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서가 출력되자마자 교내 게시판에는 새로운 공지가 붙었다. [긴급 야간 관리자 모집. 한 사람의 헌신으로 두 사람의 귀환을 보장합니다.] 공지의 글씨는 단정했고 가장 아래에는 따뜻한 색의 별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어려운 자원봉사를 권하는 포스터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규는 마지막 줄을 읽고 멈췄다. 지원하지 않으면 두 사람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조건은 자발성의 근거가 아니었다.
“철거하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루카가 게시판을 보며 물었다.
“게시물은 지워도 계약 장치는 남아 있을 겁니다. 누군가 같은 문구를 또 보게 될 수 있어요.”
루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누나 미라를 찾느라 수년간 출입 장부에 매달렸던 일을 잊지 않았다. 어떤 장부는 실종된 사람에게 지각했다는 벌점을 줬다. 지금 게시판의 방식도 비슷했다. 도울 사람이 없어서 구조가 늦어지는 게 아니라 구조를 하려면 누군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학생회는 공지를 보고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한 학생은 마법 실력이 좋은 사람이 지원하면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생은 교사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 관리자가 몰래 이름을 적어 넣을 거란 소문도 돌았다. 오르반은 소문을 막으려고 방송을 하려다가 민규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전교생에게 사실을 알려야겠네. 하지만 불안을 키우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일세.”
“확인된 사실과 아직 모르는 점을 구분해 주십시오. 지원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겠다고도요. 누군가 영웅이 되겠다고 나서는 일이 구조 절차를 대신하면 안 됩니다.”
오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에서는 교환실 인근 통행을 제한하고 전문가들이 안전을 확인 중이라는 사실, 누군가의 근무 지원으로 구조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다른 학교의 지원 인력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도 위험과 역할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겠다고 했다. 한 학생이 왜 즉시 구조하지 않느냐고 항의했을 때도, 오르반은 서류상 완료가 실제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흉터 없는 남자는 공지가 내걸린 뒤 말수가 줄었다. 그는 자신이 지원하면 모두가 안전해질 것이라는 장치의 계산을 몇 번이나 읽었다. 민규는 억지로 그 종이를 빼앗지 않았다. 대신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현장에 남아 조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의외의 질문을 했다.
“당신이 정말 어린 민규라면, 나를 구하려고 할 이유가 없어요.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밥을 먹고 근무했으니까.”
“내 이름이 당신에게 어떻게 붙었는지 아직 모르잖습니까.”
“내가 더 잘 압니다. 제17대 귀환자라는 문구를 매번 봤으니까.”
남자는 자신의 수첩을 펼쳤다. 거기에는 꿈처럼 이어진 여러 날이 적혀 있었다. 눈이 오던 새벽에 학교 외벽을 고친 날, 폭우가 내리던 밤 처음 보는 학생의 신발을 말려 준 날, 보일러가 멈춰 모두가 담요를 나눠 쓴 날. 실제 학교 기록에 없는 날도 있었지만 그가 느낀 추위와 기쁨까지 누가 거짓으로 만들 수 있을까. 민규는 수첩을 원본으로 받지 않았다. 남자가 가져온 물건이니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이 기록은 당신 것입니다. 내 것이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흉터 없는 남자가 오래 생각하다 말했다. “나는 지금 내 이름이 필요합니다. 정민규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럼 당신이 원하는 이름을 정할 수도 있어요. 다만 누군가 기록에서 지우려고 강요한다면 그건 반대하겠습니다.”
남자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민규도 알았다. 자기 것이었던 적 없는 이름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지난 세월이 자동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케스는 지원서의 발급 경로를 확인했다. 본부의 보관망에는 정식 근무 모집 기록이 없었다. 대신 삼십 년 전 교환실의 자동 교대 기능에 여러 차례 추가된 문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구조 대기자를 임시로 보호하라는 지시였다. 이후 보호자가 비어 있을 때 관리자 이름을 대입하는 기능이 생겼고, 마지막에는 대기 상태를 끝내려면 새로운 관리자가 남아야 한다고 바뀌었다.
“인력 부족을 보완하려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는 장치가 된 겁니다.” 케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인력 문제가 해결됐는지부터 확인해 봅시다.” 민규가 답했다.
바르트가 원격으로 보내 준 기술 보고서는 뜻밖에 간단했다. 통신실의 주 제어기는 삼십 년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교대자가 필요한 설비는 실제로 없었다. 문 안쪽의 시간을 유지하는 장치와 외부 구조 회선을 안정적으로 연결하면 사람 없이도 출입이 가능했다. 다만 누군가 그 절차가 성공했다는 표시를 누르기 전에 자동 교대 프로그램이 먼저 작동하도록 변경돼 있었다.
“그럼 성공 표시를 뒤로 돌리면 되겠군요.” 루카가 말했다.
“단순히 순서만 바꾸면 다른 사고가 생길 수 있어요.” 셀레나는 대피 회선의 회로도를 가리켰다. 문 안쪽의 압력이 떨어질 때 자동 장치가 사람의 생명을 구한 기록도 있었다. 멈추면 안 되는 안전 기능과 끊어야 할 강제 배정 기능이 같은 마법진 안에 들어 있었다. 구분하지 않고 전원을 내리면 누가 안에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들은 먼저 모형을 만들었다. 마법학교 실습실에서 쓰는 투명 관과 소형 종을 연결하고, 세 개의 고무 인형을 서로 다른 위치에 놓았다. 사람이 갇혔을 때 문이 안전하게 열리는 조건, 위험한 인계가 시작되는 조건을 따로 재현했다. 루카는 종이 열두 번 울릴 때마다 인형이 한 개씩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마법은 화려했지만 규칙은 잔인할 만큼 단순했다. 마지막 인형이 남으면 기록상 구조 완료로 표시됐다.
“보세요.” 셀레나가 인형을 다시 세웠다. “대기자가 한 명일 때도 똑같이 작동해요. 구조 인원이 아니라 관리자 자리가 먼저 남도록 된 겁니다.”
민규는 안전 장치를 유지한 채 대체 승인 신호를 끊는 방법을 찾았다. 장치 설계도를 여러 번 비교하던 바르트가 소리쳤다. “교대 확인과 귀환 확인이 원래는 두 회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하나로 묶여 있어요. 돌아왔다는 보고를 보내는 순간 누군가 남도록 돼 있습니다.”
“분리할 수 있습니까?”
“기술적으로는요. 문제는 누구의 기록이 원본인지 판단하지 않고 분리하면 대기자 둘의 위치를 잃을 수 있다는 겁니다.”
케스는 더 낡은 자료를 찾아왔다. 그 안에는 정은희와 함께 근무했던 보조 설계자 문해린의 서명이 있었다. 해린은 안전 회선과 근무 회선을 분리하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관리자 지정이 느려진다는 이유로 반려당했다. 그녀는 마지막 항의서에 이렇게 썼다. [구조의 성공을 누군가의 고립으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민규는 그 문장을 큰 글씨로 작업대에 붙였다.
실습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미라였다. 루카의 누나로 돌아온 뒤 그녀는 학교 생활을 천천히 되찾는 중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구조 경험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도구로 쓰일까 봐 공개 발언을 피했다. 이번에는 제 발로 작업대에 왔다. 손에는 학생들이 자발적 지원서라고 착각해 적어 낸 서류 세 장이 들려 있었다.
“이걸 낸 학생들, 지원하지 않으면 다온이라는 아이가 못 돌아온다고 믿고 있어요.” 미라가 말했다.
민규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이름과 학년은 가려져 있었다. 학생들은 선의로 적었을 것이고, 자신이 무엇을 신청한 것인지 제대로 설명받지 못했다. 미라는 학생들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며, 서류를 작성하게 만든 공지의 문제를 먼저 알려야 한다고 했다.
“나도 누군가 날 대신해 밤을 지새워야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 생각이 제일 무서웠어요.”
루카는 누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사라진 동안 그는 자신이 더 일찍 찾지 못한 걸 끝없이 자책했다. 누나가 돌아온 뒤에도 가끔 자기 시간을 다 써야 보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라는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네가 내 시간을 대신 살 수는 없어. 그렇다고 내 동생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민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학교의 구조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이용해 온 건 그런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받으려면 누군가 빚을 져야 한다는 죄책감. 그는 지원서에 실린 문장들을 하나씩 읽고, 학생들이 실제로 어떤 위험을 알고 동의했는지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그런 서류가 돌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학생회 회의는 예정보다 길어졌다. 누군가는 만약 자신이 강한 마법사라면 들어갈 수 있다고 했고, 누군가는 학교가 아닌 중앙정부가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미라는 토론 끝에 손을 들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걸 명령할 순 없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들어가지 않고도 꺼낼 방법을 만드는 거예요.”
그 말 이후 학생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적었다. 현장 주변의 이동 통로 청소, 출입 명부의 재확인, 식수와 응급 물품 준비, 수동 비상등의 상태 점검. 마법을 쓰지 못하는 학생들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존재를 걸 필요는 없었다.
민규는 실습실로 돌아오는 길에 하준을 만났다. 하준은 오래된 화분 하나를 들고 있었다. 잎이 거의 말라 있었지만 뿌리 끝에는 흙이 붙어 있었다. “경비실 마당에서 키운 겁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 이건 가져가고 싶어요.”
“그러세요. 당신 것이니까요.”
“내가 처음으로 내 뜻대로 갖고 싶은 걸 골랐습니다.” 하준이 말했다.
화분은 평범하고 무거웠다. 그 무게 때문에 하준의 팔이 조금 내려갔다. 그는 처음으로 근무와 관계없는 물건을 들고 서 있었다.
저녁 무렵 학교 학생회에서 직접 만든 작은 공지문이 도착했다. 누군가를 대신 희생하겠다고 나서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대신 교환실 앞쪽의 통로를 청소하고, 구조팀이 쓸 물과 담요를 준비했다. 한 학생은 종이비행기 모양의 그림을 그렸다. [안에 있는 사람도 학교 사람입니다.]라는 문구가 아래에 있었다. 민규는 그 그림을 보고 아이들이 어른보다 문제를 쉽게 이해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흉터 없는 남자는 그림 앞에 오래 섰다. “나도 학교 사람입니까?”
“여기에 다닌 적이 있다면 그렇겠죠. 다니지 않았다고 해도 도움받을 자격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남자는 수첩 맨 앞장을 펼치더니 이름 칸에 천천히 두 글자를 썼다. ‘하준’. 자신이 누구였는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부터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그는 아직 정식 신원 확인 서류를 작성하지 않았다. 다만 민규와 셀레나에게는 그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민규는 바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준 씨.”
미라가 돌아간 뒤 루카는 자기에게도 제안이 있다고 말했다. 비상 물품을 나르는 작은 손수레를 손봐서 계단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민규는 손수레의 바퀴와 제동 장치를 확인하도록 했다. 아이들이 기계를 만들어 돕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검증되지 않은 장비로 구조를 서두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루카는 투덜거리면서도 체크리스트를 받아 들었다. 셀레나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학교 게시판의 지원서에서 정민규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대신 [제17대 임시 귀환자: 별칭 하준. 관리자 자격 미확정.]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장치가 그의 새로운 이름을 알아차리고 반응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섬뜩했다. 시스템은 또다시 그의 선택을 승인으로 해석하려는 듯했다.
“이름을 정한 게 신청한 건 아닙니다.” 민규가 분명하게 말했다.
하준도 손을 들어 보였다. “저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나를 살게 해 준 날들을, 빚처럼 갚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르트의 보고서가 마지막에 도착했다. 제어기 하단에 감춰진 회로가 하나 더 발견됐다. 도면에는 없는 수동 스위치였다. 스위치를 내리면 자동 배정 기능을 끌 수 있었지만, 이 기능의 접근 권한은 [삼십 년 전 실제 마지막 근무자]에게만 있었다.
“하준 씨입니까?” 케스가 물었다.
“그렇게 적혀 있네요.” 하준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안도보다 두려움이 컸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원본 근무일지의 찢긴 마지막 장에서 새로운 글씨가 떠올랐다.
[제17대 임시 귀환자는 복귀한 것으로 확인. 최종 잔류자: 원본 신원 확인 대기.]
그날 밤 두 시 십칠 분까지 남은 시간은 일곱 시간이었다. 교환실 안쪽의 아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물과 공기를 보내는 회선은 작동했지만 시간의 틈은 점점 좁아졌다. 남은 사람을 찾기 전에 구조가 늦어지면 안 됐다. 민규는 바르트에게 안전 회선 독립 가동을 먼저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원본이 누군지는 나중에 가려도 됩니다.” 민규가 말했다. “지금 안에 숨 쉬는 사람을 먼저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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