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가 보낸 편지에 적힌 ‘정민규’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만 하루가 걸렸다. 루카는 처음에 북문에서 돌아온 하른을 떠올렸다. 민규는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른은 기억이 불안정했고, 그에게 묻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사실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민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지하에 내려갔다는 사실은 적혔어요. 누군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셀레나는 미라의 편지를 다시 펼쳤다.
“정민규 씨가 삼십 년 전에 들어간 아이였을 수도 있죠.”
“그렇다면 미라가 본 사람은 지금의 저와 나이가 달랐겠군요.”
“시간이 뒤틀리는 공간이니까요.”
민규는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곳에서 ‘시간이 뒤틀리니까 뭐든 가능하다’는 설명은 지나치게 편리했다. 증명해야 할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먼저 지도에 표시된 제2출구를 점검하기로 했다. 출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루카의 누나를 포함해 안쪽에 남은 사람들과 연락할 길이 늘어날 수 있었다. 반면 열세 번째 문처럼 기억을 이용해 사람을 끌어들이는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다.
제분소에서 돌다리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오래된 석축 사이에 억센 풀들이 자랐고, 축축한 돌은 마른 돌보다 훨씬 미끄러웠다. 바르트는 그곳을 지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말했다. 삼십 년 전 홍수 때 물살에 휩쓸린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규는 우회로를 선택했다. 지도상으로는 다섯 분이면 되는 거리였지만 실제로는 스무 분이 걸렸다. 그래도 서둘러 길을 줄일 이유가 없었다.
출구 앞에는 삼십 년 전에 세운 안내판이 쓰러져 있었다. 루카가 그것을 일으키자 옛 글씨가 드러났다.
[이동이 어려운 어린이는 손을 잡고 이동하십시오. 대피 과정에서 서로를 잃어버렸을 경우 마지막 안전 표지에서 기다리십시오.]
루카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문장이 어딘가 낯설었다. 지금 학교의 안내판에는 '허가받지 않은 사람 출입 금지' 같은 말만 큼직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엔 이런 걸 써 놨네요. 기다려 달라고.”
“그때는 이 통로를 열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던 거겠지.” 민규가 답했다.
하른은 안내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손목에 희미한 숫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레가 안정을 취하라고 했지만 하른은 여기까지 함께 오겠다고 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모든 현장 접근을 막는 것도 그의 의사를 무시하는 일이었다. 민규는 대신 책임을 분리했다. 위험 판단과 설비 조작은 자신과 셀레나가 맡고, 하른은 기억나는 위치를 말하되 언제든 중단할 수 있게 했다.
“저 다리의 세 번째 돌 밑에 오래된 줄이 있었습니다.” 하른이 말했다.
바르트가 돌을 살피자 정말로 굵은 밧줄 끝이 나왔다. 물에 젖었다 말라붙은 탓에 손대면 가루가 부서졌다. 줄은 안전장비로 쓸 수 없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어디에 서서 이동했는지는 알려 줬다. 민규는 새 줄을 다른 위치에 설치하고 낡은 줄에는 접근 금지 표식을 세웠다.
“기억이 맞았군요.”
하른은 웃지 못했다.
“다른 것도 기억나서요. 제 뒤에서 우는 아이가 있었어요. 어른들은 다리 끝으로 뛰어가고 있었는데, 저는 그 아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이름을 묻자 제가 제 이름을 내밀었던 것 같아요.”
“내밀었다는 게 무슨 뜻이죠?”
“종이에 썼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장부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모르겠어요.”
민규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수첩에 옮겼다. 하른에게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따지지 않았다. 사람이 오래 갇혀 있었던 기억은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기억의 틈을 핑계로 거짓 확신을 만들지 않도록 서로 돕는 일이었다.
수로 안쪽을 조사하는 도중 셀레나의 관측 마법이 갑자기 끊어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더 큰 주문을 준비했다. 그러나 민규가 손전등을 비춰 보니 관측 수정 아래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법진의 바깥쪽 선이 물기 때문에 번져 버린 것이다.
“마법이 아니라 설치 위치 문제일 수도 있어요. 잠깐 말려 보고 다시 시험해 봅시다.”
셀레나는 젖은 수정을 바꿔 끼우고 작은 주문만 걸었다. 그제야 관측선이 안정됐다. 루카가 놀라워했다.
“이 정도 마법진은 교수님이 눈 감고도 그리는데요.”
“그래서 더 당황한 거야.” 셀레나가 말했다. “복잡한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물이 들어왔잖아.”
민규는 웃었다.
“기계도 똑같습니다. 제일 비싼 부품을 바꾸고 나서야 콘센트가 빠진 걸 발견하는 경우가 많죠.”
그들은 도면을 다시 펼쳤다. 물이 흘러가는 관은 두 개였다. 굵은 관 하나는 제분소 수차 아래로 이어졌고, 가는 관 하나는 아무 표지 없이 학교 방향으로 사라졌다. 바르트는 가는 관을 보자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는 듯 이마를 쳤다. 과거 홍수 때 비상 경보를 종탑에 알리는 압력 신호관이었다고 했다. 민규는 그 가는 관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연결 관계를 모른 채 절단했다면 경보 자체를 잃었을 수 있었다.
하른은 다리 아래의 붉은 자갈 몇 개를 들어 놓았다.
“이건 누군가 길을 표시할 때 쓰던 돌입니다. 세 개씩 모으면 안전한 방향을 가리켰어요.”
민규는 자갈의 위치를 그림으로 남겼다. 같은 표식이 지난번 0층 입구에도 있었다. 두 시설이 원래 하나의 피난망으로 설계됐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표식 일부는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 있었다. 최근 누군가 자갈을 옮긴 듯 흙의 색이 달랐다.
“길을 안내하던 표시가 잘못되어 있군요.” 셀레나가 말했다.
“의도적으로 바꿨는지, 물에 떠내려왔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우선 원래 도면과 맞는 곳에만 새 표식을 세우죠.”
루카는 자기 공책을 뜯어 작은 표를 만들었다. 왼쪽에는 확인한 사실, 오른쪽에는 아직 모르는 일을 적었다. '물 압력이 낮다'는 왼쪽에, '문을 열어도 사람을 지우지 않는다'는 오른쪽에 넣었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 오른쪽 마지막 줄에 썼다.
[누나는 오늘도 살아 있다.]
민규는 그 문장을 보고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루카가 직접 선을 하나 더 긋고 밑에 다른 문장을 쓰는 것을 기다렸다.
[누나와 연락할 방법이 있다. 확인했다.]
“이건 왼쪽에 써도 되죠?” 루카가 물었다.
“그래. 직접 받은 답장이 있으니까.”
그 작은 구분이 루카의 얼굴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조금 덜어 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절망과, 몇 가지를 분명히 안다는 희망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비상 통로는 오래된 수로 아래로 이어졌다. 입구는 제분소에서 마차 한 대쯤 떨어진 돌다리 밑이었다. 비가 오면 강물이 넘쳐 평소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민규는 먼저 수위를 확인했다. 폭우는 없었지만 상류의 제방은 오래돼 언제 물이 불어날지 몰랐다. 마을 경비대가 상류와 하류에 각각 감시자를 세웠다. 급작스러운 수위 변화에 대비해 비상 신호도 정했다.
“오늘은 비가 안 오잖아요.” 루카가 말했다.
“여기 물은 위에서 내려와. 여기 하늘이 맑아도 윗마을에서 비가 오면 위험해.”
민규는 그렇게 말하며 발밑의 흙을 밟아 봤다. 물이 스며든 흔적이 고르지 않았다. 수로 한쪽이 막혔거나 안쪽에서 물을 역류시키고 있었다.
셀레나는 마법으로 벽의 틈을 살폈다. 차가운 빛이 아래로 흘러 작은 문양을 드러냈다.
[공동 피난로 제2출구 / 정상 수압에서만 개방]
문제는 정상 수압의 기준이었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통로 안쪽 압력계는 위험을 가리켰다. 마나가 섞인 압력과 실제 물의 압력이 한 장치에 함께 기록되고 있었다.
“저걸 그대로 믿고 문을 열면 물이 쏟아지겠네요.”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측정 장치를 나눠야 합니다.”
민규는 배수관의 점검용 마개에서 작은 물 한 컵 분량을 받아냈다. 셀레나는 별도의 측정 주문을 걸어 마나 농도를 확인했고 바르트는 압력계의 낡은 바늘을 점검했다. 세 수치를 비교한 결과가 흥미로웠다. 물 압력은 높지 않았다. 압력계만 과장된 값을 표시하고 있었다.
“고장입니까?” 바르트가 물었다.
“센서가 서로 다른 대상을 한 번에 읽고 있어요. 오래된 장치가 흔히 겪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만 믿으면 안 되죠.”
민규는 수로 뒤편에 있던 작은 정비함을 열었다. 안에는 구리 도선, 오래된 패킹, 그리고 삼십 년 전의 작업표가 있었다. 작업표에는 베르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로 그 설계 변경 요청서를 남겼던 기술자였다.
[정상 수압과 기록 압력을 분리할 것. 대피 인원 검지 장치를 순수 수로 압력계에 직결하지 말 것.]
그리고 익숙한 붉은 도장이 있었다.
[비용 과다. 차기 분기에 처리.]
바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사람은 어디를 가도 같은 말만 들었구만.”
“고쳐야 할 걸 고치지 않으면 값이 더 커집니다.” 민규가 말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고요.”
그들은 기존 장치를 바로 떼어내지 않았다. 망가진 센서라도 내부 구조에 연결돼 있다면 제거하는 순간 다른 오작동이 생길 수 있었다. 민규는 우회 감지관을 만들고 셀레나에게 단순한 마나 차단막만 부탁했다. 루카는 번호표와 밸브 순서를 큰 글씨로 적었다.
첫 시험은 사람이 통과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했다. 비어 있는 금속 용기를 바닥에 밀어 넣자 두 개의 압력계 중 하나가 오르내렸다. 용기가 안쪽 문턱을 넘어갔다 돌아오는 동안 외부 압력은 안정적이었다.
두 번째 시험에서는 마법이 걸리지 않은 종이 뭉치를 보냈다. 종이는 반대편에서 그대로 돌아왔다. 종이에 적힌 숫자도 지워지지 않았다.
세 번째 시험이 시작되려는 순간 하른이 멀리서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저 길을 지나면 누군가가 다시 출근해야 합니다!”
민규는 즉시 작업을 중단했다. 하른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그가 오른손을 펼치자 손목의 근무표가 진하게 떠올랐다.
[제2출구 운행 승인 / 인계자: 정민규]
“누가 승인했습니까?”
“제가 아니라 장부가요. 저 문이 열릴 때마다 교대를 처리한대요.”
셀레나는 손을 뻗어 마나선을 확인했다. 제2출구가 열린 순간 누군가의 근무 기록이 공백으로 바뀌는 구조였다. 피난로가 사람을 살리는 대신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일단 멈춘 거예요.” 민규가 말했다.
루카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누나는 못 나오는 거예요?”
“아니. 정상 작동 방법을 다시 찾아야 해.”
민규는 설치한 우회 감지관과 원래의 교대 장치를 한참 살폈다. 두 장치는 같은 나사를 이용해 고정돼 있었지만 배관은 달랐다. 결합된 것이 아니라 함께 묶여 있었다. 나사를 해체하면 물리적 환기 기능을 남기고 사람의 근무시간을 계산하는 기능만 분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제2출구의 목적은 사람을 바깥으로 보내는 것이지, 누군가를 새로 고용하는 게 아닙니다.”
셀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교대 장치 쪽의 마나만 끊을게요.”
“실제 문 움직임은 수동으로 시험합니다.”
해가 진 뒤에야 작은 문이 열렸다. 통로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나왔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겉면에 삼십 년 전 학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대피소 물품 / 제1차 출구 시험용]
민규는 상자를 바로 열지 않았다. 마을 감시자와 하른, 셀레나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봉인 상태를 확인한 뒤 뚜껑을 들었다. 안에는 어린아이용 장갑 스물아홉 켤레가 들어 있었다. 한 켤레만 손목 부분이 잘려 있었다.
루카는 장갑 수를 세어 봤다.
“스물아홉.”
“처음 대피 인원과 같군.”
상자의 바닥에는 낯익은 필체로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사람을 먼저 세지 말고, 손잡은 사람부터 확인할 것.]
어머니의 글씨였다. 민규는 손바닥으로 상자 모서리를 짚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삼십 년 전 사건 속에서 어머니는 자꾸만 나타났다. 그때 상자 밑판이 가볍게 흔들렸다. 민규가 확인하자 이중 바닥에서 낡은 금속 열쇠가 하나 나왔다.
열쇠에는 번호 대신 짧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
[교대하지 않는 출구.]
루카는 장갑 상자의 뚜껑을 닫기 전에 스물아홉 켤레를 다시 세었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손목이 잘린 한 켤레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 상자 옆에 내려놓았다. 민규는 다른 장갑과 같은 칸에 넣어 주었다. 그 이유를 묻는 루카에게 말했다.
“이것도 누군가의 것이니까. 상태가 다르다고 빼놓을 이유는 없지.”
학교 종탑이 멀리서 울렸다. 아직 새벽 두 시 십칠 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른의 손목에 쓰인 근무 횟수는 하나 줄어 있었다.
[교대 10823회]
하른이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누군가 대신 일한 밤이… 하나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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