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사람을 구하기 위해 스물아홉 사람을 지워야 한다.
마틴이 남긴 말은 하룻밤 사이에 학교 전체로 퍼질 만한 내용이었다. 셀레나는 당장 교직원 회의를 열자고 했고 루카는 학생회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민규는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다만 먼저 한 가지를 확인하자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틴은 실험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관리자가 설명했어요. 기록망이 같은 숫자의 자리를 유지해야 해서 누군가 돌아오면 다른 누군가 지워져야 한다고요.”
“직접 본 적은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아직 관리자의 주장입니다. 학생들에게 사실로 알리지는 맙시다.”
셀레나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맞춰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누군가를 희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부가 그런 식으로 설계됐다면 장부의 한계일 수도 있었다.
“원래 명부에는 정정 절차가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 사라져야만 이름이 돌아온다는 규칙은 확인되지 않았죠.”
“맞습니다. 10화 때 우리가 이름을 되찾은 방법을 다시 보죠. 실제 사람을 지운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한지부터 시험합시다.”
그들은 실험실에 작은 임시 기록대를 설치했다. 학교 장부와 연결되지 않은 종이, 유리판, 옛 인쇄기에서 떼어 낸 수동 활자, 필름. 민규는 그 앞에 ‘외부 확인용’이라는 글씨를 써 붙였다.
“이건 왜 만든 거예요?” 루카가 물었다.
“실종자를 찾을 때, 어떤 기록이 진짜로 반응했는지 구분하려고.”
“그냥 0층에서 이름 읽고 정정 신청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 있는 학생들은 구했지. 하지만 삼십 년 전 실종자들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잖아. 신분을 인정받는 일과 몸을 데리고 나오는 일은 다른 문제야.”
마틴은 침대에 앉아 그들의 작업을 지켜봤다. 자신이 원래 있던 누군가의 자리를 차지했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규는 종이 두 장을 보여 주었다. 하나에는 마을 주민이 직접 적은 자기소개가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마법 장부에서 복사된 마틴의 정보가 있었다.
“이 두 종이는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직접 목격한 사람이 남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 입력한 자료죠. 출처가 다른 겁니다.”
“제가 직접 기억하는 게 없다면, 저는 누구예요?” 마틴이 물었다.
민규는 한동안 답을 고르다가 말했다.
“지금 당신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다는 사실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건 기록에서 누가 시켜서 읽은 문장이 아니잖습니까.”
“그걸 어떻게 알죠?”
“아직 단정할 수는 없어요. 다만 당신을 검증한다는 이유로 없애는 쪽은 택하지 않겠습니다.”
임시 기록대를 만든 뒤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셀레나의 제자였다. 이름을 잃었다가 돌아온 1학년 학생이었다. 학생은 자신이 친구들에게 빌린 책을 되돌려주려고 했는데, 도서관에서 대출 기록이 없다고 해서 책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 책은 어디 있니?” 민규가 물었다.
“제가 갖고 있어요. 그런데 대출 기록이 없으면 반납해도 소용없대요.”
“그럼 책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부터 기록해 보자.”
학생은 책을 탁자에 올렸다. 낡은 표지의 오른쪽 귀퉁이에 조그만 상처가 있었다. 민규는 그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고 책장 안의 필기 흔적을 확인했다. 그리고 학생에게 대출 날짜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정확한 날짜는 잊었지만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고 했다.
“그 정도면 시작할 수 있어. 그날 비가 왔다는 다른 증거를 찾으면 되겠지.”
셀레나는 학교의 날씨 기록을 불러오려다가 손을 멈췄다. 마법 기록망 자체가 오류의 원인일 수 있었다. 대신 창고의 수기 근무일지를 꺼냈다. 비가 와서 복도 물청소를 두 번 했다는 기록이 같은 날짜에 남아 있었다.
“찾았어요!” 학생이 외쳤다.
“잘했어. 이제 도서관장에게 이 증거를 보여 주자.”
그들은 대출 기록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작은 일이었지만 학생은 책을 반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민규는 수첩에 작은 문장을 적었다. ‘사람의 기록은 큰 사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빌린 책을 돌려주는 일조차 기록망이 틀리면 불가능해질 수 있었다.
마틴은 그 모습을 보며 오래 침묵했다. 자신에게는 빌렸다가 돌려줄 책도, 함께 비를 맞은 친구도 없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듯했다. 그는 민규에게 물었다.
“저는 새로 생긴 기억밖에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빈사람일까요?”
“기억이 짧다고 사람이 비어 있는 건 아닙니다. 오늘 누구를 만나고 무슨 선택을 했는지부터 적어 보세요.”
마틴은 서툰 손놀림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쓰려다가 멈추고 그 아래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민규는 그 종이를 구겨 버리지 않았다. 마틴이 실제로 어떤 존재이든 지금 한 선택은 장부에서 복사해 온 정보와 달랐다. 서기관은 이런 차이를 알고 있을까. 혹은 알면서도 의미 없다고 판단했을까.
다음 날 아침에는 학교 행정실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비공식적인 종이 기록대를 운영하면 학생 명부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었다. 민규는 행정실장을 만나 임시 기록대의 목적을 설명했다. 이곳은 정식 학적을 바꾸는 곳이 아니라, 기록망이 틀렸을 때 사람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보관하는 장소라고 했다.
“그러니까 오류를 수정하는 권한이 이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운영할 필요가 있습니까?” 행정실장이 물었다.
“오류가 생긴 이유를 찾아야 다시 고칠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적어 놓지 않으면, 누가 무엇을 바꾸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행정실장은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셀레나가 어제 복구한 학생들의 사례를 보여 주자 몇 장의 수기 기록은 정식 민원으로 접수하기로 했다.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장부 하나에 모든 것을 맡기지는 않게 됐다.
그날 오후 학생들이 정리한 이름 없는 편지는 백 장이 넘었다. 어떤 종이에는 그림이 그려졌고 어떤 종이에는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루카는 그중 자신이 누나에게 보낼 종이만 따로 챙겼다. 그는 세 번이나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 결국 마지막에는 아주 짧게 적었다.
[누나, 난 잘 있어. 서두르지 말고 안전한 데 있어 줘. 기다릴게.]
민규는 그 편지를 읽지 않았다. 루카가 스스로 접은 종이를 받아 전달함에 넣어 주었다. 누군가를 찾는 일에서 필요한 건 단서를 모으는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동안 상대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는 일도 필요했다.
그날 저녁, 0층에서 새로운 신호가 왔다. 좁은 금속관을 통해 접힌 종이가 한 장 올라왔다. 미라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의 필체였다. 민규는 루카가 답을 먼저 말하지 않은 그 질문을 이번에는 다시 묻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확인 방법을 준비했다.
편지에는 다른 종류의 증거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종이가 아니라, 아래쪽 방에만 있을 만한 작은 물체의 그림자를 빛으로 투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0층은 빛을 옮길 수 있었고, 누군가가 실제 물건을 움직인다면 복사된 목소리와 다른 흔적이 남을 수 있었다.
얼마 뒤 인쇄실의 오래된 벽면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동그란 손잡이와 그 옆에 부러진 나사 하나. 앞서 미라가 그렸던 압력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화면의 한쪽 끝에 실제 사람의 손처럼 보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나타났다.
루카는 숨을 멈췄다.
“누나가 직접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아직 화면 반대편을 볼 수 없으니까.”
“그럼 확인해 봐요.”
루카는 종이에 짧은 요청을 썼다.
[손잡이를 왼쪽으로 조금만 움직여 줘. 위험하면 하지 마.]
그림자는 잠시 멈췄다가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손잡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판 아래에 작게 글씨가 나타났다.
[지금 움직이면 안 돼. 바늘이 빨간색이야.]
민규는 압력계의 그림자를 확대했다. 바늘 끝이 우측 붉은 구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위험을 피하려는 판단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하지만 아직 상대가 미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좋아. 움직이지 마세요. 대신 그림을 옮기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세요.”
그는 필름을 교체하며 시간 변화를 기록했다. 삼십 분이 지났을 때 압력계 바늘이 미세하게 내려갔다. 다시 십 분이 지나자 조금 올라갔다. 정해진 주기라기보다 반대편에서 무언가 들락거릴 때마다 바뀌는 듯했다.
셀레나가 계산식을 꺼냈다.
“아래쪽 압력이 외부 배출구와 연결돼 있어요. 마을의 주민 명부가 바뀔 때마다 잠깐씩 상승합니다.”
“확실합니까?”
“지금까지 세 번 맞아떨어졌어요.”
“그럼 네 번째는 우리가 통제한 조건에서 비교해 봅시다. 마을 기록망과 연결되지 않은 시간에 측정하고요.”
민규는 마을 경비대장에게 무전했다. 가짜 이름을 새로 등록하거나 기존 이름을 삭제하지 말고 수기로만 확인하라는 요청이었다. 마을은 두 시간 동안 모든 기록망 입력을 중단했다.
그동안 압력계 바늘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상관관계는 강하네요.” 셀레나가 말했다.
“네. 그렇다고 사람들이 기록을 쓸 때마다 압력이 오르는 이유가 밝혀진 건 아닙니다. 누가 기록을 조작할 때만 올라가는지 봐야죠.”
바로 그때 또 다른 편지가 왔다.
[그들은 너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어.]
발신자 이름은 없었다. 대신 뒤쪽에 연필로 작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루카는 별을 보고 눈가를 문질렀다. 어린 시절 누나가 숨겨 둔 빵 껍질을 ‘별’이라고 부르던 기억 때문이었다.
“왜 저 사람들이 문을 열길 기다릴까요?”
민규는 제2도면을 펼쳤다. 회수 승강로를 직접 여는 장치는 붉은 구역에서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면 아래쪽 공기가 한 번에 위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방향이 문제입니다. 우리 쪽에서 아래로 간다고 생각해도, 아래에 쌓인 게 위로 올라올 수 있죠.”
“그럼 문을 열지 말아요.”
“당연히 지금은.”
셀레나가 놀라며 물었다. “나중에는 열 생각이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 안에 있다면 언젠가는 들어가야 합니다. 다만 통로의 상태를 모른 채 열지는 않을 겁니다.”
루카가 손을 들었다.
“그럼 먼저 바깥에 안전한 장소를 만들고, 안쪽으로 연락할 수 있는 길을 하나 더 놓으면 되지 않아요?”
“무슨 길?”
“종이로요. 편지가 오가잖아요.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단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안전한 곳을 알려 주는 거예요.”
민규는 루카를 바라봤다. 학생답게 단순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유용했다. 정보와 사람을 한꺼번에 옮길 필요가 없었다. 먼저 연락망을 만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종이 피난로군.”
“멋진 이름이네요!”
“이름은 네가 붙여. 대신 절차도 만들어야 해.”
그날 밤부터 인쇄실은 임시 구조 본부가 됐다. 학교의 학생들은 아래로 보낼 쪽지를 만들었고, 교수들은 수기로 구조 경로를 그렸다. 주민들은 마을의 옛 우물과 제분소를 대피 장소로 제공했다. 누구도 아래에 갇힌 사람들에게 당장 올라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먼저 그들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위험한 문에서 떨어지라고 알렸다.
민규는 첫 안내문 맨 위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 누구이든, 현재 있는 곳과 위험한 곳을 먼저 알려 주십시오. 이름을 모르면 이름을 적지 않아도 됩니다.]
문장은 그가 밤새 생각해 고른 것이었다. 이름이 지워지는 이곳에서 자기 이름을 쓰라고 강요하는 일은 위험할 수 있었다. 누군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방식이어야 했다.
쪽지를 보내는 규칙도 새로 정했다. 위험에 처했다는 편지는 붉은 색 표시로, 위치를 알려 주는 편지는 파란색으로, 아직 확인하지 못한 내용은 아무 표시 없이 보관하기로 했다. 루카는 학생들 사이에서 규칙을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처음에는 말을 더듬었지만, 친구들이 알아듣기 시작하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알아낸 게 있다고 해서 무조건 소리 지르면 안 돼요. 누군가 흉내 낼 수도 있으니까요. 정말 위험할 때는 직접 사람을 부르고, 편지에는 자기가 본 것만 적어요.”
학생회장은 그 말을 듣고 놀랐다.
“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저도 여러 번 당했거든요.”
루카는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는 종이 상자마다 접수 시간을 적고, 확인되지 않은 편지를 따로 묶었다. 작은 손잡이가 달린 상자를 벽에 걸자 금속관에서 떨어지는 종이들이 바닥에 흩어지지 않았다. 민규는 루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구조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 한 번 멋지게 행동하는 일이 아니라, 다음 사람이 실수 없이 이어받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었다.
처음 돌아온 응답은 점 세 개였다. 두 번째는 찢어진 지도 조각이었다. 세 번째는 작은 손바닥 자국이었다. 모두 다른 곳에서 보낸 듯했다.
마지막 편지는 한밤중에 도착했다. 얇은 종이에는 빛바랜 연필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스물아홉이 아니야.]
민규는 문장 아래의 획을 자세히 살폈다. 글씨는 너무 작고 급해서 어린아이가 쓴 것 같았다. 그는 편지를 불빛에 비추었다.
뒷면에 다음 문장이 숨어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건 스물여덟 명. 한 명은 문을 지키러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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