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 사장이 펜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녀는 구조팀에 가게를 개방한 사람이지 알지도 못하는 마법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화면에는 그녀의 이름 옆에 [현장 소유 권한 있음]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연진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 뒤 장치는 무조건 누군가의 서명을 얻으려 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가장 쉽게 문서로 찾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넘겼다.
“저는 가게 주인이에요. 사람을 구하라고 열쇠를 빌려준 거고요.” 그녀가 말했다.
케스는 즉시 장치의 서명 요청을 취소하고 사장의 동의 범위를 새로 기록했다. [조사 출입 허락. 마법 계약 및 근무 지정 동의 없음.] 표시되던 이름은 사라졌지만 통제판은 다음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빵집 종업원의 이름이었다.
“거절하면 다른 사람으로 옮겨 가는군요.” 셀레나가 말했다.
“거절을 이해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민규가 답했다. “승인 받을 때까지 이름을 찾도록 만든 거죠.”
중앙 기록망을 따라가자 열여섯 주소가 다시 나타났다. 모두 같은 구조 요청 회선에 연결돼 있었지만 건물 형태는 달랐다. 빈 병원, 운영 중인 구호소, 폐교, 화물 창고, 기차역, 작은 보육원까지. 단순히 장치 목록을 보아서는 어느 곳이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케스는 현지 담당자에게 위험을 확인하도록 요청했고, 민규는 학생과 환자 등 즉시 보호가 필요한 인원이 있는 시설부터 연락했다.
첫 번째로 회신한 곳은 해변 의료소였다. 새벽 당직자는 종종 정해진 시간에 환자 보호자 이름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동안은 데이터 오류로 분류하고 전산을 다시 시작했다. 보호자들이 수술 설명을 들으러 왔다가 출입증이 없어 문 앞에서 기다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가 오늘 처음으로 원점 귀환 회선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일을 확정해 말하진 마십시오.” 케스가 말했다. “다만 보호자 확인을 자동 시스템에만 맡기지 말고 사람이 직접 대조해 주세요.”
다음으로 연락된 곳은 북쪽 보육원이었다. 아이들은 안전했고 복도 경보도 정상 작동 중이었다. 하지만 오래된 화재 대피 명단 아래에는 매주 월요일 오후 여섯 시 십팔 분에 ‘임시 보호자 자동 배정’이라는 항목이 생성됐다. 담당자는 그 문장을 무시하고 실제 보호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왔다고 했다. 장치가 사람을 잘못 부르더라도 누군가가 직접 확인해 피해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민규는 그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현장 사람들의 오랜 대응을 단순한 임시방편으로 깎아내리지 않았다. 다만 근무자가 바뀌거나 모두 바쁜 날에도 같은 수준의 안전을 유지하려면 규칙을 고쳐야 했다. 장부마다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오류는 결국 사람의 주의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세 번째로 연락된 산골 폐교에서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연결된 계측기에서 작은 맥박 소리가 돌아왔다. 학교는 삼십 년 전 폐교됐고 전원도 끊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바르트는 음향을 분석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 맥박은 실제 심장이 아니라 연진의 심장 신호가 복제된 파형이었다. 중앙이 한 사람의 시간을 열여섯 곳에 담보처럼 배포한 흔적이었다.
“그럼 열여섯 곳에 연진 씨가 있는 건가요?” 루카가 물었다.
“아니야. 그렇게 결론 내리면 위험해.” 민규는 대답했다. “복제된 신호만 있을 수도 있고, 실제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각각 현장을 확인해야 해.”
그는 사라지지 않은 원본을 찾고 싶었다. 인명을 구하는 데 시간을 쓰는 동안 책임자의 흔적이 지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이해했다. 그래서 케스와 업무를 나누었다. 케스는 지시 원본과 책임 소재를 보존하고, 민규와 바르트는 연진이 있는 통로의 독립 회신을 유지했다. 셀레나는 마법 회선을 분리해 다른 시설로 위험이 전파되지 않도록 감시했다.
케스는 각 시설 담당자에게 같은 질문을 보내지 않았다. 의료소에는 환자가 실제로 안전하게 치료받고 있는지, 보육원에는 보호자 연락망이 정상인지, 폐교에는 건물이 사용 중인지 물었다. 현장에 따라 위험의 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효과를 본 회선 차단 방법을 모든 곳에 동시에 적용하면 오히려 새로운 사고가 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답변에는 고장 난 마법 장치 사진이 아니라 의료소 직원들의 야간 인수인계표가 첨부돼 있었다. 업무를 넘겨받는 사람이 실제로 서명하고 옆에 인원 확인 시간을 적은 문서였다. 자동 기록망이 보호자를 지우는 동안에도 직원들은 종이 장부를 사용해 환자를 찾아왔다. 바르트는 종이장부를 보며 감탄했다. “제어판보다 낫네요. 고장이 나도 사람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의료소 당직자는 모든 경우에 그 방법이 통하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폭우가 내리는 밤에는 기록을 읽을 사람도 부족했고 이름이 비슷한 환자가 동시에 오면 본인 확인이 어려웠다. 어느 날은 밤새 근무한 간호사가 자기 이름을 잊어버린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그 간호사는 마법 사고에 휘말린 것은 아니었지만 수차례 확인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탈진했다. 사람의 성실함으로 잘못된 시스템을 지탱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민규는 의료소 소장에게 임시 지원 인력이 필요한지 물었다. 소장은 외부인이 와서 명부를 임의로 다루는 건 곤란하다고 답했다. 대신 환자 이름을 확인하는 역할과 서류 이동을 돕는 역할을 구분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케스는 관련 기관과 연결해 인력 지원을 요청했다. 현장에서 부족한 것은 대단한 마법보다 평범한 사람 손 한 쌍일 때가 많았다.
보육원에서는 작은 그림 편지들이 도착했다. 아이들은 낯선 어른에게 구조 작전을 감사한다고 쓰지 않았다. ‘우리 집 현관에 세 번만 노크해 주세요’, ‘저녁에 불 꺼져도 안내등은 켜 주세요’ 같은 소원을 적었다. 미라는 그 편지 중 하나를 읽다가 오래 생각했다.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안전 기준을 아이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 어른들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무엇이 불안한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루카는 각 시설 담당자에게 기록 보존을 요청하는 문장을 고쳤다. ‘모든 자료를 즉시 제출할 것’ 대신 ‘현장 안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보존하고 필요 정보만 공유해 달라’고 적었다. 케스는 왜 그렇게 바꿨는지 묻지 않았다. 병원 기록과 아이들의 신원은 사건을 해결한다는 명분 아래 아무에게나 열어서는 안 될 자료였다. 사람의 이름을 지키려는 조사가 또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빼앗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됐다.
오후 첫 보고 회의를 마칠 때 민규는 오늘 처리하지 못한 시설을 따로 표시했다. 미확인이라고 적힌 칸이 꽤 많았다. 잠깐 초조해졌지만 그는 미확인을 위험 없음이라고 바꾸지도, 반대로 위험 확정이라고 쓰지도 않았다. 시간을 들여 실제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그런 신중함을 배우지 못한 시스템이 지금의 비극을 만들었다.
의료소에서 보낸 작은 영상이 도착했다. 복도 끝 출입문 앞에 젊은 의사가 서 있었다. 화면에는 의사의 명찰이 정상으로 보였다가, 오후 여섯 시 십팔 분의 기록이 나타나자 희미해졌다. 의사는 명찰을 붙잡으려는 대신 환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제 이름은 여기 적혀 있지 않아도 제가 담당 의사입니다. 다른 직원과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명찰은 잠시 후 돌아왔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네요.” 미라가 말했다.
“그래서 더 빨리 고쳐야 한다.” 민규가 대답했다. “항상 잘 버틸 수는 없으니까.”
오후가 되자 빵집 앞에는 구경꾼이 늘었다.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화물역에서 구조 요청이 왔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누군가는 귀신을 보겠다고 휴대용 수정구를 들었고, 누군가는 빵집 주인이 시간을 팔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사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민규는 케스와 상의해 사고 구역을 통제하고 주민에게 확인된 정보만 공지했다. 구조 장소를 흥밋거리로 만들면 정작 대피로가 막힌다.
그 소동 속에서 학교에서는 별도의 문제가 생겼다. 미라가 학생회 게시판에 대피 절차를 올려 놓았는데 누군가 그 밑에 ‘외부 서명자를 대신해 줄 사람 모집’이라는 글을 붙였다. 선의에서 시작한 글이었다. 시간을 조금씩 내놓으면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은 학생들이 동참 의사를 적기 시작했다. 루카는 화를 내며 종이를 찢으려다가 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아무리 좋은 마음이어도 이런 건 안 되는 거죠?”
“응. 정확한 정보를 올려 줘. 사람의 시간을 기부 받는 절차가 아니라고. 그리고 이미 이름을 쓴 학생들한테는 어떤 불이익도 없게 해.”
미라는 학생회 이름으로 안내문을 다시 썼다. 구조에 도움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통로 주변에서 몰려들지 말고, 확인된 피해자와 가족을 위한 물품 지원이나 의료소 업무 지원 창구를 이용할 수 있다고 알렸다. 어느 누구도 대신 갇히겠다는 각서를 쓸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연진의 시계는 여섯 시 서른한 분이었다. 그녀는 통신으로 마을의 새 모습을 듣고 있었다. 지금의 수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화물역 위로 어떤 가로등이 놓였는지, 빵집에서 여전히 아침마다 빵을 굽는지. 사장은 직접 통신기를 잡고 말했다. “빵은 굽죠. 우리 집 할머니가 남긴 방식대로요. 밖으로 나오면 제가 한 개 드릴게요. 돈은 받지 않을게요.”
연진은 작게 웃었다. “저는 빵을 꽤 많이 먹어요.”
사장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두 개 드리죠.”
잠시 뒤 관리 직원이 가져온 철도 수리일지에서 새로운 단서가 나왔다. 여섯 시 십팔 분에 자동으로 회신을 보류하는 구형 릴레이는 통제판 안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열여섯 주소에 각각 같은 모양의 작은 판이 설치돼 있었다. 그중 여섯 개는 아직 살아 있었고 나머지는 폐기 또는 상태 불명이었다. 중앙의 선을 끊더라도 각 현장에 남은 릴레이가 사람을 잘못 지정할 수 있었다.
“그럼 이걸 전부 순서대로 찾을 때까지 연진 씨는 여기 있는 겁니까?” 하준이 물었다.
“아니요.” 바르트가 대답했다. “연진 씨 구조에 필요한 회신만 독립시키면 됩니다. 나머지 장치는 따로 안전 점검을 하면 돼요.”
민규는 지도에 두 종류의 선을 그었다. 붉은 선은 연진에게 직접 연결된 회로, 푸른 선은 독립적으로 조사할 시설. 붉은 선만 임시 우회하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끊으면 어디로 신호가 튈지 몰랐다. 기술자는 수문 비상 전원을 별도로 준비했고, 주변 시설에는 차단 시험 시각을 공유했다.
민규는 열여섯 주소가 적힌 지도에 확인 날짜를 붙였다. 어떤 곳은 사람이 오래전에 떠났지만 기계가 여전히 움직였고, 어떤 곳은 건물이 사라졌는데도 매달 점검 비용이 청구됐다. 그 차이를 실제 조사로 밝혀야 했다. 하준은 지도를 보며 자신이 남겼던 번호가 단지 자기 차례만 뜻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각 번호 뒤에 사람들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그때 수문 조정실의 프린터가 혼자 움직였다. 굵은 종이 한 장에 긴 승인 문구가 찍혀 나왔다. [총국 특별 지시. 최초 귀환자는 외부에 나가서는 안 됨. 사유: 시간 차액 미정산.] 서명자는 제0복귀과장이었다. 이름 없는 직책만 있었다.
케스는 종이를 받아 대조했다. 문서 번호가 이상했다. 당시 보존총국 조직도에는 제0복귀과가 존재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생긴 부서도 아니었다. 누군가 행정망 안에 유령 같은 부서를 만들어 권한을 이어 온 것이다.
“부서가 없는 게 아니라 부서 이름이 사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민규는 거짓 권한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 마지막의 인장 흔적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그 인장은 수문 회로를 만든 회사의 기술 검수 도장과 닮아 있었다. 행정 명령처럼 위장한 것이 실제로는 장치 제조사의 자동 유지보수 지시일 수 있었다.
“당장 누구를 체포할 증거는 없겠네요.” 셀레나가 말했다.
“대신 무엇을 먼저 멈춰야 하는지는 분명해졌습니다.”
그 순간 빵집 아래에서 묵직한 진동이 한 번 울렸다. 연진이 비명을 질렀다. 수문 조정실의 검은 마법석이 깨지면서 작은 조각이 회신 회로 위로 떨어졌다. 화면에는 사장 이름이 다시 떠올랐고, 그 아래에 [외부 서명 15분 내 지정]이라고 표시됐다.
민규는 구조팀을 돌아봤다. 이번에는 자동 장치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방금 찾은 수동 회신 통로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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