “아이가 물건도 아니고 이건 뭐야.”
미라가 통지서를 들여다봤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게 하는 건, 선택권을 준 게 아니에요.”
“그렇지.” 민규는 빈 네 번째 칸을 만들어 썼다.
[4. 본인 의사 확인 전 인계 보류. 보호는 계속.]
종이는 새카맣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깐 하얀 빛을 내더니 투명해졌다. 글씨가 사라진 곳에 아주 가는 균열이 생겼다. 기록망이 이해하지 못하는 답을 강제로 넣을 때마다 생기던 흔적이었다.
자정 종이 울렸다.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이 잠든 방의 달력에, 아무도 적지 않은 새 날짜가 나타났다. 그 숫자는 오늘도 내일도 아니었다.
[근무 대체 대기일: 10,958일째.]
삼십 년의 기다림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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