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제7교실의 문패가 먼저 없어졌다.
그다음에는 문고리가 흐려졌고, 마지막으로 문에 붙어 있던 낡은 낙서가 사라졌다. 낙서에는 ‘루카가 여기서 또 벌점을 받았다’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루카는 그 글씨를 자기가 쓴 기억이 없다고 우겼다. 그러나 교실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저마다 그 장난을 한 번쯤 봤다고 말했다.
“문이 없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요.” 셀레나가 중얼거렸다.
학교 동쪽 날개는 피난 대피소로 쓰였던 구역과 이어져 있었다. 학생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와 다행이었지만, 건물 안에는 아직 옛 서류와 물품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보건실 수첩에 나타난 ‘북쪽 창문의 첫 새벽’이 동쪽 교실의 윗공간과 이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케스 감사관이 밤새 달려왔다. 검은 우산은 접힌 상태였다. 그의 얼굴에는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의 피로가 드러났다.
“중앙이 자동 소거 조항을 다시 활성화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중지 요청을 보냈지만 아직 회신을 받지 못했어요.”
“승인을 기다리면 교실이 사라집니다.” 민규가 말했다.
“그러니 사람이 없는지부터 확인해야겠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바로 전날까지 서로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같은 순서를 말했다. 먼저 사람, 그다음 시설과 기록. 하지만 방법은 달랐다. 케스는 검은 우산의 그늘로 교실을 잠시 얼려 둘 수 있다고 했고, 셀레나는 그러면 안쪽에 아직 사람이 있는 경우 그 사람까지 멈출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민규는 복도 입구에 천막을 설치했다. 출입하려는 사람의 이름을 받는 대신, 들어간 사람과 나온 사람의 수를 별도로 세었다. 학교의 기록망을 쓰지 않는 수기 표였다. 바르트가 손전등을 벽에 걸고 철제 줄자 여러 개를 붙였다. 벽이 사라지더라도 줄자의 다른 끝은 천막에 남았다.
“마법으로 버티는 것보다 더 원시적이군요.” 케스가 말했다.
“줄자도 끊어질 수 있어요.” 민규가 대답했다. “그래서 하나만 쓰지 않는 겁니다.”
제7교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오래된 나무 책상 열두 개와 허물어진 게시판, 책상 사이에 떨어진 지우개 하나. 민규는 문턱 앞에서 계단을 세듯 발걸음을 세었다. 온실에서 가져온 색깔끈을 문틀과 천막 사이에 연결했다. 실이 긴장 없이 늘어지는 동안에는 공간이 버티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합니다.” 미라가 말했다. “학교에 다닐 때 이 교실은 분명 여섯 번째 교실이었는데요.”
“문패만 바뀐 걸 수도 있지.” 루카가 말했다.
“아니, 창문의 위치도 달라. 이 방에서 종탑이 보여야 하는데, 지금 보이는 건 우물이야.”
바깥에서 확인한 지도와 내부 창문이 바라보는 풍경이 달랐다. 민규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창문 밖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움직이는지 살폈다. 잎은 흔들렸지만 줄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을 흉내 낸 과거 영상이었다.
“저쪽 풍경은 실제 마을이 아닙니다.” 그는 말했다. “따라가면 안 됩니다.”
셀레나는 작은 종을 울려 보았다. 교실 안에서 종소리는 한 번 울렸지만 복도에서는 두 번 들렸다. 반향이 두 방향으로 갈라져 있었다. 케스가 우산을 바닥에 놓고 손가락으로 먼지를 긁었다. “이 방은 지금 두 개의 기록에 동시에 걸려 있습니다. 하나만 지워지면 다른 하나가 찢어질 수 있어요.”
“그럼 먼저 어느 쪽이 진짜 교실인지 찾아야겠군요.”
그들은 바닥 아래의 나무를 두드렸다. 바르트는 오래된 학교 건물의 들보가 이어지는 방향을 기억했다. 진짜 교실의 바닥이라면 이음새가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가운데 책상 아래의 널빤지는 북쪽으로 이어졌다. 그는 낡은 지우개를 치우고 바닥판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는 계단이 없었다. 작은 빈 공간과 녹슨 환기구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분명히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민규는 종이 조각을 올려놓고 움직임을 봤다. 종이는 한동안 멈춰 있다가 갑자기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공기가 통하는 곳입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이 숨 쉬는 공간과 이어져 있을지도 몰라요.”
교실의 바깥벽이 흔들리는 동안 학생들은 마을 임시 수업터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학교를 보러 오려 했다. 미라는 학생회 임시 대표들과 함께 출입 제한의 이유를 설명했다. “무조건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지금은 벽의 위치가 바뀌고 있어서 발을 잘못 디디면 나올 길이 없어질 수 있어.”
학생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럼 우리 책과 과제도 다 없어지나요?”
“일부는 그럴 수 있어.” 미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네가 배운 내용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야. 필요한 건 다시 같이 만들 수 있어.”
아이들은 그 말에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중요한 물건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여전히 슬펐다. 한 학생은 자기가 어릴 적 그린 그림이 제7교실 서랍에 남아 있다고 했다. 미라는 함부로 꺼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사진으로라도 남길 수 있는지 구조팀에 물어보겠다고 했다.
민규는 그 부탁을 들었다. 전에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물건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기 쉬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그림 한 장은 삼십 년을 견디게 하는 기억일 수도 있었다. 그는 위험 구역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거리에서 창문 너머를 촬영하도록 지시했다. 사진에는 서랍과 책상이 흐릿하게 남았다. 아이는 그림을 찾지 못했지만 자기 자리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루카는 그 광경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누나가 없을 때 누나 책상은 그대로 뒀어요. 먼지가 쌓여도 닦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죠.”
미라가 동생을 바라봤다. “정말?”
“글쎄, 서랍에 숨겨 둔 과자는 먹었을지도.”
“그건 네가 남긴 과자였잖아.”
둘은 웃었지만 잠깐 서로의 손을 잡았다. 누군가 돌아올 때까지 남겨 둔 자리가 있다는 건, 때로는 어떤 마법보다 더 긴 시간을 버티게 했다.
교실의 나무 바닥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자 바르트는 공구를 바꿔 쥐었다. 큰 망치 대신 손잡이가 짧은 고무망치였다. 그는 널빤지를 부수지 않고 울림을 확인하려 했다. 서로 다른 세 곳을 두드리면 가운데에서만 맑은 소리가 났다. 그 아래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민규는 그 소리를 녹음하게 했다. 기록관은 처음에는 녹음을 총국 보안 규정 위반이라며 반대했지만 케스가 허용했다. “어떤 조항이 무엇을 금지하는지 분명히 적으시오. 설명할 수 없다면 작업을 막지 마시오.” 기록관은 입을 다물었다.
녹음을 다시 틀자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세 번째 두드림 뒤에는 희미한 발걸음이 따라왔다. 바깥 사람이 망치로 두드리는 때마다 안쪽 사람도 움직인 것이었다. 바르트는 두드림을 멈췄다. 안쪽의 발걸음도 멈췄다. 다시 한 번 두드리자 이번에는 발소리가 두 번 났다.
“상대가 신호를 따라 주고 있어요.” 민규가 말했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소리보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한 번은 네, 두 번은 아니오’라고 통신용 종이에 적어 창문 아래로 밀어 넣었다. 돌아온 신호는 처음에는 불규칙했지만 잠시 뒤 정확하게 맞기 시작했다. 상대가 종이를 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민규는 질문을 줄였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어디에 있는지와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지였다.
“사람 하나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립시다.” 그는 말했다. “상대가 나올 수 있다면 밖에서 길을 만들고, 못 나오면 구조 통로를 찾으면 돼요.”
나디아는 목소리가 약한 사람이 대답하기 편하도록 신호표를 더 크게 썼다. 케스는 그 표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삼십 년 전에 누가 이런 표를 남겼다면…”
에일라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지금 남기면 됩니다.”
소거 장치의 첫 번째 파동이 밀려왔을 때, 시험용 줄자 가운데 하나가 소리 없이 절반으로 줄었다. 민규는 즉시 모두를 천막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사람이 나가는 수를 확인한 뒤에야 남은 물건을 바라봤다. 기록관 한 명이 자신이 두었던 장갑을 찾으러 돌아가려 했지만 케스가 막았다. “장갑은 다시 구하면 되오. 당신이 안쪽에 남으면 그건 문서 처리 실수가 아니라 사람의 사고가 됩니다.”
그 짧은 행동을 보며 민규는 케스가 무조건 명령만 따르는 사람이 아님을 인정했다. 그러나 멀리 있는 중앙의 자동명령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의지가 있는 사람 하나의 판단만으로는 멈추기 어려운 재난이었다.
케스는 곧바로 소거 중지 요청을 한 번 더 보냈다. 기록관이 마법 통신기에 말을 외웠지만 반응이 없었다. 중앙에서는 ‘명령 전송 완료’라는 글씨만 반복해서 보냈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자동 조항을 만들었을 때는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겠지요.”
“누군가 만들었으니까 누군가 고칠 수도 있겠죠.” 민규가 말했다. “일단 전원을 찾읍시다.”
“마법 장치에 전원이라니.” 셀레나가 피식 웃었다. “이제 제가 그런 말에 놀라지 않는 게 더 놀랍네요.”
그들은 기록망의 연결이 건물 어딘가에 물리적으로 놓인다는 점에 착안했다. 빛나는 마법 문양도 결국 문턱의 금속선이나 벽 안쪽의 수정석을 통해 전달됐다. 바르트는 제분소에서 쓰던 얇은 구리판을 가져왔다. 민규는 교실의 가장 바깥쪽 연결선을 찾아 천막 밖에 표시했다.
“선을 자르겠다는 건 아니겠죠?” 케스가 물었다.
“아닙니다. 먼저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자는 겁니다. 잘못 자르면 다른 교실까지 없어질 수 있으니까.”
그때 루카가 창문 가까이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유리 바깥에서 연필로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민규에게 손짓했다. 유리에는 작은 글씨가 거꾸로 나타났다.
[안에 사람이 없다면, 왜 밖에서 자꾸 나가라고 합니까?]
루카는 입을 벌렸다가 소리를 낮췄다. “아저씨, 이거 누가 쓴 거죠?”
민규는 유리를 손으로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작은 종이에 ‘사람이 있다면 손으로 한 번, 기록이라면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적어 붙였다. 유리 속에서 어떤 손이 나타나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사람의 손처럼 보였지만 한쪽 손목이 투명했다.
“살아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지 않았어요.” 민규가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다고 처리할 순 없습니다.”
그들은 창문 바깥의 상대에게 질문 세 개를 보냈다. 지금 보이는 것,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소, 바깥에서 무엇을 해 주길 바라는지. 돌아온 답은 짧았다. ‘하얀 커튼’, ‘침대 네 개’, ‘문을 닫지 마.’ 나디아가 보건실 수첩의 ‘옛 치료실’ 기록을 떠올렸다.
“그쪽은 환자들이 누워 있던 방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제7교실이 아니라 옛 보건실의 벽 하나일 수 있어요.”
중앙에서 내려온 소거 명령이 교실 전체를 한 덩어리로 처리하면서, 서로 다른 날짜에 걸친 두 방이 같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케스는 총국의 장치가 잘못된 구역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건 단순한 조사 실패가 아니라 현장 위험입니다.” 그는 자신의 봉인 장부를 펼쳤다. “내 권한으로는 한 번, 열다섯 분의 재확인 절차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 안에 사람을 데려오기는 어렵습니다.” 민규가 말했다.
“나도 압니다. 하지만 기록을 옮기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옛 치료실의 모습이 유리에 비칠 때마다 외부에서 확인한 내용을 작은 종이에 받아 적었다. 무슨 색 커튼인지, 침대가 몇 개인지, 출구는 어디인지. 그리고 바깥의 현재 시각을 함께 적었다. 원본을 훔쳐 나오는 작업이 아니라, 현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복수의 사람이 보고 적는 작업이었다.
열다섯 분이 끝나기 직전, 바르트가 환기구 아래에서 작은 금속 고리를 찾아냈다. 고리에는 이전에는 없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정은희. 환자 보호를 위해 출입 지연. 보건실 북측 창문으로 구조 요청.]
민규는 고리를 손에 쥐지 않았다. 지금 들어온 기록이 실제 과거에서 전해진 것인지, 소거 장치가 만들어 낸 미끼인지 아직 구분할 수 없었다. 대신 사진과 실물 위치를 기록했다.
열다섯 분이 끝나자 교실의 책상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문패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글씨가 바뀌어 있었다.
[제7교실 → 옛 보건실 임시 격리실.]
사라지던 교실은 멈췄다. 그러나 창문 바깥의 손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손가락이 한 번 더 움직였고, 유리에 작은 한글 문장이 나타났다.
[민규가 왔니?]
민규는 문 앞에 섰다. 그 글씨를 보고도 곧바로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를 흉내 낸 기록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차분히 종이에 썼다.
‘여기에 있습니다. 안전한 길을 먼저 만들겠습니다.’
유리 안쪽에서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날 처음으로 소거 장치는 사람을 한 명도 지우지 못했다.
제5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