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제0복귀과의 긴급 통보가 도착했다.
[모의 사고 연습실의 모든 신호를 즉시 폐기할 것. 제0대 확인자는 기록상의 임시 기능이며 구조 대상이 아님.] 서명은 없었다. 발신 날짜는 수해 사고가 난 해로 표시돼 있었지만, 종이는 방금 출력된 것처럼 따뜻했다. 케스는 통보문 자체를 압수한 뒤 누가 현재까지 같은 명령을 보내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통보문이 도착한 뒤 직원들은 업무를 중단하고 우편함과 연락 기록을 확인했다. 같은 문장이 여러 부서에 서로 다른 시각으로 보내져 있었다. 교무실에는 오전 일곱 시, 관리과에는 오전 다섯 시, 학생 상담실에는 사고 당일 날짜로 표시된 편지가 도착했다. 봉투의 질감은 모두 같았지만 종이 가장자리의 절단면이 달랐다. 누군가 하나의 원본을 여러 시대에 걸쳐 보관한 것처럼 보였다. 케스는 서류가 도착한 순서를 분리해 기록했다.
소문을 들은 학생들은 아침 식사를 하다가도 경비실 쪽을 힐끗거렸다. 한 학생은 제0대 경비원을 만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고, 다른 학생은 그 이름을 부르면 하루가 지워진다고 겁을 줬다. 미라는 식판을 내려놓고 또래들에게 말했다. “누가 직접 본 적 있어?” 대답은 없었다. 루카는 통학 버스가 지나가는 시간과 안전 구역을 적은 공지문을 가져왔다. 세상 끝에 대한 소문보다 당장 오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편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정은희는 상담실에서 몇몇 학부모와 이야기를 나눴다. 사고 소식 때문에 아이들이 잠을 못 잔다며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삼십 년 전 아들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래된 사건에는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위험한 통로에 접근하지 않도록 학교가 조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설명했다. 말하는 동안 몇 번이나 목소리가 떨렸지만 정은희는 그 떨림까지 숨기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민규는 경비실에서 하준에게 연락했다. 원치 않으면 이번 사건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확인했다. 하준은 새 책장을 조립하는 중이었다. 드라이버가 짧아서 마지막 나사 하나를 못 조이고 있다고 했다. 민규는 그의 불편함을 듣고 잠시 웃었다. “세상에 정비할 건 정말 많군요.” 하준이 대답했다. “이번 건 제 손으로 고쳐 보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일이라면 협조하겠다고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 동의는 한 번으로 끝나는 절차가 아니었다.
오르반은 교내 회의를 열었다. 학교는 학생들을 보호해야 했고, 신호를 무작정 끊었다가 실제 생존자의 안내가 사라지면 안 됐다. 한편 학생과 교직원의 기록이 낡은 실험실에 연결돼 있다면 계속 두는 것도 위험했다. 원로 교수 둘은 당장 모두 지우자고 주장했다. 셀레나는 신중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장치가 살아 있는 사람을 대체할 때는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그 장치 안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신호를 끊으면 또 같은 실수를 하는 겁니다.”
“기계에 동정심을 품자는 말입니까?” 교수가 물었다.
“기계인지 아닌지도 아직 조사 중이라는 말입니다.”
회의실 뒤에 앉아 있던 민규는 손을 들었다. 그는 장치를 사람이라고 주장할 자료는 없지만, 해당 신호를 현재의 출입 시스템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으로 보존할 기술적 방법을 제안했다. 학교의 신원 확인과 근무 배정에는 더 이상 영향을 못 주게 하되, 원본과 대화 기록은 별도 전원에서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학교 보안을 약화시키지 않겠습니까?” 오르반이 물었다.
“반대로 단일 장치에 모든 판단을 맡기는 현재 구조가 더 위험합니다. 저 통보가 진짜인지조차 모르잖습니까.”
바르트가 독립 전원 시험 결과를 보여 줬다. 장치는 제7시설 정문과 분리해도 짧은 대화와 출구 지도 표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단점은 한 번에 몇 분씩밖에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몇 분 동안 아이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그는 창고 밖에 실제로 비가 오는지 물었고, 민규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안도했다.
“그럼 오늘은 양말 안 젖어요?”
“오늘은 비가 안 와.” 민규가 말했다. “네 양말 두 짝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어.”
아이는 잠시 웃었다. 그러나 웃음 뒤에 낮은 울음이 들렸다. “저는 나가면 누구랑 살아요?”
그 질문 때문에 방 안의 어른들이 조용해졌다. 기계를 꺼내면 구조가 끝난다는 생각도, 문을 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기대도 사라졌다. 누군가의 의식과 말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후를 어떻게 책임질지 정해야 했다. 민규는 확신 없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다시 시스템에 맡기지도 않기로 했다.
“먼저 나오는 방법을 찾자. 그다음에 네가 원하는 걸 함께 생각해 보자. 어른인 내가 다 안다고 말하지는 않을게.”
“그럼 나중에 말해도 돼요?”
“물론이지.”
정은희는 그 대화를 듣고 손을 놓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에게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얼굴과 목소리가 닮았다는 이유로 상대의 삶을 대신 정의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자신이 잘못 이해했던 어린 민규의 말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말을 끝까지 듣기로 했다.
독립 회선 시험 뒤 셀레나는 학생들에게 실험 과정을 설명하는 짧은 시간을 마련했다. 가끔은 마법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녀는 신호판에 서로 다른 색의 돌 두 개를 올려놓고 학생에게 말했다. 한 돌을 치우면 다른 돌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안전한 설계다. 그런데 사고 뒤 만들어진 회로는 첫 번째 돌을 치우면 두 번째 돌도 사라지도록 연결돼 있었다.
루카는 흰 돌을 들어 올리다 손끝이 찌릿해지는 걸 느꼈다. 셀레나가 바로 마력을 줄였다. 그는 괜찮다고 웃었지만 손등에는 작은 붉은 자국이 남았다. 민규는 실습 과정에서 다친 부위의 상태를 확인하고, 장비 점검 기록에 남겼다. 이처럼 작은 사고도 묻히면 다음에는 더 큰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셀레나는 학생에게 사과했다. 자신이 익숙한 마법이라고 해서 상대의 안전까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의 신호는 그때 잠시 끊겼다가 돌아왔다. “아저씨, 사람들이 제 얘기 때문에 싸워요?” 민규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야. 사람들이 네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아이는 잠깐 웃었다. “그럼 저도 생각해도 되나요?” “그럼.” “나는 지금 문 밖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제일 궁금해요.”
민규는 창고 문 너머의 작은 정원과 우산꽂이, 식당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설명해 줬다. 아이는 택배 상자가 무엇인지 물었다. 민규가 누군가 멀리서 보낸 물건이라고 설명하자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저한테도 상자를 보낼 수 있어요?” 민규는 상자를 바로 보낼 방법은 모르지만 편지를 전달하는 시험부터 해 보자고 말했다. 대답 뒤에는 종이 만지는 소리가 잠깐 이어졌다.
수해 당시의 작업 지시서를 조사하던 케스가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서가원은 사고 다음 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주일 뒤에 퇴직 신청을 했다. 총국 인사 명부에서만 삭제됐을 뿐 지방 보관소에는 마지막 급여 지급 기록까지 남아 있었다. 마지막 지급 장소는 서쪽으로 세 시간을 가야 하는 작은 해안 전망대였다. 제0복귀과에서 매년 지급됐다는 유지비 명목의 금액도 같은 장소로 보내져 있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인가요?” 루카가 물었다.
“적어도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할 수 있죠.” 케스가 대답했다.
학교를 벗어나 바닷길로 향하는 팀에는 민규, 케스, 바르트, 하준이 포함됐다. 셀레나는 학교에 남아 실험실 신호를 유지했고 정은희는 기록 대조를 돕기로 했다. 루카와 미라는 하준의 결정을 듣고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오르반은 두 학생의 수업과 안전을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영상 통신을 담당하게 했다. 그들은 불평했으나 장비 점검과 연락망 작성에 꼼꼼하게 참여했다.
해안으로 향하는 차량은 여러 차례 큰비가 지나간 마을을 통과했다. 창밖에는 바람에 한쪽으로 기운 오래된 간판들이 보였다. 하준은 가끔 민규와 비슷한 얼굴이 유리에 비칠 때 창을 가렸다. 처음에는 자기 얼굴이 낯설어서였다. 이제는 누군가 그 모습을 보고 정민규를 부를까 봐 걱정이 됐다. 민규는 창문에 비친 얼굴을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하준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일을 조사라는 이름으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케스는 이동 중에 전망대의 소유권 서류를 읽었다. 부지는 공공 소유였으나 오래전 시설 유지 계약이 한 개인에게 넘어갔다. 계약 내용에는 비상 연락 장치를 폐기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 연락 장치가 누군가를 강제 근무자로 지정할 위험이 있다는 설명은 없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이 공범인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관리자일지는 직접 만나야 알 수 있었다.
차가 오래된 다리 앞에서 멈췄다. 교량 보수 작업으로 한 차선만 열려 있었다. 바르트는 길이 막히자 짜증을 내는 대신 강철 빔에 새로 붙인 점검표를 확인했다. 다리 관리자는 부식이 진행돼 하중을 줄였다고 설명했다. 민규는 지연된 시간을 연락망에 알렸다. 무리해서 위험한 길을 건너는 대신 안전한 통로를 택하는 건 돌아가는 일이 아니었다. 하준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사건 도중 차창을 내려 바닷바람을 맞았다.
전망대에 가까워지자 길가의 작은 가게에서 주인이 손님과 말다툼하고 있었다. 오래전 폐쇄된 등대가 아직도 밤마다 켜진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가게 주인은 주민들이 겁먹을까 봐 대문을 일찍 닫는다고 했다. 민규는 수사 내용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실제 위험 지역에 대한 문의는 관할 관리소에 전달했다. 자신들이 찾는 장치가 주민 생활과 연결돼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안 전망대는 사라진 등대와 붙어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주차장 바닥에는 갈매기 배설물이 하얗게 말라 있었고, 난간은 바닷바람에 심하게 부식돼 있었다. 건물은 무인으로 운영되는 듯했으나 우편함에는 최근에 배달된 신문이 있었다. 민규는 건물 출입문을 두드렸다. 세 번 두드리고 기다리자 안쪽에서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연 노인은 작은 회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기계공용 솔이 있었다. 그의 한쪽 장갑 손등에는 하얀 선이 두 개 그어져 있었다. 노인은 민규를 보자 놀라는 대신 아주 지친 표정을 지었다.
“또 왔군요, 아이.”
“저는 처음입니다.” 민규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 얼굴을 하고 십 년마다 찾아와 문을 열어 달라고 했죠. 그때마다 내가 알아봤는지 묻더군요.”
“서가원 씨입니까?” 케스가 물었다.
건물 안에는 종소리가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바다 쪽으로 난 창문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가원의 장갑 손등에 그어진 흰 선이 보였다. 하준은 그 선을 보고 기억 속의 어른이 실제로 있는 것 같아 몸을 굳혔다. 민규는 하준에게 잠깐 바깥에서 기다려도 된다고 했다.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노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했는지 아직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번에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직접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에 제가 여기 왔다는 건 어떤 근거로 압니까?” 하준이 물었다.
가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퇴근하려면 어느 문으로 가야 하는지.” 그는 서랍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은 공책 여러 권이 쌓여 있었다. 한 공책은 젖은 페이지를 말린 자국이 있었고 다른 공책은 표지가 아예 바뀌어 있었다. 하준은 무턱대고 공책을 가져가지 않았다. 케스가 보관 경위를 적은 뒤 함께 확인하기로 했다.
가원은 왜 이 자료를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케스는 노인의 침묵을 용서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는 기록이 누군가에게 해를 줄 가능성을 조사해야 했다. 민규는 창밖의 바람이 문을 닫아 버리지 않도록 고임목을 끼웠다. 오래된 경첩에서 나는 소리가 대화를 자꾸 끊고 있었다. 그 사소한 작업이 끝나자 모두 조금씩 숨을 돌렸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릎이 좋지 않아 난간에 잠시 기대야 했다. 제0복귀과의 초대 설계자 서가원은 실종자 명단과 달리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또 다른 손님들이 이곳을 찾아왔다는 말이 남았다.
가원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솔을 내려놓고 문턱 너머로 말했다.
“먼저 분명히 합시다. 그 아이를 꺼내려고 왔습니까,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을 없애려고 왔습니까?”
민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두 개가 서로 다른 일인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는 발밑의 녹슨 문턱과 미끄러운 계단을 살핀 뒤 말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누군지, 왜 거기 있어야 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서가원은 긴 침묵 끝에 문을 열었다. 실내의 오래된 탁자에는 어린아이 크기의 노란 호루라기가 세 개 놓여 있었다. 하나만 별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그럼 내가 처음부터 잘못 말한 것을 들려줘야겠군요.” 노인이 말했다. “그날 시험에 참가한 아이는 둘도 셋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네 명이었어요.”
제17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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