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남겼다는 ‘목소리’를 열쇠로 쓰자는 의견이 가장 먼저 나왔다.
셀레나가 낸 의견은 아니었다. 오르반이 학교 회의실에서 긴급히 연결한 교직원 회의에서 한 교수가 주장한 내용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면 원본실이 출입을 허용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교수는 자신의 의견을 내고 한껏 뿌듯해했다. 사람의 기억을 열쇠로 사용하는 오래된 주문에 관한 연구가 있다고 덧붙였다.
민규는 짧게 물었다.
“그렇게 들어갔다가 목소리가 사라지면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그건…… 연구된 사례가 없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열쇠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남긴 메시지일 수 있으니까요.”
회의가 잠시 조용해졌다. 민규는 회의실 벽에 붙은 마법진이 계속 미세하게 회전하는 것을 봤다. 마법은 이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익숙한 언어였다. 그러나 익숙한 도구가 언제나 알맞은 도구인 것은 아니었다. 배선이 끊어진 문을 만능 주문으로 열려 하면 오히려 내부 안전 장치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는 목소리를 재생할 장치를 찾기 전에 보관함의 온도, 압력, 외부 신호와의 연결 상태부터 적었다. 에일라가 나서서 오래된 환풍 설계도를 찾아왔다. 원본실과 보관함 사이에는 사람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금속관이 있었다. 위험 구역에서 소리만 먼저 들어 보기 위한 장치였다. 대화가 가능하도록 설계했지만 사고 이후 입구를 막아 놓았다.
“복잡한 마법 없이도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루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에일라가 말했다. “저를 비롯한 설계자들이 그걸 잊고 있었네요.”
루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학교는 마법이 많아서 평범한 물건들이 억울하겠어요.”
“평범한 물건도 관리 안 하면 위험해.” 민규가 말했다. “특히 삼십 년 된 배관은.”
청음관을 가져오기 전에 민규와 셀레나는 오래된 제분소로 향했다. 이른 오후였지만 물레방아 뒤로는 벌써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분소 앞에는 밀가루 자루가 쌓여 있었고 바르트의 부인은 작은 화덕에서 빵을 꺼내고 있었다. 마을 주소가 고쳐진 뒤 처음으로 제분소 굴뚝에서 연기가 제대로 피어오르는 날이었다.
“이런 날에 귀찮은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민규가 말했다.
“귀찮은 부탁이라니요. 남편이 아끼는 청음관인데 제 손보다 당신 손에 있는 게 안전하겠죠.”
바르트가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난 이걸 떨어뜨린 적도 없소.”
“물에 빠뜨린 건 빼고?”
부부의 실랑이에 루카가 소리 내 웃었다. 자신이 아는 평범한 집의 풍경이었다. 빵이 굽히고, 부부가 서로를 놀리고, 창가에는 어제 씻은 접시가 엎어져 있었다. 학교의 커다란 사건이 이런 생활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는 게 갑자기 실감났다.
바르트는 청음관을 내주기 전에 한 번 더 손질해야겠다고 했다. 세월이 지나 가죽관 가장자리에 미세한 틈이 생겨 있었다. 틈을 그대로 두면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바깥 소리와 뒤섞일 수 있었다. 그는 얇은 천을 덧대고 밀랍으로 봉했다.
“소리가 멀리서 온다면 이 작은 틈 하나가 사람 목소리를 바꿔 버릴 수 있소.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하십시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는 빨리 시작한 것보다 정확하게 끝내는 게 중요할 때가 많았다. 바르트가 손질하는 동안 민규는 화덕 옆 탁자에 앉아 손가락의 검은 잉크 얼룩을 닦았다. 언제부터 묻어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서기관의 장갑에서 옮은 것인지, 보관함을 만질 때 묻은 것인지. 그는 흔적을 살펴본 뒤 닦아 냈다.
“목소리를 들으면 무슨 말씀을 하실 건가요?” 바르트의 부인이 물었다.
“아마 제가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녹음일 테니까요.”
“그럼 듣고 싶은 말은 있으세요?”
민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듣고 싶은 말을 고르는 일은 잔인하게 느껴졌다. ‘잘 지냈니’라는 말일까. ‘미안하다’는 말일까.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일까. 그는 빵의 따뜻한 냄새를 맡으며 한참 생각했다.
“그분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바르트의 부인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방금 구운 빵 한 조각을 싸 주었다. 민규는 작은 꾸러미를 받아 들고 감사를 전했다. 사람은 가장 큰 질문 앞에서도 가끔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제방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합의 낡은 시계가 보였다. 바늘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종소리는 아직 거칠었다. 루카는 불안한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목소리가 안 나오면 어떡해요?”
“그럼 왜 안 나오는지 찾겠지.”
“나왔다가 사라지면요?”
“듣게 된 것과 듣지 못한 것을 나눠 적을 거야.”
“그럼 내용이 무서우면요?”
민규는 발걸음을 멈췄다. “무서워도 꼭 그 자리에서 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 나중에 다시 듣거나,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청해도 되지.”
루카는 그 말을 마음속에 오래 담아 두었다. 그는 나중에 누나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을 때 이 말을 기억하게 될지도 몰랐다. 누구도 자신을 당장 용감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때 멀리 보이는 제방 벽에 국화 문양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민규가 손전등을 비추자 문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작은 녹슨 못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 오래 걸려 있던 자리였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못 아래 흰 가루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밀가루처럼 보였지만 손가락에 묻혀 문지르자 가늘게 빛났다.
“이건 학교 마법 잔재예요.” 셀레나가 말했다.
“누가 문양을 지우려고 한 겁니까?”
“아니요. 누군가 벽에 물건을 걸어 두었다가 최근에 가져간 것 같아요.”
민규는 못의 위치를 기록했다. 어머니가 남긴 목소리와 비슷한 흔적이 다른 곳에도 있을 수 있었다. 그날의 가장 중요한 단서는 아직 들려오지 않았지만, 누군가 미리 길을 표시해 두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청음 시험 준비가 끝났을 때 바르트는 민규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청음관의 바깥쪽을 마법으로 고정하면 소리는 더 선명해질 수 있지만, 반대로 안쪽의 오래된 녹음이 관찰자의 목소리를 끌어갈 위험도 있었다. 그냥 듣는 방법은 안전하지만 여러 단어를 놓칠 수 있었다.
민규는 망설이지 않고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놓친 말이 있으면 놓쳤다고 적으면 됩니다. 위험한 방법으로 완벽한 답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셀레나는 마법사로서 조금 아쉬웠다. 자기가 배운 기술을 쓰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앞서 마법을 섞은 기록이 사람의 이름을 훼손한 사건을 수없이 봤다. 그녀는 주문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대신 청음관의 고정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무게를 재고 작은 고무 받침을 만들었다.
“이건 마법이 필요 없는 작업이네요.”
“그렇다고 아무나 잘하는 일도 아닙니다. 손재주가 있네요.”
“마법학교 수석에게 듣기엔 조금 묘한 칭찬인데요.”
민규는 웃었다. “고정대 만드는 기술도 필요하잖습니까.”
바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침을 바닥에 고정했다. 바깥으로는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레는 혹시라도 민규가 심하게 놀라거나 쓰러질 때를 대비해 따뜻한 물과 의자를 준비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루카가 물었다.
마레는 조용히 대답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건, 몸이 다친 것과 다른 종류로 힘들 수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곁에 있는 거야.”
루카는 의자 옆에 앉았다. 자신도 언젠가 미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어쩌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청음관의 둥근 끝을 바라봤다.
제분소에서 가져온 청음기를 관측대에 올렸다. 둥근 깔때기와 가죽관을 연결한 물건이었다. 바르트는 원래 이것으로 터빈의 잡소리를 듣는다며, 세척한 부품을 천에 싸서 내주었다. 셀레나는 마법으로 배경 소음을 낮추되 목소리 자체에는 어떤 변형도 가하지 않기로 했다.
오후가 깊어지자 첫 번째 청음 시험이 시작됐다. 잡음 사이로 오래된 바람 소리가 들렸고, 곧 누군가 분주히 걷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민규는 귀에서 관을 떼었다. 잠깐이지만 알아차린 것이다. 어머니가 식탁의자를 끌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계속 들으시겠어요?” 마레가 물었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혼자 듣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자신이 기억을 잘못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동의를 얻은 두 사람과 함께 내용을 적기로 했다. 루카는 옆에서 한글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기록을 못 하겠다며 투덜거렸다. 민규는 그에게 들리는 소리의 간격을 세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민규야. 네가 듣고 있으면 이제는 어른이 되었겠구나.”
청음관의 끝이 떨렸다. 민규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고, 얼굴을 떠올리면 현재의 현장을 놓칠 것 같았다.
“내가 왜 네 이름을 그곳에서 지워 달라고 했는지 화가 날 거야. 그래도 이 말을 먼저 해 두고 싶다. 아무도 너한테 남의 자리를 지키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어.”
숨을 고르는 소리. 어머니는 울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가 발견한 아이는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곳에 오래 갇혀 있었어. 모두가 그 아이를 물건으로 다뤘지. 네가 그 아이 손을 잡고 나오려 했고, 그때 문이 우리를 따라오게 됐어.”
민규는 천천히 기록했다. 원래 경보의 대피 대상은 아이였다. 그런데 관청은 그 아이를 물건으로 분류했고, 문을 닫으려다 다른 사람들까지 가둬 버렸다. 삼십 년의 비극은 누군가 영웅적인 실수 하나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규칙을 고집하면서 시작된 셈이었다.
녹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민규야. 내가 이곳에 남은 건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야. 그 말을 못 하고 보낸 게 오래 마음에 걸렸어. 하지만 나는 네가 안전하게 자라길 바랐어. 그리고 언젠가 네가 다시 여기 오더라도, 혼자 들어가지 않길 바랐어.”
루카는 한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목소리의 끝이 자꾸 끊기는 것만큼은 느꼈다. 아이는 청음관을 붙잡아 주었다. 민규가 펜을 쥔 손으로 잘못된 글자를 두 번 지웠다.
“출구는 보관함 뒤쪽이 아니라 위쪽에 있어. 가장 높이 있는 문을 보지 말고, 물이 흘러나오는 곳을 봐. 그 아이는 높은 문을 무서워해. 낮은 곳으로만 걷거든.”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녹음은 잠시 끊겼다가 마지막 한 문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안하다. 너한테 말하지 못한 가장 큰 사실이 하나 있어. 그 아이의 이름은…….”
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바르트가 급히 압력계를 확인했다. 설비는 고장 나지 않았다. 소리는 같은 간격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만 이름이 나와야 하는 부분만 완벽한 침묵이었다. 마레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워진 거예요.”
“아니요.” 민규가 말했다. “애초에 그 이름을 이 관에 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은시계가 작은 글씨를 보여 주었다.
[원본 기록의 인명 접근 제한. 수취인은 물건을 우선 확인하시오.]
목소리를 열쇠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 만약 관측 통로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 열었다면 원본실은 또 다른 사람을 대체 근무자로 등록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목소리 속에 분명한 단서가 남아 있었다. 높은 문이 아니라 낮은 곳. 물이 나오는 곳. 그리고 이름을 듣지 못한 아이.
민규는 관을 내려놓았다.
“찾아야 할 건 아이의 이름이 아니라 아이가 나올 수 있는 출구입니다.”
셀레나가 도면을 돌렸다. 지금까지 그들이 출구로 표시했던 곳은 전부 사람 키보다 높은 문이었다. 바닥의 배수구는 안전 설비로만 분류되어 있었다.
바르트가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요. 수로가 마을로 빠져나가기 전에 물이 잠깐 쉬었다 가는 공간이 있소. 오래전에 다 막힌 줄 알았는데, 요즘 그쪽 물빛만 달라졌지.”
하른은 동그라미를 보더니 굳어 버렸다.
“그곳을 압니다. 그 안에서 아이가 노래했어요. 매번 제가 교대할 때마다.”
“언제까지 노래했습니까?”
“한참 전부터 안 들렸습니다. 제가 목소리를 잃었는지, 아이가 그곳을 떠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민규는 그에게 어떤 약속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바르트에게 배수구의 바깥쪽만 조사할 수 있는지 물었다. 바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기 전이라면 물높이가 가장 낮아지는 시간을 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바르트가 보낸 첫 보고에는 물이 잦아든 바닥에 작은 발자국 여덟 개가 나타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학교 쪽이 아니라 마을 쪽이었다.
하지만 여덟 번째 발자국 바로 뒤에, 다른 발자국 하나가 있었다. 발크기는 어른 것이었고, 신발 밑창에는 오래된 한국 회사의 상표가 찍혀 있었다.
제34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