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전에 작성된 해고 통보서를 손에 든 정민규는 먼저 종이의 모서리를 살폈다.
문서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서기관이 건넨 순간까지 봉투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짜와 도장은 오래전 것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해고 사유였다.
[기록 관리자 권한을 초과하여 존재 확인을 반복함.]
민규는 눈썹을 들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게 권한 초과입니까?”
서기관은 은빛 배지를 바로잡았다.
“관리 명부가 이미 답을 제공했는데도 반복해서 질문하면 시스템 안정성이 떨어집니다.”
“사람이 눈앞에 있어도 명부가 없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라는 말씀인가요?”
“정확한 정의는 그렇습니다.”
“그럼 안정적이긴 하겠네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학교는.”
서기관은 그 말이 비웃음인지도 구별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문서를 회관 직원에게 건넸다.
“해당 인물의 출입 권한을 정지하십시오. 학교 경비원이라 주장하더라도 인정하면 안 됩니다.”
직원은 곤란한 얼굴로 민규와 서기관을 번갈아 봤다. 바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그 사람은 오늘 내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 줬소.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으면 적어도 내 눈으로 본 일을 믿겠소.”
서기관의 얼굴이 아주 잠깐 흐려졌다. 그가 서 있는 바닥에 그림자가 두 개 겹쳤다.
“주민의 개인적 판단은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그는 회관을 떠났다. 문이 닫히자마자 루카가 해고 통보서를 낚아챘다.
“아저씨, 삼십 년 전에 잘린 사람이면 애초에 여기 취직도 못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게. 월급은 누구한테 받았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루카가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민규도 농담을 끝내고 종이를 두 겹으로 접었다. 해고 통보서는 분명 위협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기관이 ‘정민규’라는 이름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셀레나는 마을 지도를 펼쳤다. 주민들의 기억이 흔들린 곳을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하자 이상한 선이 드러났다. 하멜의 빵집과 제분소, 회관이 거의 같은 배관을 따라 놓여 있었다.
“마나 공급선 주변부터 영향을 받고 있어요.”
“그럼 이번에는 주민 명부를 통째로 바꿀 수 있겠군요.” 민규가 말했다.
“왜 그런 일을 할까요?”
“기록을 고치는 게 목적이 아닐 수도 있죠. 누군가 새로운 사람인 척하려면, 원래 있던 사람을 지워야 하니까.”
루카가 뒤를 돌아봤다.
“우리 뒤에 누가 따라오는 것 같은데요.”
좁은 돌길 끝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회색 조끼를 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길 건너편 식료품점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루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사람 아까 회관에서도 봤어요. 직원처럼 서 있었는데 이름표가 없었어요.”
민규는 남자를 바로 쫓지 않았다. 누군가를 의심할 때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잘못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함부로 몰아세우지 않는 일이었다.
“가게 주인에게 먼저 물어보자.”
식료품점 주인은 남자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마틴 씨잖아요. 옆집에서 채소를 길러서 우리한테 납품하는 분이오.”
“언제부터 거래하셨습니까?”
“글쎄, 십 년은 됐지.”
“최근에 직접 물건을 받은 적이 있나요?”
주인은 잠시 생각했다.
“어제 장부에는 들어왔는데… 아, 직접 얼굴을 본 기억은 안 나네요.”
민규는 다른 가게 두 곳을 더 돌아봤다. 모두 ‘마틴’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고 거래한 금액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물건을 받은 날짜를 물으면 대답이 흐려졌다. 지난주의 날씨나 그날 나눈 대화를 묻자 누구도 정확한 장면을 기억하지 못했다.
루카가 속삭였다.
“가짜 사람이에요?”
“아직 모른다. 장부에만 있는 사람이거나, 주민들이 장부를 통해 그렇게 믿게 됐을 수도 있어.”
셀레나는 남자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마나를 살폈다. 흐릿한 은색 흔적이 있었다. 학교의 학생 명부와 같은 계열의 서명이었다.
“기록망에서 생성된 표식이에요.”
마틴이 다가오기 전, 민규는 근처의 오래된 텃밭 창고에서 발견된 물건들부터 확인했다. 주민들에게 마틴의 거짓말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다. 누가 실제로 채소를 심고 수확했는지만 확인했다. 창고에는 물뿌리개와 삽, 낡은 장갑이 있었다. 장갑의 손바닥에는 오래된 흙이 굳어 있었지만 창고 안의 먼지는 며칠 동안 누군가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
“마틴 씨가 농사를 지었다고 말한 기간보다 실제로 사용한 기간이 훨씬 짧은 것 같아요.” 셀레나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고를 새로 옮긴 것일 수도 있겠죠.”
“어떻게 구별하죠?”
“근처 이웃들에게 언제부터 이 창고에서 소리가 났는지 물어봅시다.”
옆집 할머니는 마틴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창고가 비어 있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당황한다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마틴과 십 년 동안 인사를 나눴다고 기억하면서도, 일주일 전 창고의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는 사실도 분명히 기억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헷갈리는 걸까요?”
“그렇게 단정하지 마세요.” 민규가 말했다. “두 기억이 서로 모순된다는 점을 적어 두면 됩니다. 어느 쪽이 왜 틀렸는지는 함께 확인하면 돼요.”
할머니는 오래된 서랍에서 일기를 가져왔다. 그녀는 매일 날씨와 몸 상태를 적는 습관이 있었다. 일주일 전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동쪽 빈집에 불빛이 들어옴. 낯선 남자 한 명이 문을 열었음.]
그 전날에는 빈집의 창문을 수리해야 한다는 글이 있었다. 민규는 날짜를 확인하고 할머니에게 원본을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일기에 손을 대지 않고 복사만 한 뒤, 동행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
“할머니는 잘 기억하신 거예요. 누군가 다른 기억을 덧씌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기가 노망이 났다고 생각해 며칠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루카는 할머니가 내민 따뜻한 차를 받아 들었다. 그는 할머니의 일기장 옆에 자기 공책을 놓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마틴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날짜를 맞춰 봤다. 그동안 민규는 학교와 이어지는 배관의 위치를 살피고 있었다. 마틴이 갑자기 등장한 곳은 기록망의 분기점 바로 위였다.
“누군가 이 자리를 골라 넣은 겁니다.”
“왜 하필 여기요?” 셀레나가 물었다.
“명부를 통해 기억을 많이 전달하는 곳이라서일 수도 있겠지요. 가게와 창고가 많으니까.”
민규는 창고 문에 붙은 새 종이를 발견했다. 납품 날짜가 적힌 종이였다. 다른 기록처럼 완벽하게 깨끗한 종이가 아니라, 한쪽 모서리에 실제 비가 튄 얼룩이 있었다. 마틴이 나타난 뒤에도 그가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했다는 뜻이었다.
“가짜 기록에서 시작했더라도, 지금까지 한 행동이 모두 가짜라는 뜻은 아닙니다.”
루카가 물었다. “그 사람도 이제 자기 삶이 있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정할 일이 아닐 수도 있어. 대신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지,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고 있는지 확인할 수는 있겠지.”
마틴을 붙잡으려 하기 전에 그들이 택한 마지막 방법은 공개된 장소에서 대화하는 것이었다. 민규는 학교 마당처럼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장 입구에서 질문하기로 했다. 누군가 다치거나 사라지는 일이 생겼을 때 적어도 목격자가 있어야 했다. 그 배려가 마틴에게도 공정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그때 남자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저를 찾으신다면서요.”
목소리는 온화했다. 손에는 채소가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흙이 묻은 당근과 파가 제법 신선해 보였다.
“거래를 확인하려고요. 혹시 어디서 농사를 지으십니까?” 민규가 물었다.
“마을 동쪽 텃밭이지요.”
“요즘 흙이 많이 마르지 않습니까?”
“적당합니다. 지난주 화요일에 비가 왔으니까요.”
루카가 민규를 힐끗 봤다. 지난주 화요일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마을에서 그들이 만난 모든 사람은 가뭄 이야기를 했다.
“화요일에 비가 왔다고요?”
“명부의 날씨 기록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실제 흙을 만져 보셨습니까?”
“당연하지요. 저는 농부입니다.”
민규는 바구니 안의 당근 하나를 가리켰다.
“그럼 이 당근은 왜 잎이 아직 젖어 있습니까? 오늘 텃밭에 물을 줬다면 오후인데도 흙이 이렇게 마르진 않을 텐데요.”
남자는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당근 잎에 붙은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런데 땅에 닿기 전에 작은 글씨 조각으로 바뀌어 사라졌다.
루카가 뒤로 물러섰다. 셀레나는 보호막을 준비했지만 민규가 손으로 막았다.
“급하게 공격하지 마세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마틴입니다. 여기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기록에 적혀 있네요. 그런데 직접 기억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달 가장 기뻤던 일이 무엇입니까?”
“지난달 수입이 십팔 퍼센트 늘었습니다.”
“화가 났던 일은요?”
“작황 손실이 이 퍼센트 있었습니다.”
“가족과 다툰 일은 없습니까?”
남자의 얼굴이 잠시 빈 종이처럼 펴졌다. 셀레나의 손끝에서 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남자는 다시 표정을 되찾고 말했다.
“가족 관계의 세부 내용은 비공개입니다.”
민규는 남자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다만 바구니를 든 손에 닿지는 않았다.
“당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바로 잡아 가두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렸다면 그건 돌려주셔야 합니다.”
남자의 눈동자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대체 인원: 확인 완료.]
“저는 명부에서 배정받은 자리를 맡았습니다.”
“누가 배정했습니까?”
“관리자가요.”
“서기관입니까?”
남자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저도 제 이름이 언제부터 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남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구니의 채소들이 바닥으로 쏟아졌고, 몇 개는 진짜 흙을 묻힌 채 굴러갔다. 민규는 무릎을 꿇고 맥박부터 확인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맥박과 닮은 규칙적인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이 사람을 실험실로 옮깁시다. 구금이 아니라 보호가 먼저예요.”
루카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보호 조치를 하려는 거야. 혼자 내버려 두면 더 위험하겠지.”
학교까지 이동하는 동안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셀레나는 그를 움직이지 않는 침대에 눕힌 뒤 마나 상태를 관찰했다. 일반 학생과 달리 그의 몸에는 하나의 고정된 기억핵이 없었다. 대신 여러 사람의 짧은 습관과 거래 기록이 얽혀 있었다.
“정말 기록으로 만들어진 존재인가 봐요.”
“그렇다고 통증을 못 느끼거나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 건 아니겠죠.” 민규가 말했다.
셀레나는 침대 옆에 놓인 당근을 들어 올렸다. 흙과 물은 진짜였고, 잎의 나머지 부분도 멀쩡했다. 마틴이 처음부터 모든 걸 가짜로 만든 것은 아닌 셈이다.
“기록망이 실제 물질까지 영향을 준 거라면….”
“잠깐, 여기.” 민규가 말을 끊었다.
마틴의 소매 안에 빳빳한 종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임명장이었다.
[마을 대체 인원 1호. 원 소유자 반환 시 폐기.]
서기관의 은색 도장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반환 예정 원 소유자: 미확인.]
루카는 눈을 크게 떴다.
“마틴 씨가 들어간 자리에 원래 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찾아야지.”
민규는 종이의 날짜를 확인했다. 마틴의 임명일은 삼십 년 전이 아니라 전날 새벽 두 시 십칠 분이었다. 이번 학교 사고가 끝난 직후였다.
창가에서 셀레나가 낮게 말했다.
“서기관은 우리가 루카를 되찾은 방법을 본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이용하기 시작했어요.”
잠들어 있던 마틴이 갑자기 눈을 떴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주위를 바라보다 민규의 옷깃에 달린 경비 배지를 붙잡았다.
“당신이군요.”
“저를 압니까?”
“그분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당신이 원래 자리를 비워 줘야 제가 살 수 있다고.”
민규는 배지를 떼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는 제 근무지입니다. 누구도 당신을 없애야 한다고 결정하지 않았어요.”
마틴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분은 말했어요. 아래에 갇힌 사람 스물아홉 명을 되찾으려면, 위에 있는 사람 스물아홉 명의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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