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희의 봉투에서는 삼십 년 전의 먼지 냄새가 났다.
비가 많이 내리던 구호소에서 받아 온 종이. 병원의 약 봉투와 어린 민규의 손수건 사이에 눌려 있던 그것을, 은희는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흰 종이는 물을 먹었다 마르면서 가장자리가 구불구불했고, 가운데에는 누군가 손바닥으로 문지른 흔적이 있었다. 케스는 봉투를 투명한 보존 판 사이에 끼웠다. 만질수록 그때의 필압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여기에는 '최초 승인'이라는 글이 없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민규가 가까이 다가가 읽었다. [대피실 내 미확인 아동의 구조 확인을 요청합니다.] 어린 민규의 이름은 그 아래 서명란이 아니라 질문을 들은 사람의 칸에 적혀 있었다. [질문 대상: 정민규, 8세.] 왼쪽에는 보호자가 있을 때 대답을 다시 확인하라는 안내가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그럼 화면에 나온 승인서는 다른 서류입니까?” 루카가 물었다.
“같은 서류를 다르게 읽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셀레나는 은빛 검사판을 켰다. “마법식 복사기는 내용뿐 아니라 양식에서 글자가 차지하는 자리까지 복제하니까요. 칸 이름을 바꾸면 전혀 다른 의미가 돼요.”
그녀는 종이를 비추는 각도를 바꿨다. 중앙에서 내려온 사본과 원본의 글자 간격이 같다는 게 드러났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이름 위에는 비정상적으로 얇은 가림막이 하나 놓여 있었다. 원래 질문 대상이던 위치를 시스템이 승인자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서식 변환표가 있겠군요.” 바르트가 말했다. “기계의 커넥터 방향을 반대로 꽂으면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실수라면 왜 삼십 년 동안 수정하지 않았을까요?” 케스가 물었다.
“그건 다른 조사입니다.” 민규가 대답했다. “먼저 이 아이가 무엇을 했는지부터 확인하죠.”
어린 민규는 질문을 받았다. 대피소에 다른 아이가 남아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있다'고 답했다. 원본에는 그 대답이 없었다. 노란 먹지에 희미하게 남은 글자를 판독한 셀레나가 숨을 들이켰다.
[문 뒤에서 한 명 더 울어요. 제발 확인해 주세요.]
민규는 종이를 한참 바라봤다. 열한 시설에서 반복되던 '마지막 확인자가 남을 것'이라는 명령은 이 한 문장을 거꾸로 읽은 데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른들이 들었어야 할 구조 요청이 아이에게 떠넘겨진 근무 책임으로 바뀐 것이다.
“저는 그때 누군가 문 뒤에 있다고 말했다는 거군요.”
은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넌 무서워하면서도 여러 번 말했어. 그 안에 아이가 있다고. 담당자는 이름을 물었고, 네가 모른다고 하니까 서류가 미완료라고 했지.”
“그리고 나를 승인자라고 적었겠네요.”
“그건 그때 보지 못했어. 내가 너를 데리고 가는 사이 그 사람이 무슨 도장을 찍었는지 몰라.”
은희는 자신의 기억이 빈틈투성이임을 숨기지 않았다. 민규에게는 그 말이 오히려 믿음직했다. 누군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순간 대화가 기록에 맞춰 다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을 남겨 두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운 때도 있었다.
오전 아홉 시, 구호소 앞에 조사팀의 차량 두 대가 멈췄다. 구호소는 현재 하수 관리소의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문패는 없어졌지만 외벽의 빗물 높이 눈금은 남아 있었다. 삼십 년 전 물이 어디까지 차올랐는지 표시하는 붉은 선이 성인 남자의 어깨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민규는 벽면의 균열과 지붕의 지지대를 살핀 뒤 출입 가능 범위를 정했다.
“안에 들어가면 서류를 바로 꺼낼 수 있습니까?” 케스가 물었다.
“그건 도면을 보고 판단해야죠. 지금 들어가면 창고 바닥이 버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르트는 구조물 뒤편의 배수관을 두드렸다. 속이 빈 소리가 났다. 원래 구호소의 뒤쪽은 별도 피난 계단으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시멘트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는 레버를 제자리에서 한 번 움직여 보고 즉시 멈췄다. 녹슨 부품이 깨질 가능성이 있었다.
“힘으로 열 수는 있어요.” 바르트가 말했다. “그런데 그 아래에서 누가 기다리는지 모르니까 먼저 진동을 확인합시다.”
셀레나는 짧은 탐지 주문을 외웠다. 벽 너머로 울리는 소리를 살피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상했다. 안쪽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와 사람의 연필 쓰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마법의 감지 시간에는 삼십 년 차이가 없었다. 둘 다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현재 소리인지 과거 기록인지부터 구별해야 해요.” 셀레나가 말했다.
민규는 소형 카메라를 배수관 옆의 점검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렌즈에는 젖은 종이 상자와 오래된 의자 하나가 나타났다. 의자 위에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누가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연필 자국이 한 줄씩 더해졌다.
[마지막 아이가 있습니까?]
화면 속 공책이 질문을 반복했다. 그리고 몇 초 뒤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확인자가 남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연결되지 않았어요.” 루카가 말했다. “누가 있는지 물었는데, 남겠다는 사람이 생긴 거잖아요.”
민규는 카메라를 돌려 벽면을 비췄다. 낡은 전달관이 두 개였다. 하나는 구조 요청을 보내는 관, 다른 하나는 근무 인계를 알리는 관이었다. 그런데 구호소 안쪽에서 두 관을 하나의 장치로 이어 놓았다. 누군가 구조 요청을 할 때마다 그것이 근무 신청으로도 전달되는 구조였다.
“여기서부터 잘못됐군요.” 민규가 말했다.
케스는 그 상태를 촬영하고 총국에 수색 영장을 추가 신청했다. 독립 탐지 결과도 함께 남겼다. 공책을 만지는 순간 전체 시설의 기록이 바뀔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저장된 영상인지 모르는 곳에서 전부 가져가는 것은 증거를 잃는 지름길이었다.
그때 구호소 건너편에서 노인이 하나 다가왔다. 오래전 구호소를 운영했던 자원봉사자 조문택이었다. 그는 간신히 걷는 몸으로 벽의 붉은 선을 가리켰다.
“그날 나는 아이들 이름을 적는 사람이었소. 서명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
“누가 서명했습니까?” 케스가 물었다.
“기억이 또렷하진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 아이에게는 펜을 주지 않았어. 사고 나서 손을 다쳤거든.”
민규는 자신의 오른손에 남은 옛 흉터를 보았다. 그는 어릴 적 문을 붙잡다가 다쳤다고 들었지만 정확한 순간은 기억하지 못했다. 조문택은 당시 사람들의 출입을 적어 둔 장부를 집에서 가져왔다. 장부의 두 시 십칠 분 자리에는 정민규라는 이름 대신 [학생 구조 요청 접수]가 적혀 있었다. 승인서 사본에 찍힌 시각과 일치하지만 의미는 전혀 달랐다.
“그럼 아이가 서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승인했다는 종이가 만들어졌군요.” 케스가 말했다.
조문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자꾸 문 뒤를 가리켰지. 우리는 물이 차서 들어갈 수 없었고. 나중에 아이가 밖으로 나온 뒤에도 문 안쪽에서 종소리가 났어.”
은희는 그 증언을 듣고 손을 떨었다. 민규는 그녀를 즉시 위험 구역 밖의 의자로 안내했다. 어머니가 할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다. 더 증언하겠다는 마음과 지금 쉬어야 한다는 신체의 신호를 따로 확인하는 것도 필요했다.
임시 지휘소에는 지역 주민들이 하나둘 모였다. 누군가는 기자였고, 누군가는 마법학교에 자녀를 보낸 보호자였다. 다른 마을에서 구호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케스는 위험 구역에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안전선을 넓혔다. 원본을 확인하는 작업이 사람들의 불안까지 한꺼번에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 설명도 하지 않으면 지나친 추측이 퍼질 수 있었다.
“대피소에서 아직도 아이를 가두고 있다면서요?” 한 보호자가 물었다.
민규는 사실과 추정을 분리해 말했다. 어린아이의 구조 요청이 근무 승인으로 잘못 바뀐 흔적은 확인됐다. 하지만 구호소의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현재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인지, 삼십 년 전 남긴 신호인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는 어느 쪽으로든 단정하지 않았다. 누군가 실종된 가족의 이름을 불렀지만 민규는 그 이름을 조사팀에 전달해 확인하겠다고 답했다.
정은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기억을 하나 더 떠올렸다. 사고 당일 구호소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젖은 손을 닦을 천을 나눠 주었고, 은희에게 아들을 데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은희는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화 옆에 하얀 꽃무늬가 있었다는 것만은 이상하게 선명했다.
조문택이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여린 간호사였을 거요. 그분은 매일 장화에 꽃을 그렸소. 홍수가 나면 어떤 장화를 누가 신었는지 알아보려고 말이오.”
케스는 그 이름을 기록했다. 은희의 기억을 근거로 여린에게 먼저 연락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뒤 구호소에서 누가 언제 떠났는지를 아는 사람은 행정 담당자만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사람들을 실제로 도왔던 주민들도 있었다.
민규는 조문택에게 한 가지 더 물었다. “왜 당시 기록을 모두 총국에 넘기지 않았습니까?”
“넘겼소. 사본을 남겨 놓은 건 다른 이유였지. 내가 쓴 글씨가 맞는지 나중에 확인하자고 했거든. 그때는 다른 사람이 기록을 고칠까 봐 걱정했어. 몇 년이 지나니 오히려 내가 잘못 기억할까 봐 무서워지더군.”
“그래도 남겨 주셔서 도움이 됩니다.”
노인은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증언을 했다고 해서 영웅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기 기록이 틀렸을 가능성을 걱정했다. 민규는 장부의 날짜가 다른 기록과 맞는지 확인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휘소 뒤편에서 루카와 미라는 임시 대피 안내를 만들고 있었다. 루카는 마법으로 빛나는 표지판을 설치하자고 했고 미라는 비 오는 날에도 읽을 수 있는 방수 종이를 붙이자고 했다.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설득하려다 민규의 눈길을 보고 웃었다. 결국 둘 다 설치했다. 비상 전원이 끊길 때에는 종이가 남고, 종이가 젖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는 작은 마법등이 길을 비출 것이다.
민규는 그 안내문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여덟 살 때 그는 출구가 어디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대신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가리켰다. 만일 어른들이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조사하기보다 이름을 받아 적는 일에 매달렸다면 그 자체가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그는 아이들에게 정확한 답을 요구하기보다 어른들이 확인할 방법을 늘리려고 했다.
오르반에게서 통화가 왔다. 교내 식당에 설치된 마법식 문이 잠시 오류를 냈지만 당직 교사가 수동 문을 열어 학생들의 이동을 도왔다는 보고였다. 당시 기록망은 정규 출석을 확인하지 못해 출입을 거절했으나 학생들을 직접 본 교사가 대피실로 안내했다고 했다.
“기록보다 먼저 학생을 확인했습니다.” 오르반이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오류 로그도 남겨 두세요. 나중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민규는 통신을 끊고 방수 수첩에 작은 별표를 그렸다. 원본을 찾는 일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지만, 현재의 아이들이 안전하게 밥을 먹고 돌아가는 일은 지금 벌어지는 일이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해서 다른 하나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구호소 내부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형, 거기 맞아.”
독립 회선의 아이였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예전 공책에 닿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민규가 대답하기 전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낮고 매끄러운 어른의 음성이었다.
[원본 보관소 열람 권한은 최초 승인자 본인에게만 부여됩니다. 승인자의 현장 진입을 확인합니다.]
바르트가 장비를 든 손을 멈췄다. 민규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 서명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는 출입선 앞에서 발을 멈추고 카메라를 거둬들였다.
“여기에 들어오라고 하니 더 들어가면 안 되겠네요.” 민규가 말했다.
“그럼 원본은 어떻게 찾지?” 미라가 물었다.
민규는 벽에서 발견한 오래된 비상 통화구를 가리켰다. “출입이 아니라 연락을 해 봐야지.”
그는 구호소 안의 장치에게 말하지 않고 현장 사람들에게 물었다. 구조 요청이 거절되지 않는 독립 출구가 있는지, 모든 길이 막혔을 때 마지막으로 사람을 내보내는 통로가 어디였는지. 조문택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흙과 시멘트 아래에는 오래된 빗물 터널이 하나 있었다.
“피난로는 늘 밖으로 열려 있었소. 서류를 받으러 들어가는 길은 막아도, 나오는 길은 잠그면 안 됐으니까.”
민규는 터널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했다. 다음 현장 점검은 그 출구에서 시작될 것이다. 구호소의 낡은 스피커에서는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시 십칠 분이 아니라 두 시 십구 분에 맞춰 울렸다. 사고 뒤 아이를 병원으로 보낸 시간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제19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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