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증인 한 명.”
케스는 벽에 나타난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증인이 있으면 연진의 시간이 더는 반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총국의 여러 구조 기록을 검토해 온 그는 곧바로 안심하지 않았다. 비슷한 문구로 사람을 강제 근무자로 지정한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다. ‘증인’이 단순한 관찰자라는 보장이 없었다.
“증명할 대상과 증명 이후의 책임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하준은 서둘러 자원하겠다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또다시 근무자로 필요로 한다고 생각할 때 익숙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자신의 선택인지 장치가 길들인 반응인지 구별하고 싶었다. 민규는 하준의 침묵을 채우지 않았다.
옛 화물역 아래 배수 통로에서 바르트가 작은 기계를 조립했다. 금속 통에 바퀴 넷을 달고 앞에는 두 개의 광원을 붙였다. 골목에서 배달할 때 쓰는 수레만큼 간단했지만 장치의 바닥에는 물이 닿아도 지워지지 않는 실제 이동 거리를 기록하는 펜이 있었다. 공간이 휘거나 반복되더라도 바퀴가 얼마나 굴렀는지 남겨 보려는 것이었다.
“마법 탐지기를 넣지 않습니까?” 셀레나가 물었다.
“넣습니다. 하지만 마법 탐지기가 잘못된 시간을 믿으면 같이 속겠죠. 물리 기록도 있어야죠.” 바르트는 장치 위에 판을 덮었다. “이건 증인이 아니라 측정기입니다. 괜히 사람 대신 계약서를 쓰게 하지 마십시오.”
민규는 그 말을 받아 적었다. 이번 문제는 늘 같은 이름을 새로 배정하던 교환실과 달랐다. 현장에 있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낸 구조 요청에 회신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핵심이었다. 그러니 먼저 누가 무엇을 실제로 받았는지 알아야 했다.
연진은 안에서 서류 배출구 옆 벽을 두드렸다. 누군가 세 번 노크하고 두 번 대답하면 서류를 넘겨 주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과거의 구조 요청 번호를 기억했다. 서류는 네 장이었다. 첫째는 역무실에 대피한 사람 수, 둘째는 막힌 철길, 셋째는 환기구 위치, 넷째는 연락처. 하지만 기록관 인형들은 네 번째 장만 거듭 가져갔다.
“사람 수가 아니라 연락할 사람을 지웠군요.” 루카가 말했다.
“추정은 가능하지만 아직 이유는 모른다.” 민규는 통신기에 답했다. “현장 기록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자.”
수문 사무소의 지하 보관함에는 오래된 종이들이 누렇게 쌓여 있었다. 먼지와 습기에 젖은 서류를 넘길 때마다 얇은 종잇조각이 떨어졌다. 관리 직원은 자주 묻는 서류를 분류해 놓지 못한 데 미안해했지만 민규는 탓하지 않았다. 시설 예산이 끊긴 뒤에는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하고 있었다. 관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줄인 인원이 기록의 빈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서류를 분류하던 중 셀레나가 오래된 접수인 하나를 발견했다. 그 인장에는 ‘회신 접수’ 대신 ‘회신 보류’라는 글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었지만 고무 면에 검은 잉크가 굳어 있었다. 바르트가 인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보니 접수인 바닥에 작은 고정 나사가 있었다. 나사를 돌리자 날짜판이 열렸다. 사고 당일 오후 여섯 시 십오 분. 그 시각에 분명 누군가 회신을 막아 놓았다.
케스는 원문 보고서에 기록된 담당자를 찾았다. 책임자는 본사 철도 연락관이라고 돼 있었지만 서명은 인쇄된 글꼴이었다. 실제 사람이 서명하지 않은 문서가 삼십 년 동안 ‘확인 완료’ 근거로 쓰인 것이다. 그는 곧바로 원본 확보 요청을 보냈다. 사라진 책임자를 벌하는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일단 현장에 살아 있는 사람을 이 문서 때문에 다시 가두지 않아야 했다.
연진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 삼십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자세히 설명해 줄 때마다 잠시 몸이 차가워졌다. 통신으로 바깥의 새 전차 소리가 들렸다. 오래전 화물열차가 지나던 자리 위에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내가 나오면… 역무실 일은 없는 거겠죠?” 그녀가 물었다.
“지금은 없습니다.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는지 함께 알아봐야 합니다.” 민규는 대답했다.
“돌아갈 집도요?”
“그건 확인해야 합니다. 연진 씨가 원한다면 가족이나 아는 사람을 찾는 방법도요.”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답시고 확인하지 않은 약속을 건네는 건 쉽다. 하지만 그 약속이 어긋날 때 다시 다치는 사람은 연진이었다. 민규는 자신의 무력함이 부끄럽더라도 모른다고 말하기로 했다.
한쪽에서는 루카가 삼십 년 전 비 오는 밤에 역무실을 지나갔다는 두 학생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학교의 옛 명단은 비슷한 이름이 많은 데다 기록이 여러 번 덮어써져 정확하지 않았다. 루카는 실습실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당시 임시 대피처의 식권 장부와 의료소 접수 기록을 대조했다. 두 학생에게 지급된 식권 번호가 한 장씩 이어졌고 그 마지막에 ‘보호자 인계’라는 날인이 남아 있었다.
“형, 나간 건 맞을지도 몰라요.” 루카가 말했다.
“좋은 단서다. 하지만 실제 사람이 살아온 기록을 확인한 뒤에 알려 주자.”
하준은 처음으로 민규의 신중함이 답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찾는 동안 그 사람이 이미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은 컸다. 하지만 과거의 귀환 장치들은 바로 그 믿음에 기생해 살아 있었다. 문서에 적힌 단어를 사실보다 앞세우는 순간 또 다른 사람이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기록 대조가 길어지자 루카는 제7시설의 보존실로 돌아갔다. 그는 옛 사고 사진을 정리하는 학생들과 함께 물에 젖은 표를 펼쳤다. 그중에는 이름 대신 번호만 남은 식권도 있었고, 날인이 완전히 번진 대피소 입장권도 있었다. 몇몇 학생은 이름이 흐릿하다고 자료를 버리자고 했지만 미라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사람 이름을 찾으려는 거지, 예쁜 종이를 모으는 게 아니잖아.”
그들은 읽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고, 원본이 훼손되지 않도록 사진을 찍었다. 글자를 임의로 채워 넣지 않았고 확실한 이름은 별도의 자료와 연결해 확인했다. 이 과정은 화려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자료가 증언을 뒷받침할 수 있는지 조금씩 명확해졌다. 사고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구체적인 이름만큼이나 번호와 날짜를 통해 외부 기록에 남아 있었다.
루카는 자료를 정리하다가 현장 수습 목록의 여백에 있던 작은 그림을 발견했다. 역무실 문틀과 의자, 벽시계, 세 개의 신발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 아래에는 ‘발바닥이 젖은 아이 먼저’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린 사람은 실제로 그 장소에 있었을 것이다. 사진보다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낯선 시간이 어떤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흘렀는지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미라는 그림의 의자에 표시된 줄 세 개를 보며 말했다. “신고자의 시선으로 그린 것 같아. 누가 먼저 나갔는지, 어느 신발이 누구 건지 기억하려는 사람이었겠지.”
루카는 그림을 복제해서 케스에게 전달했다. 케스는 연진에게 보여 주기 전에 그녀가 기억을 확인하고 싶은지 물어 달라고 부탁했다. 과거 기억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연진은 통신으로 묘사를 듣자 의자에 매달아 두었던 줄 세 개를 기억해 냈다. 한 줄은 학생 두 명이 함께 묶은 끈이었고 나머지는 직원이 떨어뜨린 신발끈이었다. 연진은 아이들의 신발이 젖을까 봐 그 끈을 매어 놓았다.
“그런 쓸데없는 일을 했네요.” 그녀가 민망해했다.
“그때는 중요했겠죠.” 민규가 말했다. “사람이 추울 때 신발끈 하나가 걸음을 못 걷게 하기도 합니다.”
연진은 작게 웃었다. 삼십 년 동안 자기 역할을 ‘구조가 끝날 때까지 남아야 하는 사람’으로만 들었던 그녀에게는 기이할 정도로 평범한 기억이었다. 누군가의 신발끈을 묶어 주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원래 하던 일에 가까웠다. 그녀는 다시 외부에 남은 사람들의 모습을 물었다. 대피한 아이들이 지금 어떤 어른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배수로에 넣은 측정 수레가 열두 미터를 지나 멈췄다. 앞쪽 바퀴는 계속 회전했으나 이동 거리는 늘지 않았다. 화면 속 복도는 분명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바르트는 수레에 묶어 놓은 얇은 줄의 길이를 재봤다. 줄은 정확히 열두 미터에서 팽팽하게 걸렸다. 영상은 반복된 복도를 보여 줬지만 실제 공간의 길이는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벽 바깥쪽이 아니라 장치 안쪽에서 길을 복사하고 있어요.” 셀레나가 말했다. “앞으로 간다고 믿게 하는 영상입니다.”
민규는 수레를 조금 뒤로 뺐다. 화면의 복도는 계속 앞으로 움직였다. 이제 속임수가 확실했다. 영상과 실제 움직임이 다른 것이다. 민규는 바깥의 점검구를 열어 반복 화면을 만드는 영사판을 찾아냈다. 유리처럼 맑은 수정판 위에는 오래된 학교 문장이 찍혀 있었다. [안전을 위한 시각적 유도.] 언뜻 좋은 말이었지만, 누군가에게 닿아야 할 구조팀을 같은 자리에서 계속 걷게 할 수도 있는 장치였다.
영사판 뒤에 원래의 통로가 드러났다. 서류 배출구로 이어지는 짧은 물길과 작은 선반이 보였다. 셀레나는 정해진 보호 마법을 사용해 종이가 물에 젖지 않도록 했다. 연진이 안에서 넘긴 첫 번째 서류가 그 길을 지나왔다. 그것은 구조 요청 원본이 아니었다. 사고 당일 대피한 세 사람이 연진에게 써 준 짧은 쪽지였다.
‘우리를 먼저 보내 준 언니를 잊지 않겠습니다.’
세 명의 서명이 있었다. 두 명은 학생, 한 명은 직원이었다. 이름 하나는 잉크가 흐릿했지만 세 사람의 필체가 서로 달랐다. 그들은 정말 안쪽을 떠났고, 연진은 떠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서류 뒤에는 같은 펜으로 적은 작은 숫자가 있었다. 6:18. 그들의 퇴출 시각이었다. 민규는 그 숫자를 케스에게 읽어 줬다. 케스가 찾은 외부 의료소의 첫 접수 시각은 6:19였다. 기록이 서로 만났다. 삼십 년간 따로 떨어진 두 자료가 정확히 한 분 차이로 이어진 것이다.
“회신할 대상이 생겼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민규는 연진에게 알려 주기 전에 다시 확인했다. 두 학생의 이름이 그 뒤로 어떻게 기록됐는지, 직원이 어디로 옮겨졌는지 정보 접근 권한을 지킨 범위에서 대조했다. 자신을 구해 줬다는 사실 때문에 평생 응답 의무를 지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피해자의 개인정보는 필요 최소한만 보관했다.
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밖에 나간 거예요?”
“네. 실제 접수 기록이 있습니다. 아직 연락하기 전이지만, 세 분이 밖으로 나간 건 확인했습니다.”
마지막 기록을 정리하던 루카는 종이 쪽지의 잉크가 번진 부분을 무리하게 되살리려 하지 않았다. 대신 다섯 가지 다른 빛으로 사진을 찍어 글씨가 실제로 남은 곳만 표시했다. 가장 잘 보이는 사진에는 세 사람의 이름 끝자리가 모두 다른 모양으로 드러났다. 연진의 기억과 외부 장부가 일치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는 그 자료를 다듬어 보기 좋은 이야기로 만드는 대신 불확실한 글자까지 포함한 원본 이미지 그대로 케스에게 보냈다.
“읽기 어려우면 어렵다고 보고하면 되겠죠?” 루카가 물었다.
“그게 더 정확한 보고야.” 민규가 말했다. “우리는 예쁜 답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찾고 있으니까.”
갑자기 벽의 종이 멈췄다. 여섯 시 십팔 분으로 표시된 시계가 더는 뒤로 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반복이 멈춘 순간이었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기도 전에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귀환자 확인 가능. 증인 서명 시 외부 인원 한 명의 시간 차감.]
하준이 본능적으로 손목을 감쌌다. 장치는 여전히 누군가가 대신 시간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민규는 서명란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장치의 옆면을 열었다. 위에 달린 증인 서명부와 밑에 연결된 시간 차감 회로는 서로 다른 나사로 고정돼 있었다.
루카는 바깥쪽으로 접힌 지도에 오늘 날짜를 썼다. 과거의 두 기록이 만났다고 해서 조사 전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적은 숫자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할지 알려 주었다. 잘못된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원래의 사람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건 하나의 절차가 아닙니다.” 민규가 말했다. “누군가 두 개를 묶어 놓은 겁니다.”
그가 찾은 것은 또 다른 마법의 주문이 아니라, 육각형 나사 하나의 규격이었다. 30년 전 누군가 빠르게 고치려고 쓰고 남긴 규격. 이제 그 나사가 누구의 손으로 조여졌는지 알아볼 차례였다.
제16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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