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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법학교 야간 경비원의 정체 · 54화
PAYLUA ORIGINAL · 제54화

54화. 약장 속에 남겨진 세 사람

마법학교 야간 경비원의 정체 · 6,027자

오프라인 책장
나디아의 약장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약병에는 병명과 투약 시각, 보관 조건만 적혀 있었다. 환자의 이름을 적는 칸은 별도 장부에 있었는데, 그 장부는 마법으로 잠기지 않았다. 대신 진료가 끝난 날이면 나디아가 직접 작은 상자에 넣고 열쇠를 보관했다. “몸이 아픈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남의 기록을 허락 없이 읽는 건 잘못된 일이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정민규가 약장을 찾아온 건 종탑에서 나온 봉투의 파란 도장 때문이었다. 에일라는 사고 당시 사용된 파란 잉크가 보건실의 응급 기록과 같다고 했고, 나디아는 오래된 약품 상자를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마을 환자들이 아침부터 찾아왔으므로 작업은 진료가 끝난 뒤에야 시작됐다. 루카는 누나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는 예비일에서 빠져나온 뒤 밤마다 같은 꿈을 꿨다. 두꺼운 종이가 몸에 감기는 꿈이었다. 눈을 뜨면 실제 종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디아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후유증이라며 넘기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 때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나디아가 말했다. 미라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제가 돌아오면 전부 예전처럼 될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누나는 원래도 성격 나빴는데.” 루카가 끼어들었다. “그래. 그 성격을 유지하려면 내가 밥을 좀 더 먹어야 해.” 두 남매가 서로를 보고 웃었다. 민규는 의자에서 몸을 조금 뒤로 뺐다. 그런 장면에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디아는 약장을 뒤져 오래된 서류 상자를 꺼냈다. 먼지가 굳어 뚜껑의 금속 장식에 붙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치료 기록 세 묶음이 따로 보관돼 있었다. 첫 번째는 삼십 년 전 사고 직후 접수된 환자들의 기록, 두 번째는 복구 작업 중 치료받은 사람들의 기록, 세 번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임시 번호를 받은 사람들의 기록이었다. “세 번째 묶음은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 없어요.” 나디아가 말했다. “본인이 동의하거나, 그 기록이 구조 경로를 확인하는 데 꼭 필요해야 합니다.” “지금 찾는 건 어머니의 도장입니다.” 민규가 대답했다. “사람의 병명은 보지 않아도 됩니다.” 나디아는 첫 번째 묶음의 겉표지만 가져왔다. 파란 도장은 거기에도 찍혀 있었다. 그러나 종탑 봉투와 나란히 놓자 미세한 차이가 드러났다. 봉투에는 도장이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었고, 보건실 기록에는 반듯하게 찍혔다. 아래에 남은 작은 흠집은 같았다. 같은 도장으로 찍었으나 다른 사람이 썼다는 뜻이었다. “도장을 빌려 쓴 사람이 있군요.” 민규가 말했다. “빌려 줬는지는 모르죠.” 나디아가 대답했다. “어머니가 직접 찍었을 수도 있고요.” 나디아는 상자 바닥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당시 보건실 책임자가 남긴 개인 근무 메모였다. 공식 진료 기록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와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적은 노트였다. 표지는 손때로 까맣게 변해 있었고 첫 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열이 나면 먼저 체온을 확인한다. 이름이 없어도 치료는 시작할 수 있다.] 민규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늘 하던 말과 닮아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서류부터 확인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수첩의 사고 당일 페이지에는 세 사람이 나왔다. ‘아이 하나, 보호자 하나, 출입 담당자 하나.’ 정식 이름은 없었다. 출입 담당자는 손목에 낡은 경비시계를 차고 있었고, 보호자는 한국말로 아이를 불렀다고 적혀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묻고 있었다. “그 아이가 민규 아저씨예요?” 루카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해야 해.” 민규가 말했다. 수첩에는 이상한 내용이 하나 더 있었다. 출입 담당자의 체온이 재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는 것이다. 보건실 책임자가 직접 재면 정상 체온이었지만 자동 측정기에 대면 ‘검사 대상 없음’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보호자는 그 현상을 보고 기계가 고장 난 게 아니냐고 물었다고 했다. 민규는 오래된 체온계를 꺼냈다. 금속 표면에는 녹이 슬어 있었지만 유리관은 멀쩡했다. 나디아는 기계에 기대지 않고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라며 건넸다. “다만 누가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도구일 뿐, 누가 진짜 사람인지 판단하는 도구는 아닙니다.” 그날 오후 이름 없는 아이가 보건실을 찾았다. 아이는 따뜻한 수프를 다 먹고도 종이별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마레가 동행했고, 아이는 민규를 보자 먼저 물었다. “제가 오늘은 밖에 나가도 돼요?” “나디아 선생님과 상의하면 되겠지.” “그럼 제 이름은 언제 정해져요?” 그 질문에 모두 조용해졌다. 이미 어떤 사람들은 아이에게 임시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었지만, 아이 스스로는 그 이름을 고르지 않았다. 누가 이름을 주면 학교가 다시 그 아이에게 일을 맡길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다. 나디아가 대답했다. “네가 좋아하는 이름을 생각해도 좋고, 당분간 이름을 안 써도 괜찮아. 치료받거나 수프를 먹는 데에는 아무 지장 없어.” 아이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저는 별을 좋아해요. 별을 볼 수 있는 창문이 있는 데서 자고 싶어요.” “그럼 오늘은 별을 볼 수 있는 침대로 옮겨 줄게.” 마레가 말했다. 그날 저녁 보건실 창문 가까이에 작은 침대가 놓였다. 아이는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어둠이 내려오자 학교의 나머지 학생들이 차례로 켠 등불이 마을 길을 따라 반짝였다. 밤하늘의 별과 사람이 켠 불은 모습이 비슷했지만 움직이는 방식이 달랐다. 민규는 그 모습을 본 뒤 수첩으로 돌아왔다. 그는 세 사람의 기록이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문서가 아니라는 걸 더 분명히 깨달았다. 같은 아이가 여러 기록에 있을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아이를 한 사람으로 합쳐 놓았을 수도 있었다. 서기관이 수십 년 동안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기록의 숫자를 사람의 숫자로 착각한 일이었다. 나디아는 약장의 다른 칸에서 오래된 약병 하나를 꺼냈다. 라벨의 글씨는 거의 지워졌지만 유리 바닥에는 바늘로 긁어 만든 세 개의 흠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의 주치의가 응급상황에서 빈 병을 신호 도구로 사용했다는 메모를 보여 주었다. 약이 없을 때는 병을 두드려 구조 요청을 보내고, 병이 세 번 울리면 침상 세 개를 확인하라는 규칙이었다. 민규는 병을 두드려 보고 싶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보건실 창문에 신호를 보내는 일이라면 지금 기다리는 사람이 다른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디아는 시험용 빈 병을 따로 가져왔다. 유리 두께가 달라 소리가 조금 낮았다. 바르트는 병을 흔들 때 생기는 울림을 듣고 복도에서 들린 세 번의 신호와 비교했다. “같은 계열의 소리입니다.” 바르트가 말했다. “하지만 꼭 사람이 두드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옛 장치가 정해진 주기로 병을 건드렸을 수도 있죠.” 미라는 작은 종이에 ‘약병 신호, 원인 미확인’이라고 적었다. 적어도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생각만으로 진실을 정하지 않게 되었다. 보건실 벽에 붙은 오래된 사진은 창문을 찾는 데 도움이 됐다. 사진 속에는 한쪽 모서리가 찢어진 커튼, 낮은 나무 침대, 창틀에 꽂힌 노란 장미 한 송이가 보였다. 나디아는 그 장미가 진짜 꽃이 아니라 작은 종이 공예품이라고 말했다. 치료받는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창문마다 다른 꽃을 걸어 두던 관습이었다. 빨간 꽃은 응급실, 노란 꽃은 회복실을 뜻했다. “북쪽 창문이 회복실이었다면 안쪽에는 중환자가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걸 삼십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은 건가요?” 미라가 물었다. 나디아는 미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찾았겠죠. 다만 찾으려는 사람마다 다른 지도를 받고, 지도에 없는 방을 상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민규는 그 답이 더 슬프다고 생각했다. 길이 하나만 없어져도 사람의 노력은 기록에서 실패로 바뀐다. 누구도 구하러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하러 가는 길 자체가 지워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은 환자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위치만 확인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종이별을 들고 온 아이에게도 창문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볼지 물었다. 아이는 한참 생각하다 동그란 창과 네모난 창을 나란히 그렸다. 동그란 창은 낮의 방, 네모난 창은 잠의 방이라고 했다. 그림은 서툴렀지만 교사가 가져온 오래된 사진과 창틀 모양이 같았다. “잘 그렸어.” 미라가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거나 그린 건데요.” “아무거나 그렸다고 해도 네가 본 건 네가 제일 잘 알아.” 그 말에 아이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네모난 창문 옆에 조그만 의자를 하나 그렸다. “여기에 누가 앉아서 계속 기다렸어요. 저는 그 사람이 종이에 누굴 그리는 줄 알았어요.” 민규는 종이를 바라보다 의자 그림 아래에 화살표를 그려도 되는지 물었다. 아이가 허락하자 방향을 적었다. ‘창 오른쪽, 문 반대편.’ 그 한 줄 덕분에 창문이 나타났을 때 어느 쪽을 바라봐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에일라는 옛 보건실 일지의 사본을 넘기며 사고 당시 환자에게 지급된 물건을 정리했다. 담요 세 장, 물주머니 세 개, 식사표 두 장, 이름 없는 방문증 한 장. 수량이 서로 달랐다. 방문증을 받은 사람과 식사를 받은 사람은 같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장부를 고칠까요?” 루카가 물었다. “아니.” 에일라가 대답했다. “불일치 자체가 중요한 증거예요. 지금 맞춰 버리면 왜 달랐는지 알 수 없게 되니까.” 그날부터 보건실 출입대장에는 새 항목이 생겼다. ‘서류상 입원 여부’와 ‘실제로 관찰된 인원’이었다. 겉보기에는 자잘한 구분이었지만, 나디아는 다음 환자가 왔을 때도 그 구분을 지키기로 했다. 환자에게 필요한 건 종이에 자기 이름이 있다는 확신보다 지금 문 앞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나디아는 민규에게 오래된 붉은 실뭉치를 내밀었다. 응급치료 때 봉합용으로 쓰던 실이었다. 원래는 파란 도장 옆에 걸려 있어야 하는데 서랍 아래서 발견됐다고 했다. 민규는 실을 들고 집에서 어머니가 똑같은 색으로 자신의 장갑을 꿰매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장갑은 손가락 하나가 늘 짧았다. 어머니는 손가락 끝을 이어 붙여 주며 “작다고 바꿀 필요는 없지. 고치면 되니까”라고 웃었다. 그가 실을 쥐었다가 조심스럽게 놓았다. 같은 색이라고 같은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기다린다는 일이 어떤 감각인지, 그는 붉은 실 한 가닥만으로도 충분히 기억했다. 나디아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낡은 접수증을 찾았다. 접수증에는 실제 주소가 없고 ‘북쪽 창문의 첫 번째 새벽’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표현을 알아봤다. “옛 보건실에서 새벽이 가장 먼저 들어오던 창문이 있었어요. 그곳을 폐쇄한 뒤에는 건물 위치가 여러 번 바뀌어서 지금 지도에는 없습니다.” 바르트가 도면을 가져왔다. 그는 옛 보건실의 위치를 세 개의 기준점과 비교했다. 종탑 북쪽, 온실 동쪽, 제분소와 나란한 높이. 그 셋이 만나는 자리는 현재 학교의 어느 방과도 겹치지 않았다. 대신 복구된 학교 지붕 위 허공에 작은 사각형이 그려졌다. “방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날짜가 옮겨진 거예요.” 셀레나가 말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마지막까지 누군가 환자를 지키고 있었겠죠.” 민규는 창문이 있던 높이를 올려다봤다. 맨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종이별을 든 아이가 갑자기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서 노래를 불렀어요.” 아이가 말했다. “항상 마지막에 ‘집에 가자’라고요.” “누가?” 아이는 망설이다 답했다. “어른 목소리였어요. 제가 엄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는데, 제가 그 사람의 아이는 아닌 것 같았어요.” 민규는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 “어떻게 부를지는 네가 정하는 거야. 지금 말해 준 것만으로 충분해.” 아이의 손가락이 바깥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 잠깐 작은 창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안에서 누군가 손으로 세 번 두드렸다. 두 번은 분명하고 세 번째는 약했다. 나디아가 오래된 수첩을 다시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의 잉크가 젖은 듯 번지고 있었다. [세 명을 확인했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은 두 명뿐이다. 세 번째 사람은 아직 보건실에 있다.] 그 아래에는 당시 간호사가 적어 둔 날짜가 있었다. 삼십 년 전의 날짜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오늘 날짜가 새롭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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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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