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실에 들어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민규는 계획서 첫 줄에 그렇게 썼다.
[목표: 기록 원본실의 무인 접근 시험. 주민 주소 복구. 남은 피난 인원 안전 확보.]
그 아래에는 하지 않을 일을 적었다. 출입문을 억지로 열지 않을 것, 교대 근무자로 새로운 사람을 등록하지 않을 것, 실종자의 이름을 본인 동의 없이 외부 명부에 공개하지 않을 것.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낼지가 아니라 무엇을 대가로 내주지 않을지였다.
셀레나는 작업 계획을 받아 들고 한숨을 쉬었다.
“보통 마법사가 세계를 구한다고 하면 화려한 대마법부터 떠올리잖아요.”
“경비원이 하는 일은 대개 좀 덜 화려합니다.”
“그러네요. 오늘은 빈 종이부터 보내야 하니까.”
루카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학교 안에 오랜만에 평범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작업은 마을 북문, 제분소, 시계탑, 조합 건물 네 곳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바르트는 제분소 터빈을 비상 압력 해소용으로 연결했고, 경비대장은 주민들이 다니는 길에 임시 주소 표지를 설치했다. 하른은 자신의 기억을 이용해 조합 건물 내부의 낡은 동선을 확인했다. 오르반은 학생회와 교직원에게 수업을 중단하되 불필요한 공포를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학교가 사라지는 겁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아니. 고장 난 설비를 고치는 거야.” 루카가 대답했다. “무섭다고 해도 괜찮아. 혼자 남지만 마.”
민규는 그 말을 듣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 처음 만났을 때 문제아라 불리던 학생은 이제 다른 학생들이 안전하게 움직이도록 돕고 있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날 오후, 학교 운동장에서는 피난 연습이 있었다. 학생들이 아무런 주문도 사용하지 않고 기숙사에서 운동장까지 걷는 연습이었다. 떠다니는 계단이 멈추거나 마법문이 다른 곳으로 열려도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했다. 교사들은 처음에는 불편해했다. 당연히 가능하던 일을 굳이 손으로 확인하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연습부터 문제가 드러났다. 북쪽 계단은 사람이 많으면 갑자기 폭이 줄어들었고, 서쪽 비상문은 안쪽에서 열리는 손잡이가 장식에 가려져 있었다. 한 학생은 어둠 속에서 문이 보이지 않자 울음을 터뜨렸다. 루카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고 손전등 빛이 닿는 자리에서 기다렸다.
“무서우면 내 뒤에 있어. 근데 내가 달릴 때도 따라 달리진 마. 천천히 같이 가.”
민규는 사고 기록에 계단의 길이가 변하는 조건을 적었다. 그날 당장 계단 전체를 고칠 수는 없었다. 대신 한 번에 지날 수 있는 인원을 줄이고 다른 출구를 임시로 열었다. 학교의 마법은 강력했지만 구조 과정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확인된 통로였다.
바르트는 제분소 터빈을 시험 운전하면서 오래된 철판이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무게를 달아 보니 한쪽 날개가 다른 쪽보다 조금 무거웠다. 절연 분말이 눌어붙은 탓이었다. 그는 밤 작업을 중단하고 축을 다시 닦았다.
“다들 서두르는데 이런 일 때문에 늦추면 욕을 먹을 줄 알았소.”
“욕은 나중에 들어도 됩니다. 축이 부러지면 사람이 다치니까요.”
바르트는 피식 웃더니 철판을 한 번 더 점검했다. 그가 제분소를 지키던 삼십 년 동안 누구도 이 고철을 다시 쓰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은 물레방아뿐 아니라 누군가의 귀환을 지킬 장치가 됐다.
북문에서 경비대장은 주민 대표들과 회의를 열었다. 임시 주소 표지를 붙이는 일에는 동의가 있었지만 일부 주민은 자기 집이 지하 기록과 연결됐다는 사실 자체를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집값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삼십 년 전 사고의 책임이 자기 가족에게 돌아올까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규는 모든 집의 사정을 공개하자는 제안에 반대했다. 주소 복구에는 당사자의 확인과 두 사람의 증언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곧 주민의 과거를 마을 전체에 공개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각 집 앞에 정정 완료 여부만 알리는 표지를 두자고 했다. 다른 자료는 주민과 지정된 점검자만 보관하기로 했다.
“사람을 보호하자는 일 때문에 또 다른 불안을 만들면 안 됩니다.”
가게 주인 하나가 물었다.
“그럼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이웃이 알아야 도와주지 않겠소?”
“도움이 필요한 사실과 모든 사정이 공개되어야 한다는 건 다릅니다. 대피가 필요한 때는 빠르게 알리되, 개인 기록을 팔거나 구경거리로 만들지는 맙시다.”
주민들은 논쟁 끝에 그 방식에 동의했다. 일부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의 뜻을 묻는 절차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마을은 삼십 년 전의 피난 체계와 달라지고 있었다.
에일라는 조합 건물의 낡은 통로에 작은 금속 종을 걸었다. 그것은 새 마법 장치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소리 신호기였다. 통로 안의 압력이 일정 수치를 넘으면 공기가 지나며 종이 울렸다. 민규는 기계식 경보가 마음에 들었다. 마법 기록이 고장 나도 소리는 났기 때문이다.
“삼십 년 전에도 이 종이 있었습니까?”
“있었죠. 하지만 마지막 공사에서 빼 버렸어요. 종소리가 시끄럽다고요.”
“이젠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군요.”
에일라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제방 건너편, 오래된 공동 피난로가 향한 숲 쪽이었다.
“그때 저는 감리인으로서 철거를 반대했어요. 그런데 서류에 서명만 하고 현장을 떠났죠. 사고가 난 뒤부터 생각했어요. 서명은 남았지만 사람이 남지 않았다고.”
민규는 그녀에게 쉬운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무엇을 했는지와 앞으로 무엇을 할지가 모두 중요했다.
“이번에는 종을 설치했네요.”
“네. 그리고 사람들이 직접 들을 수 있도록 바깥에 달았어요.”
하른은 시험 종이 울리자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수만 번의 교대 명령이 한 번에 돌아오는 듯했다. 마레는 그를 보건실로 데려가려 했지만 하른이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누가 시켜서 울리는 종이 아니군요.”
“맞습니다.” 민규가 대답했다. “통로의 압력을 알려 주는 종입니다. 당신을 부르는 게 아니에요.”
하른은 한참 뒤 귀를 감싼 손을 내렸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종소리는 조금 더 울리다 저절로 멈췄다. 그는 자신이 아직 그곳에 서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자정이 조금 지나자 에일라가 조합 앞에 나타났다. 민규는 그녀를 무조건 믿지 않기로 했지만, 위험을 알고 있는 사람의 조언까지 버릴 이유는 없었다. 그는 에일라에게 관측 절차를 설명하고 동의할 수 있는 범위만 알려 달라고 했다.
“첫 번째 백지는 어떻게 보내십니까?”
“출구에 넣어 둔 금속관을 이용합니다. 사람은 안 들어갑니다.”
“돌아오지 않으면요?”
“회수하지 않고 다른 관측 방법을 찾습니다.”
에일라는 짧게 웃었다.
“베르안도 비슷한 말을 했죠. 그런데 아무도 듣지 않았어요.”
“오늘은 들을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백지가 관으로 들어갔다. 약속한 일 분이 지나자 종이는 돌아왔고,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신고자 미확인. 관리자 지정 보류.]
두 번째 종이에는 별과 물방울 도장을 찍었다. 종이는 조금 늦게 돌아왔다.
[복수 목격자 확인. 관리자 지정 불필요.]
세 번째 종이에는 실종자 명부를 직접 적지 않았다. 대신 현재 구출된 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인 세 명이 확인한 표시만 남겼다. 안쪽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하른의 손목 숫자가 떨렸지만 새 교대자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안정적이에요.” 셀레나가 말했다.
“아직 세 번째 시험뿐입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압력을 다시 확인하죠.”
바르트는 수로의 수치가 안전하다고 보고했다. 민규는 제분소와 조합의 압력계가 같은 수치를 보여 주는지 대조한 뒤, 종이 한 장을 더 보냈다.
네 번째 종이에는 주민의 주소 정정 신청서가 들어 있었다. 주민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고 본인이 직접 그린 집의 위치와 두 명의 증인 도장만 있었다. 십 초쯤 지나 종이가 돌아왔다.
[주소 확인 완료. 자동 이전 취소.]
마을 저편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길을 잘못 찾던 주민이 자기 집 현관을 다시 찾은 것이다. 바르트는 부인을 껴안았고 경비대장은 즉시 다른 주민들의 주소도 하나씩 확인했다. 모든 집이 동시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복구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다.
그때 조합 건물 아래에서 붉은 빛이 올라왔다.
[경고. 관리자 부재 상태에서 기록 변경 실행.]
서기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런 절차는 허가된 적이 없습니다.”
“원본실이 허용했습니다.” 셀레나가 대답했다.
“원본실은 사람의 허가 없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민규는 관측 종이를 보여 주었다.
“그 규정이 잘못된 겁니다. 기록을 확인하는 것과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다른 일이에요.”
서기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외투는 예전보다 닳아 있었고 흰 장갑에도 잉크 얼룩이 번졌다. 얼굴은 종이 조각처럼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해야 할 업무를 믿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저의 직무는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문을 누가 닫습니까?”
“문을 닫는 건 안전 장치입니다. 당신은 기록을 관리하는 사람이고요.”
“저는 삼십 년 동안 기록을 지켰습니다.”
“그동안 사람은 기록 때문에 갇혔죠.”
서기관은 입을 다물었다. 민규는 그를 없애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래된 설비의 기능을 바꿀 방법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문제를 만든 기록 관리자라도 자신이 지켜 온 규칙과 다른 가능성을 직접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 네 번째 종이를 보십시오.”
서기관이 종이를 보자 붉은 글씨가 잠깐 흔들렸다.
[주소 확인 완료. 자동 이전 취소.]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사자가 그린 집과 두 명의 증인만으로도 주소를 확인할 수 있어요.”
“대체 근무자를 등록하지 않았는데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조합 지하에서 무거운 쇳소리가 났다. 다섯 번째 통로가 열린 것이다. 이번에는 학교 방향이 아니라 마을 북쪽의 오래된 제방으로 길이 이어졌다. 문 너머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야.”
루카가 숨을 삼켰다. 모두가 그를 바라봤지만 누구도 앞으로 밀지 않았다. 루카는 손에 든 종이 별을 펼쳤다.
“누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아직 문을 열면 안 돼.”
민규는 즉시 새로 열린 통로 앞에 안전줄을 걸었다. 제방 쪽 압력계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셀레나는 마나 흐름을 분리해 통로가 닫히지 않도록 최소한의 관측 마법만 걸었다.
“미라, 제 목소리 들립니까?” 민규가 말했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대답이 돌아왔다.
“들려요. 하지만 당신이 누구인지는 여기에서 말하지 마세요.”
“그 이유를 알려 주겠습니까?”
“문 아래에는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지금도 첫 번째 경보를 기다리고 있어요.”
에일라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경보는 이미 삼십 년 전에 울렸어요.”
“아니에요.” 미라가 말했다. “그쪽에서는 울렸겠죠. 하지만 이쪽에서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어요.”
멀리 학교 시계탑의 초침이 멎었다. 새벽 두 시 십칠 분까지는 아직 여섯 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제방 아래의 오래된 경보 장치는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대피 경보 준비.]
민규는 시계를 보았다. 이번에는 바늘이 거꾸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멈춰 있었던 다른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합 건물 벽에 걸린 오래된 원형 시계였다.
시계 아래에 새 글씨가 나타났다.
[최초 사고 발생까지 00:05:59.]
루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그러면 삼십 년 전 사고가… 아직 안 끝난 거예요?”
민규는 대답 대신 관측표를 들었다. 이미 돌아온 주민들의 주소, 구조된 소년, 하른이 되찾은 한 번의 근무. 그들은 분명히 바깥의 오늘을 바꿨다. 하지만 안쪽에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과거가 남아 있었다.
“끝난 부분이 있고, 시작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거겠지.”
그가 낮게 말했다.
“이제는 둘을 혼동하면 안 돼.”
바로 그때 통로 아래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어였다.
“엄마, 민규 형이 손잡으래.”
민규의 손이 멈췄다. 그 목소리 뒤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민규야, 이번에는 네가 먼저 나오지 마.”
학교 시계가 두 번째로 움직였다. 민규는 젖은 철제 문에 손을 얹지 않았다. 그저 무전기를 들고 모든 점검자에게 또렷하게 말했다.
“전원, 현재 위치 보고하세요. 곧 첫 번째 경보가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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