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정민규는 열세 번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골목에는 돌아갈 집을 찾지 못한 주민들이 서 있었고, 구조 작업에 사용한 임시 통로는 아직 철거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문 앞에서 개인적인 기억을 좇아 떠날 수는 없었다.
“음성의 출처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는 작은 녹음기를 꺼냈다. 학교에서 쓰는 마법 기록 구슬이 아니었다. 경비실 서랍에서 오래전에 찾은 태엽식 녹음 장치였다. 소리를 금속판에 홈으로 새기는 방식이라 마법 명부와 연결되지 않았다.
다시 들린 목소리는 짧았다.
“민규야, 문을 열기 전에….”
말끝은 종소리에 묻혔다. 태엽을 되감아 확인하자 음성이 조금 달라졌다. 어머니와 닮았지만 자음 끝이 기묘하게 붙었다. 두세 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억지로 맞춘 소리 같았다.
“아저씨 어머니 맞아요?” 루카가 물었다.
“모르겠어. 적어도 녹음만으로는 알 수 없어.”
“그러면 나중에 직접 들어가 볼 거예요?”
“나중에는 원인을 확인해야겠지. 하지만 열세 번째 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니야.”
셀레나는 문의 가장자리에 붙은 문양을 살폈다. 그것은 다른 열두 개의 통행문과 달랐다. 주소를 기준으로 연결되는 문이 아니라 특정한 목소리를 기준으로 열린 문이었다.
“저건 기억 호출 장치예요. 가장 강하게 반응할 대상을 불러서 사람을 안으로 유도하는 방식이죠.”
“설계상 구조용으로 쓰였습니까?”
“아이들이 길을 잃으면 보호자의 목소리를 듣고 대피소로 모이게 만든 장치가 있었다는 기록을 본 적 있어요.”
“그러면 기능을 악용하는 거군요.”
셋은 주민들이 모두 안전한 통로를 통해 이동한 뒤에야 골목을 폐쇄했다. 열세 번째 문은 사라졌지만 바닥에는 꽃 한 송이의 그림이 남았다. 말라붙은 국화였다.
학교로 돌아오자 보건실에서 루카를 찾는 연락이 와 있었다. 첫 번째로 구조된 소년이 잠에서 깨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루카는 걸음을 재촉하다가 민규 앞에서 멈췄다.
“아저씨, 누나 얘기 먼저 물어봐도 되죠?”
“물어볼 수는 있지. 대답할지는 그 아이가 결정하는 거야.”
보건실 문턱에서 루카는 평소처럼 무작정 뛰어 들어가려다 멈췄다. 마레가 며칠 전 알려 준 규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구조된 사람에게는 문이 열리는 소리도 위협처럼 들릴 수 있다. 그는 손가락으로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을 기다렸다.
“전에는 노크도 안 하더니?” 마레가 눈썹을 올렸다.
“전에는 제가 얼마나 시끄러운 줄 몰랐거든요.”
마레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구조된 소년은 커튼을 절반만 열어 놓고 있었다. 창밖 학생들이 마법 공을 던지는 모습이 궁금한 듯했지만, 복도에서 누군가 큰 소리를 내면 어깨부터 움츠렸다. 마레는 소년의 침대에 가는 종을 하나 걸어 두었다. 소년이 벨을 울리면 누구든 들어오기 전에 자신의 위치부터 알리기로 했다.
“밖이 무섭니?” 루카가 물었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밖이 무서운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게 한 번에 있다는 게 무서워. 아래에선 어제랑 오늘이 거의 같았거든. 문 열리는 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사람을 세는 소리. 그런데 여기선 누가 웃고, 밥 냄새가 나고, 계단마다 다른 발소리가 나.”
루카는 말을 고르느라 오랫동안 침묵했다. 누나를 찾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당장 묻고 싶었지만, 소년이 살아 돌아온 뒤 처음 느끼는 낯선 하루에 대해 말할 시간을 빼앗을 수 없었다.
“학교 급식에는 감자 수프가 나와.” 루카가 말했다. “맛은 없어.”
소년이 작게 웃었다.
“그런 게 먹고 싶어. 특별한 게 아니라 자꾸 나오는 거.”
마레는 수프를 가져올 때 빵을 조그맣게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소년은 삼십 년 전 대피소에서 서로 먹을 것을 나누던 습관 때문에 큰 덩어리를 받으면 절반을 남겨 뒀다. 밖에 나온 자신만 배불러져도 되는지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민규는 보건실 식량이 충분하다는 기록을 소년에게 보여 주었다. 종이에는 숫자보다 '오늘 먹을 몫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더 크게 쓰였다.
“여기서는 배고프다고 말해도 돼.” 루카가 말했다.
소년은 숟가락을 들다가 물었다.
“그럼 아래 아이들도 먹을 수 있어?”
민규는 즉답하지 않았다. 제분소를 통해 작은 상자를 보낸 시험은 성공했지만, 식량을 보내는 지속적인 경로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가능한 일과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일을 구분해 설명했다.
“먹을 것을 안전하게 내려보낼 통로를 만드는 중이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멈추지도 않을 거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는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뒤 소년은 자기 침대 밑에 있던 낡은 천을 꺼냈다. 동그란 실밥으로 조잡하게 꿰맨 이름표였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고 어린아이 손바닥 모양만 남아 있었다.
“누가 옷을 잃어버리면 이걸 달아 줬어. 우리는 자꾸 이름이 바뀌니까 손모양을 그렸어.”
민규는 손바닥의 선을 보았다. 이름을 지우는 기록망 안에서도 사람은 서로를 구별할 방법을 만들고 있었다. 한 사람이 옆 사람을 기억할 때는 거창한 마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손모양을 그린 사람은 누굴까?”
“잘 몰라. 처음에는 아주 어린 여자아이가 그렸다고 들었어. 어떤 날엔 나보다 키가 크고, 어떤 날엔 작았어. 그래도 항상 같은 실을 썼어.”
셀레나는 손모양 뒤의 매듭을 살펴보다가 안색이 바뀌었다. 은시계 속 소녀가 가진 손목 실과 닮은 매듭이었다. 민규는 즉시 같은 물건이라고 결론짓지 않았다. 대신 매듭의 끝이 반대로 감겨 있다는 것을 적어 두었다. 비슷한 물건이 두 곳에 있다는 사실과 같은 사람이 두 곳에 있다는 사실은 달랐다.
소년이 민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아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나요?”
“아니. 여기 네 자리와 안전은 이야기한 양으로 결정되지 않아.”
그 말을 듣고서야 소년은 수프 한 숟가락을 더 먹었다. 루카는 그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질문을 줄이는 일이 누군가를 돕는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다.
소년은 여전히 보건실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받은 옷이 몸에 맞지 않아 소매를 여러 번 접었다. 침대 곁에는 삼십 년 전 학교에서 쓰던 교과서가 놓여 있었다. 마레가 현재의 교과서와 혼동하지 않도록 따로 마련한 것이었다.
“루카라고 했지?” 소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응. 나한테 편지 준 사람을 알아?”
“이름은 잘 모르겠어. 우리 쪽에서 이름을 말하면 창문이 검게 변해. 그래서 종이에 그림을 그렸어.”
그가 조심스럽게 베개 밑에서 종이 별 하나를 꺼냈다. 낡은 천 조각으로 이어 붙인 작은 별이었다.
“이걸 너한테 주래. 동생이라면 알아볼 거라고 했어.”
루카는 별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별의 한쪽 끝은 어설프게 접혀 있었다. 어린 시절 미라가 루카에게 가르쳐 준 접기 방법이었다. 똑같이 접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친구가 많았지만, 마지막 모서리만은 늘 거꾸로 접었다. 루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맞아요.”
그는 별을 뜯어보려다 손을 멈췄다.
“안에 뭐가 있어요?”
소년이 끄덕였다.
“지도래. 그런데 종이를 펴면 어떤 문이 닫히기도 한다고 했어. 네가 아는 사람하고 같이 펴래.”
민규는 종이 별을 가운데 놓고 네 사람이 서로 볼 수 있는 책상을 골랐다. 루카는 소년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소년이 허락하자 그들은 접힌 순서를 사진이 아닌 손그림으로 남겼다. 종이는 마법의 감지력을 피하려고 실로 고정돼 있었다.
별을 펼치니 작은 지도가 나타났다. 학교와 마을 북문, 시계탑, 제분소가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네모난 빈칸이 있었다.
[공동 피난로 제2출구]
지도 아래에는 미라의 글씨로 보이는 문장이 있었다.
[열세 번째 문은 출구가 아니야. 너희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돌려주는 방이야.]
루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나는 여기를 어떻게 알아요?”
소년은 한동안 생각했다.
“그 누나는 아래에서 길을 그렸어. 우리가 갇힌 문보다 더 깊은 데에서 왔다 갔다 하는 바람의 방향을 읽었거든. 그리고 우리가 쓰는 종이관을 고쳐 줬어.”
“누나는 지금 어디 있어?”
“우리가 있는 곳보다 아래. 종이가 잘 안 올라오는 층.”
루카는 지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종이에서 젖은 돌 냄새가 났다. 미라가 아직 어딘가에서 손으로 접고 쓴 물건이었다.
민규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보냈다는 말은 없었니?”
소년은 오래 망설였다.
“내가 너희와 나가면, 먼저 학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래. 우리보다 더 빨리 길을 잃을 수 있다고.”
셀레나가 지도를 자세히 봤다. 네모난 빈칸은 비상 환기 통로와 연결돼 있었다. 바르트의 제분소 터빈에 이어 또 하나의 출입 경로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2출구가 진짜라면 구조 인원을 늘릴 수 있어요.”
“그래도 통로를 시험한 다음에.” 민규가 말했다.
루카는 애써 웃었다.
“아저씨는 항상 그 말부터 하네요.”
“한 번 시험하고 열어도 충분한 사고가 많아서 그래.”
그들은 별의 접힌 자리에 묻은 검은 가루도 확인했다. 마레가 채취한 가루는 단순한 먼지가 아니었다. 제분소 배수관에서 발견된 절연 분말과 같은 종류였다. 미라가 그 지하 통로 근처를 지나갔다는 증거가 하나 더 늘었다.
루카는 종이 별을 들고 창가에 섰다. 밖에서는 학생들이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녁 햇빛이 기숙사 지붕을 길게 비췄고, 운동장에서는 공중에 뜬 공 하나가 제멋대로 날아다녔다. 학교가 이렇게 시끄럽고 따뜻한 곳이라는 사실을 루카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누나가 사라진 뒤 학교가 싫어졌다. 복도에 누나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수업에 들어가면 항상 옆자리에 누군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멀쩡한 마법진을 일부러 망가뜨리고, 사람들이 화를 내면 자기 때문이 아니라 누나를 찾지 않아서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른들이 모여 조용히 회의하는 동안 무엇이라도 크게 소리를 내야 누군가 돌아볼 것 같았다.
“누나는 제일 먼저 제 장난을 알아챘어요.” 루카가 말했다.
민규는 창턱 옆에 기대 서 있었다. 루카가 말하고 싶을 때만 들어 주었다.
“제가 복도 바닥에 미끄럼 주문을 걸어도 누나는 절대 넘어지지 않았어요. 대신 뒤에서 소리쳤죠. ‘루카, 네가 미끄러져 봐야 멈추지!’ 그러면 진짜로 제가 먼저 넘어졌어요.”
“무척 단단한 누나였구나.”
“무서웠어요. 근데 누나가 없으니까 그것도 그리워요.”
루카는 종이 별의 마지막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어린 시절 미라는 루카의 작은 손가락을 잡고 몇 번이고 같은 접기 방법을 가르쳤다. 마지막 모서리를 거꾸로 접는 이유를 물으면 언제나 웃으며 말했다. ‘어딘가에 갇히면, 거꾸로 접힌 쪽이 밖을 가리킬 거야.’ 그때는 장난인 줄 알았다. 이제 루카는 누나가 그 말을 진심으로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학교 애들은 제가 누나를 찾으려고 그러는지 몰라요. 그냥 사고뭉치라고만 해요.”
“네가 저지른 장난 때문에 다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어. 그건 나중에 책임져야겠지. 하지만 누나를 찾고 싶었던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자기 행동과 자기 마음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듯했다.
“구조된 그 애한테도 미안하다고 해야겠어요. 나오자마자 누나 얘기만 물었거든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 다만 대답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루카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보건실로 돌아가 소년에게 종이 별 하나를 새로 접어 주었다. 아무 말도 쓰지 않은 별이었다. 소년은 그걸 보자 잠시 웃었다.
“여기는 별을 이렇게 접는구나.”
“너희 쪽은 어떻게 접는데?”
소년은 마지막 모서리를 반대 방향으로 접었다. 루카는 숨을 멈췄다. 그 방법은 미라가 가르쳐 준 것과 똑같았다.
“누나가 너희에게도 알려 줬구나.”
“응. 우리가 무서워할 때 종이로 별 만드는 법부터 가르쳐 줬어.”
루카는 소년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에는 오래된 실밥 자국이 있었지만 작은 별 하나를 접는 동작은 조심스럽고 정확했다. 사라진 사람들은 멀리서 구해 줘야 하는 숫자가 아니었다. 안에서도 서로를 돌보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루카는 소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경비실로 돌아왔다. 그는 처음 쓰려던 답장 한 장을 찢어 버렸다. 거기에는 '왜 빨리 못 나와?'라는 문장이 있었다. 새 편지에는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적었다.
그날 저녁 루카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 누나에게 보낼 답장을 썼다. 그는 구조해 주겠다는 약속부터 적지 않았다. 대신 오늘 자신이 마신 따뜻한 수프, 처음 구조된 소년이 시계를 오래 바라본 일, 바르트 아저씨가 부인을 찾아 안도한 일부터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다.
[누나, 나는 기다리기만 하지 않을게. 하지만 무리해서 문을 열지도 않을게. 우린 길을 만들고 있어.]
민규는 편지를 읽지 않았다. 루카가 접고 나서 보여 준 주소 부분만 확인했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까지 자신이 알 권리는 없었다.
종이관으로 편지를 보내는 순간 회신이 떨어졌다. 너무 빨랐다. 아래쪽에서 누군가 기다렸던 듯했다.
[고마워. 하지만 지도를 그린 건 내가 아니야.]
루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아래, 미라의 필체를 닮은 다른 글씨로 한 문장이 더 있었다.
[정민규라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이곳에 내려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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