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아니라면 뭐가 대피해야 하는 거죠?”
루카는 두 번째로 물었다. 첫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방 아래의 유리창은 삼십 년 전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직원 한 명이 상자를 든 채 넘어졌고, 소녀가 환기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리 바깥의 현재와 안쪽의 과거는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이 닿지 않는 세계였다.
민규는 아이의 손목에 걸린 종이 별을 보았다. 루카가 갖고 다니는 종이 별과 모양이 조금 달랐다. 오래된 별은 꼭짓점 하나가 찢어져 있었고, 그 속에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루카, 누나가 별 접는 법을 언제 배웠다고 했지?”
“학교 공연 준비할 때요. 미라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런 별을 접었어요.”
“저 안은 삼십 년 전입니다.” 셀레나가 말했다. “그때부터 같은 별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저 별의 접는 법이 이곳에서 전해졌거나요.”
민규는 순서를 억지로 확정하지 않았다. 시간과 기록이 뒤섞인 공간에서는 비슷하다는 사실만으로 원인을 결론 낼 수 없었다. 그는 관찰할 수 있는 것부터 적었다. 환기구를 향한 손, 찢어진 별, 어머니의 시선, 벽에 적힌 대피 대상의 구분.
에일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장치에는 두 종류의 대상이 있었어요. 사람과 ‘기록되지 않은 짐’.”
“왜 짐에 대피 경보가 필요했습니까?”
“사고 당시에는 몰랐어요. 저는 공기문 설계만 맡았거든요.”
그녀가 들고 있던 낡은 도면을 펴자 통로 단면에 아주 작은 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원래는 공기 여과망이 들어가야 할 위치였다. 그런데 수정 도면에는 사각형 대신 동그란 방이 생겨 있었다. 에일라는 그 부분을 세 번 지워 다시 그렸다.
“공간이 늘어난 게 아니에요. 기준이 바뀌어서 원래 없던 방이 있다고 판단된 거죠.”
“무슨 뜻이죠?”
“사람이 통로를 통과한 흔적을 기록하는 방입니다. 그런데 기록 대상이 없으면 그 흔적을 버리게 되어 있어요.”
민규는 정비 수첩 한 페이지를 떼어 바닥에 놓았다. 신발 바닥에 묻은 흙을 찍고 종이를 들어 보였다.
“사람이 없는데 발자국만 남으면 장치는 발자국을 어떻게 처리합니까?”
“소속된 이름을 찾겠죠.”
“못 찾으면?”
“가장 가까운 이름을 빌려 와요.”
셀레나는 말을 끝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은 지금까지 사람을 지운 원인이 잘못된 명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부는 결과물일 뿐일 수도 있었다.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는 장치가 사람에게 억지로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시간이 꼬였다면,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은시계가 떨렸다.
[최초 경보 원문 저장 위치: 미등록 대상 보관함.]
“이름부터 바꾸지 말고, 보관함이 뭘 보관하는지 보라는 건가.” 민규는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무전이 왔다. 오르반은 학생 전원을 운동장으로 대피시켰지만, 두 학생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아이들의 몸은 움직이는데 그림자는 교실 쪽으로 길게 붙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합니까?” 셀레나가 물었다.
“억지로 떼어내지 마세요. 해가 뜨기 전까지 길고 좁은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명을 옮기십시오.” 민규가 말했다. “그림자 자체가 길을 찾으려고 하는지 관찰하고요.”
“그렇게 쉬운 방법으로 될까?” 오르반이 반문했다.
“어렵게 해도 되지만 아이들부터 안전해야 합니다.”
잠시 후 운동장에 설치된 이동 조명이 켜지자 그림자들이 짧아졌다. 이상 현상은 끝나지 않았으나 아이들은 더는 뒤로 잡아당겨지지 않았다. 오르반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조명 담당 교사를 두 명씩 묶었다.
그때 학교 보건실에서 예상하지 못한 보고가 왔다. 그림자가 길게 남았던 학생 중 한 명이 자기 교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그림자가 자기를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교사는 마법으로 그림자를 없애려고 했지만, 아이가 더 크게 울자 마레에게 연락했다.
민규는 보건실까지 직접 갈 수 없었다. 대신 아이에게 무엇이 보이는지 묻되 정답을 가르치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름이 찍힌 명찰을 벗겨 놓고, 아이가 편한 자리에서 이야기하도록 하라고 했다. 몇 분 뒤 마레가 무전으로 아이의 설명을 전했다.
“그림자가 가리키는 곳은 교실이 아니래요. 교실 바닥 아래를 가리킨대요. 그런데 교사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수업에 돌아가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아이가 설명한 방향을 관측자 두 명이 따로 기록해 주세요. 수업 복귀는 나중 일입니다.”
교사는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다. 반나절이나 수업을 비운 학생을 또 쉬게 하는 것이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림자가 가리킨 방향을 지도에 올려 보니 놀랍게도 제방 배수로와 연결돼 있었다. 학교 안에 숨어 있는 통로의 위치를 아이의 그림자가 먼저 알아낸 것 같았다.
마레는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아이는 자신이 이상한 걸 봐서 벌을 받을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자신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천장에서 달린 이름표가 수업 시간에 하나씩 바뀌고, 선생님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꿈이었다.
“그것도 기록할까요?” 마레가 물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함께 적으면 됩니다. 본 것과 꿈꾼 것을 섞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요.”
셀레나는 무전기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마법학 교수들은 오랫동안 학생들의 비정상적인 경험을 ‘교실 집중 방해’로 분류해 왔다. 그러나 제방에서 발견되는 기록 오류와 학생들이 경험한 이상 현상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들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학교 뒤뜰에서는 바닥 아래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올라왔다. 학생들은 처음에 도망치려 했지만 루카가 손으로 정지 신호를 보내자 서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누군가 놀라 넘어지지 않도록 사람 사이를 넓히고, 그다음 교사들이 출입구를 하나씩 점검했다. 세 번의 짧은 두드림과 두 번의 긴 두드림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들려왔고, 그 신호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르반은 제방에 연락했다. “학교 아래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린다. 마치 누군가 오래전에 하려던 말을 다시 시작한 것 같아.”
민규는 경보 원문에 적힌 ‘대피 대상’이라는 단어를 동그라미 쳤다. 이 소리들은 사람들을 쫓기 위한 경고가 아니라, 갇힌 사람이 발견됐음을 알려 주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아직 결정할 수 없는 가설이었다. 그러나 학교의 바닥과 마을의 수로를 연결하는 지도가 하나 더 생겼다.
한편 서기관은 그림자 이상 현상이 모두 학생 명부에 잘못된 이름이 등록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건실 학생의 기록을 가져오라고 요구했지만 마레는 거절했다. 해당 학생이 현재 안전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과 진술의 방향만 전달하겠다고 했다.
“그 학생의 이름을 알아야 오류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이 말했다.
“학생 본인이 동의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오류는 남을 겁니다.”
“오류를 지우려고 사람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마레는 전화를 끊은 뒤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늘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만 생각했지만, 누구의 몸과 기억을 문서에 적어 넘기는지도 중요한 치료의 일부였다. 민규가 그 보고를 들었을 때 이미 교사 둘이 기록 보관 규칙을 바꿔 달라고 요청한 상태였다.
학교에 새로 설치한 안내문에는 이름을 적는 칸이 없었다. 보건실을 찾아온 학생들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좋은 집안의 학생임을 증명하면 더 빨리 진료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아이는 기숙사 배정 명단에서 지워질까 봐 진료 신청조차 망설였다. 마레는 한 사람씩 이유를 설명했다. 응급 상황에서는 먼저 상태를 확인하고, 보호자가 필요한 경우에는 당사자의 안전을 위해 연락한다. 그 과정에서 굳이 모든 사람 앞에 개인 기록을 펼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변화에 반대하는 교수도 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인 척 보건실에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마레는 문 앞에서 이름을 외우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칭을 막을 수 없다고 답했다. 대신 한 사람의 진술, 동행자의 확인, 실제 상태를 따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전을 위해 만든 절차가 치료받아야 할 사람을 쫓아내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날 학생회는 자발적으로 운동장에 큰 종이를 붙였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구체적으로 설명하되, 이해하지 못했다고 친구를 놀리지 말 것.]
루카는 그 종이에 작은 그림을 그렸다. 출입문과 사람을 따로 그린 그림이었다. 누군가 이름을 잘못 적었어도 문 앞에 사람은 서 있다는 뜻이었다. 학교 학생들은 그림을 보고 처음에는 웃었지만, 곧 한 명씩 자기 의견을 적었다. 문에 이름이 없어서 돌려보내진 적이 있다고 쓴 학생도 있었다. 민규는 그 글을 읽으며 앞으로 복구해야 할 것이 기계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학교 아래에서 올라온 미세한 두드림은 저녁이 되자 잠잠해졌다. 하지만 학생회는 그 소리를 들은 시각과 장소를 남겼다. 한 사람의 이상한 경험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다. 민규는 그 기록의 사본을 제방 수첩에 붙였다. 하필 장부 바깥에만 존재한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지켜 주고 있었다.
제방 통로에서는 에일라가 여과망을 분리하고 있었다. 안쪽에서 오래된 천 조각이 나왔다. 붉은 실로 꿰맨 주머니였다. 주머니에는 작은 금속표가 매달려 있었다.
[보관 대상: 소지품. 수량: 29. 이름 없음.]
하른이 갑자기 금속표를 알아봤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저 숫자를 세라고 했어요. 사람 수가 아니라, 남겨진 소지품 수를.”
“누가 시켰습니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문이 닫힐 때마다 주머니가 하나씩 늘어났어요. 그래서 스물아홉이 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 숫자를 실종자의 수라고 믿었죠.”
민규는 주머니를 함부로 열지 않았다. 내용물이 사람과 이어진 흔적일 수 있다면 검사 순서를 지켜야 했다. 그는 루카에게 빈 상자 두 개를 가져오라고 했다. 하나는 옮길 물건, 다른 하나는 움직이면 안 되는 물건. 서기관이 나타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관함은 허가된 관리자만 열 수 있습니다.”
“관리자가 없으면 아무도 소지품을 돌려받지 못합니까?”
“소지품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먼저 누가 잃어버렸는지 물으면 됩니다.”
“답이 없으면요?”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도 관리입니다.”
서기관의 표정에서 잠깐 혼란이 스쳤다. 누군가의 이름을 당장 붙이지 않은 채 보관한다는 절차는 그의 규정집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열린 관측창 안에서 어린 민규는 어머니가 건넨 천 주머니를 받았다. 어머니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가 머뭇거리자, 어머니는 손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 뒤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민규는 그 동작을 보자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잠깐 생각하고 답해도 돼.’ 어머니가 그에게 말을 재촉하지 않을 때 하던 버릇이었다.
그 순간 현재의 제방에도 똑같은 두 번의 두드림이 들렸다. 보관 주머니 안쪽에서였다.
루카가 뒤로 물러났다.
“안에 누가 있어요?”
“소지품에 소리가 기록될 수 있지.” 셀레나가 말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건 아닐 거야.”
그러나 민규는 그 말만으로 안심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 귀를 대지 않고 얇은 종이 한 장을 올렸다. 안쪽에서 무언가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종이가 조금씩 들렸다. 세 번, 멈춤, 두 번. 조합 시계에 표시된 경보 코드와 달랐다.
에일라가 비로소 알아차렸다.
“삼십 년 전 정비자들이 쓰던 구조 신호예요. 세 번은 ‘사람 발견’, 두 번은 ‘통로 확인 요청’.”
“그럼 경보가 학생을 대피시키려던 게 아니라—”
“학생들이 발견한 누군가를 꺼내려던 걸 수도 있죠.”
민규는 천 주머니를 두 손으로 들었다.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이번에는 금속표 뒤에 접혀 있던 아주 작은 종이가 미끄러져 나왔다.
[대피 명령 원문: 발견된 아이의 이름을 묻지 말 것. 먼저 출구를 만들 것.]
서기관이 문구를 읽자 외투의 잉크 자국이 검게 번졌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름을 모르면 출구를 배정할 수 없는데.”
민규는 수첩을 덮었다.
“그러니까 출구를 배정하는 방식을 잘못 만든 겁니다.”
창 안의 어린 민규가 손에 든 금속표를 들어 올렸다. 현재의 민규가 든 것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소년의 등 뒤로 다가왔다. 길게 늘어난 모자 챙, 색이 바랜 제복, 삼십 년 동안 닳은 장갑.
어린 민규의 입이 움직였다.
‘저 아저씨, 아직 퇴근 못 했어.’
하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 손목의 근무 횟수가 스스로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수십 년을 건너, 가장 오래된 한 번의 교대가 돌아오고 있었다.
제3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