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된 아이가 내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내일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이는 따뜻한 우유를 반 컵 마시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창문 가까이에 마련된 침대 옆에서는 작은 종이 별이 흔들렸다. 마레가 바람을 막으려고 창을 닫았는데도 별은 한 바퀴씩 천천히 돌았다. 종이에는 분명 내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한글로 쓴 경고와 달리 날짜의 숫자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달력 방식이었다.
정민규는 종이를 장갑으로 집어 들지 않았다. 아이가 잠결에 손으로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레가 아이의 허락을 받아 이미 옮겨 적은 사본만 펼쳤다. 사본의 왼쪽 위에는 발견 시각과 기록자의 이름이 있었다.
“그러니까 일 년 뒤에 학교가 없어진다는 예언인가요?” 루카가 물었다.
“예언일 수도 있고, 날짜가 잘못 찍힌 걸 수도 있어. 누군가 일부러 이 날짜를 적었을 수도 있고.”
“그런데 경고는 진짜죠?”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은 진짜야. 그 경고가 가리키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해야지.”
루카가 입술을 내밀었다. 잠깐 전까지 기쁨으로 빛나던 눈이 다시 어두워졌다. 첫 아이를 구했는데도 다음 위험이 찾아왔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다.
마레는 그에게 씻어서 말린 작은 수건을 건넸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부탁해도 될까? 보건실 창가에서 오늘 날짜가 보이는 달력을 가져다줄래? 다른 학생들은 여기 들어오지 않도록 설명해 주고.”
루카는 달려나갔다. 위험한 물건을 쥐여 주는 것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분명한 일을 맡기는 편이 낫다는 마레의 배려였다.
오르반은 사본을 한참 바라보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학교 설립 당시 사용하던 황동 달력판이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작은 톱니가 한 칸 움직이는 장치였다. 민규가 판을 뒤집어 보니 톱니 하나가 새것으로 교체돼 있었다.
“이건 누가 수리했습니까?”
“삼십 년 전 사고 직후에. 당시에는 날짜가 열흘씩 앞서거나 뒤로 가는 문제가 있었지.”
“수리 기록은요?”
오르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오래전에 태워 버린 서류들을 떠올린 것 같았다.
“사고 기록과 함께 봉인했다.”
“교장 선생님. 봉인했다는 말은 어디에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입니까?”
“그때는 둘이 같은 뜻이라고 생각했다.”
민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르반의 죄책감을 덜어 주는 것이 자신의 업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래된 실수를 탓하는 동안 학생들의 대피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기숙사에서는 이상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학생 기숙사 벽시계가 새벽 두 시 십칠 분을 가리키자, 기숙사 전체의 창문에 성에가 끼었다. 한낮인데도 숨을 내쉬면 입김이 났다. 당직 사감은 난방 마법을 최대로 올렸지만 바닥은 차가웠다.
민규는 열기가 나오는 송풍구에 손을 댔다. 바람은 충분히 따뜻했다. 그는 뒷벽을 살피다가 거울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거울에는 자신과 셀레나가 비쳤지만, 그들 뒤의 복도는 비치지 않았다. 대신 낯선 교실과 줄지어 놓인 작은 책상이 보였다.
“이 건물에 원래 저런 교실이 있었습니까?”
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거울 속에서 누군가 분필을 들었다. 칠판에는 한 줄이 적혔다.
[두 번째 경보 준비 중. 기준 건물: 학교 본관.]
“경보를 누가 준비하는 거죠?” 셀레나가 물었다.
민규가 손전등을 비스듬히 비추었다. 글씨는 빛을 받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마력으로 직접 만든 환영이 아니었다. 어딘가의 실제 칠판에 적힌 말이 반사되는 모양이었다.
“저 교실을 찾아야겠습니다. 하지만 거울로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정민규 씨, 모두가 그 말을 예상했다고 생각하진 마세요.”
셀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손짓 하나로 거울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러지 않고 창틀을 고정하는 줄을 가져왔다. 거울이 쓰러져 학생이 다치지 않도록 묶는 일이 먼저였다.
한편 하른은 북문에서 자신의 오래된 경비모를 찾고 있었다. 그가 두었던 자리에는 모자가 없었다. 대신 붉은색 도장이 찍힌 문서가 놓여 있었다.
[긴급 교대 명령. 대상: 전 재직 경비원. 시각: 02:17.]
하른의 손이 떨렸다. 삼십 년 동안 그를 가두었던 근무표와 똑같은 글씨였다. 그는 습관대로 문서에 서명하려다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쉬어도 된다는 종이가 주머니에 있었다.
“이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그는 혼잣말처럼 물었다.
옆에 있던 바르트가 문서를 낚아챘다.
“이번에는 근무 담당자가 아니라, 사람한테 먼저 물어야지. 자네 몸은 괜찮은가?”
하른은 바르트의 어깨 너머로 학교를 바라봤다. 누군가 종을 치기도 전에 첨탑에서 잿빛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학교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서요.”
바르트는 잠깐 하른을 바라보다 수리 도구통을 들었다. “그럼 같이 가세. 이번 근무표는 우리가 쓰는 거야.”
오후에 열린 임시 점검 회의에서 민규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학교 전체를 한 번에 보호하는 마법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마법 명부와 공간 기록망이 같은 설비에 연결돼 있다면 거대한 보호 주문 하나가 오히려 한꺼번에 실패할 수 있었다. 대신 학생 수를 실제 사람으로 확인하고, 건물마다 두 개 이상의 탈출구를 찾는 절차를 정하자고 했다.
오르반이 물었다. “교내에는 수천 개의 방이 있네. 언제 다 확인하지?”
“전부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없다면, 사람이 있는 방부터요. 우선 수업 중인 교실과 기숙사, 보건실의 순서로 분리하겠습니다.”
셀레나는 교사들에게 지역별로 수신되는 신호를 끊을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을 가르쳤다. 마법을 잘하는 학생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마력이 거의 없는 청소 직원과 급식 조리사에게도 기숙사 문 앞의 대피 표식을 확인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민규가 장난처럼 말했다.
“평소에 길 찾는 데는 청소하시는 분들이 교수님들보다 훨씬 빠릅니다.”
실제로 그랬다. 기숙사 청소 직원 나디아는 오래된 벽장 뒤에 직원용 계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생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던 통로였지만, 이제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대피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오후의 점검은 숫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됐지만, 민규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의외로 조리실이었다. 조리실에는 대형 시계가 두 개 걸려 있었다. 하나는 일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의 마력이 변질되는 시간을 알려 주는 시계였다. 두 시계는 보통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오늘은 마력 시계만 자꾸 앞으로 뛰었다.
조리사장은 냄비 뚜껑을 열었다. 감자 수프가 끓고 있었지만 물은 아직 차가웠다. 냄비 아래의 불꽃은 높이 타올랐다. 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확인할 때의 상태가 달랐다. 학생들에게 이런 수프를 나눠 주었다가는 덜 익은 음식 때문에 배탈이 날 수도 있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고 기록만 뜨는 거군요.” 민규가 말했다.
“그럼 마법 시계를 꺼야 합니까?”
“꺼도 됩니다. 대신 온도계를 하나 더 가져오죠. 실제 음식이 어느 정도 익었는지 확인하면 되니까요.”
조리사장은 처음엔 못마땅해했다. 이 학교에서 마법 시계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요리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민규가 직접 국자로 수프를 저으며 말하자 그녀도 작게 웃었다.
“경비원인 줄 알았더니 요리사 흉내까지 내시네.”
“흉내만 낼 겁니다. 제가 요리하면 소방 경보가 먼저 울리거든요.”
조리사장과 직원들이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지만 조리실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런데 조리실 벽에 붙은 낡은 메뉴표를 보던 민규는 웃음을 멈췄다. 메뉴표에 내일의 메뉴가 이미 적혀 있었다. 누군가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써 놓은 게 아니라, 글씨가 조금 전까지 움직였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 사과 파이. 배식 대상: 전원.]
“저 메뉴는 언제 정했습니까?”
“그런 건 정한 적 없습니다. 내일은 평범한 죽을 준비하려 했는데요.”
민규는 메뉴표를 뜯지 않았다. 검은 잉크 아래에 다른 글씨가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빛을 비춰 보니 ‘전원’ 아래에 희미하게 ‘퇴근 불가자 포함’이 적혀 있었다. 미래의 식단표처럼 보이던 것이 누군가를 확인하기 위한 출석 기록이었던 셈이다.
“이걸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그는 조리사장에게 말했다. “메뉴가 바뀌면 어느 시각에 바뀌었는지 적어 두시면 됩니다. 학생들 식사는 실제 온도와 상태를 보고 준비하시고요.”
조리사장은 두꺼운 수첩을 꺼냈다. 수첩 앞표지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고, 안쪽에는 오래된 조리법이 빼곡했다. 학교의 공식 기록망과 무관한 기록이었다. 민규는 그 수첩이 오늘의 상황에서는 어떤 마법서보다 믿을 만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의 온실에서는 또 다른 작은 일이 있었다. 새싹을 키우는 초급 마법 수업에서 학생 둘이 실습 화분이 내일까지 자란 상태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줄기는 급격히 길어졌지만 잎은 아직 말랑했고, 뿌리는 자라지 않았다. 셀레나가 살짝 건드리자 긴 줄기가 곧바로 쓰러졌다.
“미래의 결과만 먼저 보여 준 거예요.” 셀레나가 설명했다. “자라는 데 필요한 과정은 없었으니까 이 상태를 버틸 수 없는 거죠.”
민규는 부러진 줄기를 조심히 받쳤다. 사람을 구조하는 일에도 같은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출구를 만들지 못했는데 ‘구조 완료’라는 기록이 먼저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록망은 과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모두 해결됐다고 믿고 문을 닫아 버릴 수 있었다.
“앞으로 구조 문서에는 결과부터 쓰지 맙시다.” 민규가 말했다.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난 뒤에만 완료로 표시하죠.”
그들은 바르트의 낡은 진동계와 조리실 온도계, 나디아의 청소 일정표를 따로 보관했다. 평범한 물건들이 한 가지 공통점을 가졌다. 날짜를 알려 주는 마법에 묶여 있지 않았다. 민규는 그 물건들이 아무리 소박해도 필요한 순간에는 학교를 지키는 기준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날 회의가 끝날 무렵 오르반은 슬그머니 민규 옆에 앉았다. 예전 같으면 학생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의 교장은 그 자신도 변화하고 있었다.
“은희 씨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 떠오르네.”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달력에 적힌 날이 오지 않아도 사람은 기다릴 수 있다고 했어. 나는 그때 시간을 고치는 기술에 관한 말이라고 생각했지.”
민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장마철 밤에 손전등을 들고 손잡이를 고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약속한 날까지 수리를 마치지 못해도, 당장 사람이 문 안에 갇히지 않게 만들던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말은 거창한 시간 마법에 관한 설명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고장 난 달력을 보셨을까요. 아니면 기다리는 사람을 보셨을까요?”
오르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민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과거를 아름다운 기억으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은 남아 있는 사람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해가 질 무렵 민규는 보건실로 돌아왔다. 구조된 아이는 깨어 있었고, 루카와 종이 별을 접고 있었다. 아이는 민규를 보자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밀었다. 거기에는 그림이 있었다. 손에 피리를 든 작은 사람이 큰 시계 밑에 서 있었고, 시계가 있는 건물의 지붕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저게 어디니?” 민규가 물었다.
아이는 창밖의 시계탑을 가리켰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그려진 지붕 아래 작은 동그라미를 짚었다.
“거긴 위에 없어요. 아래에 있는 위층이에요.”
“아래에 있는 위층?”
“거기서 선생님이 날짜를 바꿨어요. 내일이 오면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게 하려고.”
민규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선생님 얼굴을 기억하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붓끝으로 국화꽃을 그렸다. 꽃잎은 아홉 장이었다.
민규의 목이 말랐다. 어머니가 쓰던 문양과 같은 수였다. 그러나 아이가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름을 먼저 들려주면 아이가 자기 기억 대신 민규의 말을 따라 할지도 몰랐다.
아이는 마지막 꽃잎 옆에 숫자 하나를 적었다.
[0]
“영 층이군.” 민규가 말했다.
“아니요.” 아이가 처음으로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 층은 밑에 있어요. 이건 영 번째 종이에요. 아직 아무도 넘기지 않은 종이.”
민규는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학교 공식 인장 대신 황동 달력판의 톱니 모양 자국이 있었다. 그는 오르반이 꺼냈던 오래된 달력과 아이의 그림을 나란히 놓았다. 크기와 간격이 정확히 맞았다.
그때 학교의 모든 시계에서 같은 소리가 났다. 째깍, 째깍, 그리고 긴 침묵.
나디아가 무전기로 다급히 외쳤다.
“기숙사 담당자입니다. 복도 끝에 있던 계단이 없어졌어요. 계단이 있던 자리에는 내일 날짜가 붙어 있습니다!”
민규가 창밖을 보았다. 첨탑 뒤쪽의 별 하나가 갑자기 사라졌다. 구름에 가린 게 아니었다. 별을 보던 학생들의 눈길이 동시에 엉뚱한 곳으로 움직였다.
“두 번째 경보가 이미 준비되고 있습니다.” 셀레나가 말했다.
민규는 황동 달력판에 손을 얹었다. 그 아래에서 아주 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누군가 다른 층에서 날짜를 넘기고 있었다.
“그럼 경보를 기다리지 맙시다. 먼저 누가 시간을 넘기고 있는지 확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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