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원이라는 이름은 총국의 인사 명부에 없었다. 그러나 연습실 건축허가서에는 분명하게 서명이 남아 있었다.
케스가 가져온 허가서의 모서리는 유난히 깨끗했다. 나머지 종이가 누렇게 변했는데 이름이 있는 부분만 얼마 전 새로 붙인 듯 하얬다. 민규는 그 종이를 위조 문서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오래된 문서를 복원하며 종이를 덧댈 수도 있었다. 대신 원본 보관 경위와 당시 작업자 출입 기록을 따로 확인하기로 했다.
“서가원은 누구였죠?” 오르반이 물었다.
“훈련용 안심 응답 장치를 처음 만든 설계자입니다. 실종됐다고 돼 있어요.” 케스가 말했다.
“언제요?”
“수해가 난 다음 날. 장치를 개조하라고 서명한 바로 그날입니다.”
민규는 큰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누가 책임자였는지 찾을 때마다 그 책임자가 사라져 있었다. 기록에서 사라진 사람이 피해자일 수도 있고 책임을 피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 모른 채 결론을 내리면 또 다른 사람을 잘못된 자리에 세워 두게 된다.
학교 뒤 창고에는 아이들이 쓰던 노란 호루라기의 실물이 없었다. 대신 가원에게 전달했다는 수령증과 별 모양이 찍힌 나무상자 사진이 있었다. 수령증에는 사고 당시 특별 임무가 적혀 있었다. [세 번째 참가자 구조 완료 확인.] 그런데 완료 서명칸은 비어 있었다. 수령증 아래에 작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확인용 인격을 유지. 원본 복구 전 삭제 금지.]
“확인용 인격이라니요?” 루카의 얼굴이 굳었다.
“훈련 안내 장치에 남아 있는 아이의 음성이 단순 녹음만은 아니라는 뜻일 가능성이 있어.” 셀레나가 말했다. “현장에서 들은 대답을 학습하고 다음 안내를 바꾸도록 설계했겠지. 오랫동안 작동했다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인형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어.”
“그럼 저 아이는 살아 있는 건가요?”
“그 질문부터 결정해선 안 돼.” 민규가 말했다. “지금 확인된 건 그가 무서워하고,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그 말은 듣고 대응해야 해요.”
이때 바르트가 옛 지하 통로의 열쇠를 찾아왔다. 손잡이는 세 겹으로 접힌 금속판이었고, 옆면에는 별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보존실에서 발견한 상자 사진과 무늬가 같았다. 열쇠는 사용 흔적이 많았다. 누군가 여러 번 문을 열고 닫았을 것이다. 마지막 수리 날짜는 수해 사고 이틀 뒤였다.
팀은 연습실로 내려가기 전에 별도 현장 회의를 열었다. 이번에는 구조 요청자 자체가 기록망에 연결된 상태였다. 문을 열면 아이가 사라질 가능성도 있고, 시스템이 다른 사람을 대체자로 지정할 가능성도 있었다. 셀레나는 아동의 목소리를 끊지 않으면서 전원 공급을 분리할 수 있는 회로를 제안했다. 바르트는 붕괴된 계단에 독립 지지대를 설치하자고 했다. 오르반은 학생들의 평상시 통로를 통제하고, 케스는 조작된 기록을 분리해 보존할 담당자였다.
민규는 하준에게 물었다. “위험한 장소입니다. 같이 가 주시면 도움이 되겠지만, 이번에는 근무 명령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하준은 의자에 앉아 잠시 손가락으로 방문증을 문질렀다.
“제가 들어가면 다시 17번이 될까요?”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안전하게 빠져나올 방법을 마련하려는 겁니다.”
“그래도 가겠습니다. 남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올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점검팀이 떠나기 전 민규는 학교 뒤편의 좁은 통로를 여러 번 오갔다. 학생들이 쓰는 계단의 난간은 잘 고정돼 있었고, 창고 문 앞에는 미끄럼 방지판이 놓였다. 오르반은 임시 교대 인원에게 정확한 귀가 시각이 없는 파견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통신이 끊기면 먼저 출입문을 잠그고 대기하되 구조팀에 연락하라고 했다. 이번 작업이 또 다른 끝없는 근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준은 장비 목록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민규를 불렀다. “왜 저는 장비에 담당자로 안 적혀 있죠?” 민규가 설명했다. 정식 근무자가 아니기 때문에 필수 업무를 맡기지 않은 것이다. 하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자원했다. 과거 출입 경로를 설명하고, 이상한 기록이 나타나면 제3자 입장에서 보고하겠다는 일이었다. 민규는 그 역할의 시작과 종료 조건을 별도로 적었다. 하준은 내용을 읽고 직접 서명했다.
“이렇게 서명하면 끝나는 시간이 있군요.”
“그게 원래 정상입니다.”
하준은 자기가 곧장 자유로워졌다고 느끼지 않았다. 마법 사고가 해결되었다 해도 삼십 년간 반복된 습관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누군가 새로운 일을 하자고 말하면 몸이 먼저 출구 쪽으로 움직이고, 빈 의자가 보이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어도 질문할 수 있었다. 그는 바르트에게 장비를 옮기는 방법을 배우고, 괜찮으면 다음에는 자원봉사 활동을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가능성은 작은 듯했으나 숫자로 기록된 삶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셀레나는 사라진 작업 책임자 가원에 대한 오래된 증언을 추가로 확인했다. 가원은 마법보다 기계 설계에 강했고, 아이들이 공포에 질렸을 때 알아듣기 쉬운 말을 고르기 위해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자문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설계 초기에는 따뜻한 의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 사실이 나중의 부작용을 없애 주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잘못 바뀌었는지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민규는 원본 설계와 사고 직후의 수정본을 별도로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 밤, 하준은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쓴 방문증을 목에 걸었다. 숫자 17이 있던 손목에는 아무 표식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의 문이 그의 발소리를 듣자 금속성 경고음이 났다. [교대 가능한 인원 확인.] 하준이 움찔했다. 민규는 곧바로 경비실에서 준비한 차단판을 신호선 위에 올렸다. 장치는 한 차례 경고를 반복하다가 조용해졌다.
“오늘은 누구도 자동 교대시키지 않습니다.” 민규가 크게 말했다. 목소리는 마법 주문이 아니라 동료들에게 하는 확인이었다.
지하의 첫 번째 문은 생각보다 작았다. 성인 남성은 허리를 굽혀야 했고, 안쪽에는 어린이 키에 맞춘 손잡이가 있었다. 민규는 문 바로 앞에서 물러섰다. 아이에게 맞춰진 출입문인데 아이가 나갈 수 없다는 건 설계 목적과 정반대였다. 바르트가 문 안쪽을 열어 보자 그 뒤에는 좁고 어두운 실험실이 있었다. 벽에 각종 시계가 붙어 있었지만 모두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켰다.
지하 실험실로 들어가는 동안 한쪽 벽에서 물방울이 계속 떨어졌다. 바르트는 철근 부식 상태를 확인하느라 걸음을 늦췄다. 마법 보호막으로 물이 새는 것을 잠시 막을 수는 있었지만 구조 자체가 약해진 기둥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셀레나는 그 말을 듣고 보호막의 크기를 줄였다. 필요할 때 다시 펴더라도 지금은 실제 벽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도 한편에는 작은 키 높이 측정대가 있었다. 가로줄은 여러 개였지만 날짜가 붙은 줄은 단 세 개였다. 한 줄 옆에는 '민호', 다른 줄 옆에는 '민규'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줄은 가장 낮았고 이름 대신 별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민규는 그 표시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별을 그리던 여자아이가 실제로 그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어떤 경위로 이 시설에 들어왔는지 아직은 불분명했다.
루카의 통신이 들렸다. “아저씨, 세 번째 줄이 제일 낮으면 여자아이가 더 어렸다는 뜻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서서 잰 사람과 신발을 신은 사람의 차이일 수도 있어. 이것만으로 나이를 결정하지는 말자.”
미라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일단 사람을 세는 데는 쓸 수 있겠다.”
민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없었던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바르트는 측정대를 훼손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조사팀이 나가면 원래 위치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도록 주변의 나사와 작은 흠집도 기록했다.
가장 끝방 바닥에는 작은 손바닥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한참 전에 벽을 짚고 일어나며 남긴 흔적 같았다. 민규는 그 자국을 보자 아이의 다리에 힘이 풀렸을 때 어른이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떠올랐다. 대피하는 도중에는 크고 무거운 장비보다 물 한 컵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시급할 수도 있다. 그는 구조용 담요를 문턱 근처에 놓고, 신호가 들리면 가능한 한 조용히 대답하기로 했다.
실험실 한쪽에는 투명한 원통이 있었다. 원통 바닥에 노란 호루라기가 놓여 있었고 옆에는 작은 종이 두 장이 있었다. 하나는 민규가 어릴 때 쓴 것과 닮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할게요.]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글씨였다. [내가 돌아와도 아무도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다른 아이의 글씨예요.” 정은희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렸다. 그녀는 사진을 보자 종이 끝에 그어진 별 모양을 기억했다. “그날 역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사람들의 손등에 별을 두 개씩 그려 줬어. 자기 손에는 그릴 곳이 없다고 웃었지.”
민규는 원통을 살폈다. 호루라기는 마력 회로의 핵심 부품이 아니라 경보의 입력 장치였다.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면 가장 가까운 출구로 안내하는 음성이 켜지는 구조였다. 그러나 현재 회로에서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자동으로 ‘최종 확인 담당’이 되도록 연결돼 있었다.
“애초의 기능은 구조 요청이었네요.” 민규가 말했다. “소리 낸 사람이 경비원으로 바뀌게 누가 고친 거죠?”
케스는 호루라기의 연결선에서 흰 절연테이프를 떼어 냈다. 테이프 안쪽에는 두 개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초기 설계 날짜와 사고 이틀 뒤의 수정 날짜. 수정 책임자로는 서가원이 서명돼 있었다. 바르트는 그 수정란 옆에 작게 쓰인 부품 번호를 수첩에 옮겼다. 번호의 앞부분은 사고 때 사용한 오래된 생산 규격이었지만 뒷부분은 지금도 유통되는 교체 부품의 규격이었다. 단지 과거에 누가 고쳤느냐는 질문을 넘어 지금까지 누가 그 회로를 관리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는 케스에게 해당 부품의 납품 명세를 조회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가원이 실종됐다는 이유로 조사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민규는 철판 주위의 나사를 바라봤다. 나사 하나는 새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사용 흔적이 남는다. 삼십 년 전에 만든 장치가 오늘도 작동한다면 누군가 점검하고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정비 기록이야말로 현재 아이를 가두고 있는 사람을 찾는 단서일지 몰랐다.
그런데 케스는 앞서 확인한 수정란의 서명 옆에 연필로 덧쓴 한 줄을 발견했다.
[아이를 내보내려면 우선 모든 출구를 닫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가원이 개조를 했지만 명령한 사람이 따로 있었군요.” 케스가 말했다.
원통 안쪽의 부품은 손바닥만 한 철판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배열돼 있었다. 마법 신호선이 철판을 따라 돌아가다가 호루라기의 작은 홈으로 향했다. 바르트는 연결 구조를 설명했다. 사람이 불어서 소리를 내면 멀리 떨어진 안내 장치가 켜지고, 신호를 받은 시설은 가장 가까운 대피로를 표시해야 했다. 이 기능 자체는 지금도 쓸모 있었다. 다만 소리 낸 사람이 책임자가 되는 현재 연결은 기술적으로도 불필요해 보였다.
“이걸 만든 사람은 왜 두 기능을 합쳤을까요?” 셀레나가 물었다.
“부품을 아끼려고 한 선택일 수도 있어요. 혹은 모든 것을 중앙에서 제어하려 했을 수도 있죠.” 바르트는 철판 한쪽의 사각형 홈을 가리켰다. “그런데 여기에 따로 연결할 구멍이 있네요. 애초 설계에서는 분리됐던 것 같습니다.”
케스는 기술팀의 설명을 듣고 총국에 보존 명령을 보냈다. 뒤늦게 문서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언제 접근했는지 전부 기록하도록 했다. 오래된 부서가 사라졌다고 해서 현재도 그 기능을 조작하는 사람이 없다고 믿어서는 안 됐다. 그들이 사고 현장에 있는 동안 외부에서 기록을 새로 인쇄하고 있다는 증거가 이미 여러 번 나타났다.
민규는 원통을 향해 짧게 말했다. “지금 회로가 어떻게 연결됐는지 확인하고 있어. 일부러 네 말을 막지는 않을 거야.”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뒤 원통 표면에 작은 손바닥 모양의 김이 맺혔다. 실제 손이 닿은 것인지, 마법이 만든 반응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민규는 한 걸음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이가 스스로 다가오는 것과 장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을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실험실의 벽시계들이 한꺼번에 두 시 십칠 분을 가리켰다. 원통 안의 호루라기가 혼자 울렸다. 어른의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제0대 확인자. 대피 훈련을 재개한다. 네가 마지막까지 남아야 모두 산다.”
민규는 그 목소리의 끝에서 이상한 잡음을 들었다. 어른의 말투였지만 마지막 문장만 어린아이가 흉내 낸 듯 높아졌다. 자동 응답이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섞어 재생하고 있었다. 그는 원통을 두드리지 않고 통신기를 들었다.
“누구든 이 말을 듣고 있다면 먼저 알려 주십시오. 여기는 구조팀입니다. 훈련이 아니라 실제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잠시 뒤 작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럼 여기서 내가 한 일이 진짜인가요?”
민규는 원통 속 호루라기를 바라봤다. 그 질문은 훈련 점수나 출근 기록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삼십 년 동안 누군가를 기다린 아이에게 자신이 실제로 듣고 있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네가 기다렸다는 건 진짜야.”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기다려야만 했다는 규칙은 잘못됐을 수 있어.”
제17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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