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교환실의 문틈에 끼인 종이는 삼십 년 전 쓰던 양식이었다. 그러나 잉크는 방금 적은 듯 윤이 났다. 민규는 증거용 장갑을 끼고 종이를 집어 들었다. 상단에는 시설 이름도 발신 부서도 없었다. [첫 번째 교대 성공.]이라는 문구만 지나치게 또렷했다. 그 문장 아래 작은 글씨가 있었다. [성공 기준: 경비복을 입은 사람 한 명이 문 밖에서 발견될 것.]
“누가 나왔는지는 상관없었다는 뜻이네요.” 셀레나가 말했다.
“누가 남았는지도요.”
민규는 종이 뒷면을 빛에 비췄다. 한때 다른 문장이 적혔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마른 종이 위에 빛을 비스듬히 비추자 눌린 자국이 드러났다. [비상 신고자를 구조 대상에서 교대 인원으로 변경.] 그 변화가 삼십 년의 모든 사건을 시작하게 했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구하는 대신 자리를 채웠다고 보고하도록 만든 문장. 누가 그런 문장을 만들었는지 알기 전에도 잘못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오르반은 비상 계단의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벽 뒤에 숨은 계단은 뜻밖에 넓었다. 목재 난간은 습기에 불었고, 두 칸마다 하나씩 작은 유리등이 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내려오다 길을 잃지 않도록 만든 조명이었다. 계단 가운데에는 삼십 년간 먼지를 뒤집어쓴 어린아이의 코트가 걸려 있었다. 하늘색 천에 검은 단추 셋. 코트의 오른쪽 주머니는 불룩했고, 왼쪽 소매에는 누군가가 직접 꿰맨 별 모양 자수가 있었다.
민규는 코트부터 만지지 않았다. 바닥을 촬영하고 주변 온도와 습도를 확인했다. 물에 잠긴 적 없는 천인데 바닥에만 젖은 발자국이 있었다. 작은 발자국은 세 개를 지나지 않았고 이후에는 구두 자국 하나로 바뀌었다. 흉터 없는 남자는 그 자국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이건 내가 걸어 나온 흔적입니다.”
“구두 모양이 같습니까?”
“아닙니다. 모양이 아니라 걸음의 방향을 기억합니다. 아이를 안고 오른발부터 계단을 올라왔죠. 세 번째 계단에서는 아이가 몸부림쳤어요. 코트를 두고 왔다고.”
“그 아이가 밖으로 나왔습니까?”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규는 그의 침묵을 거짓말의 증거로 삼지 않았다. 때로는 가장 필요한 대답을 할 수 없어서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란히 서 있던 오르반에게 코트를 보관함에 옮길 때 가동 중인 마법에 변화가 생기는지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누구도 주머니 속 열쇠를 돌리지 않았다.
셀레나가 별 모양 자수를 살피다가 멈췄다. “이 실 색이 이상해요. 지금은 회색인데 원래는 빨간색이었어요. 보호 주문이 녹으면서 색이 빠졌죠.”
“누가 건 주문입니까?”
“사람을 해치려는 주문은 아니에요. 입은 사람이 길을 잃어도 보호자가 찾을 수 있도록 만든 표시죠. 마법학교에서 쓰는 종류와 다릅니다.”
정은희가 어린 민규의 옷에 별을 달아 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날 밤 정은희는 아들의 양말 한 짝을 찾느라 온 집을 뒤집었고, 결국 서로 다른 무늬의 양말을 신겨 학교에 보냈었다. 민규에게 남은 기억은 희미했다. 하지만 한쪽 소매의 별은 어머니가 좋아하던 바느질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는 코트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기억과 실물은 서로 확인해야 했다.
“어머니께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셀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민규는 대답 대신 전화를 걸었다. 정은희는 구조된 뒤 회복 치료를 받고 있었다. 직접 오게 하는 건 무리였다. 그는 코트의 무늬를 설명했고, 어머니가 원하면 사진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정은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컵 내려놓는 소리만 들렸다.
“코트 안쪽에 이름을 쓰지 않았어.” 정은희가 마침내 말했다. “아이가 글씨를 잘못 읽어도 자기 옷인지 알아보게 별을 하나 달았지. 그런데 그 별 아래는 일부러 실 한 땀을 비워 뒀어. 바느질은 다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셀레나는 돋보기로 별 아래를 살폈다. 실제로 실 한 땀이 비어 있었다. 그것만으로 코트의 주인을 확정할 수 없었지만, 정은희가 물건을 알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날 코트를 누가 입었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정은희의 숨이 거칠어졌다. “너였어. 하지만 네가 왜 그걸 찾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날 밖으로 나왔잖아.”
두 명의 성인이 서로를 바라봤다. 흉터 없는 남자가 처음으로 손목을 감쌌다. 자신의 번호 17이 낮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중 누가 나왔습니까?” 정은희가 물었다.
“아직 확인 중이에요. 어머니가 그날 이후 누구를 직접 봤는지도 나중에 차근차근 듣겠습니다.”
민규는 전화를 끊고 오래 숨을 골랐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전체가 조작이라는 생각은 낯설고 두려웠다. 그러나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밖에 나왔다가 두 번째 희생자를 만드는 일은 더 두려웠다. 그는 자기 마음을 정리한 뒤 코트를 임시 작업대에 올리도록 했다.
오르반이 작은 상자를 고정했고 셀레나는 바느질에 묻은 잔여 마력을 측정했다. 검은 단추 세 개는 평범한 뿔 단추였지만 안감 사이에는 얇은 은박지가 숨어 있었다. 자석처럼 붙은 은박지는 사람이 입었을 때 심장의 박동에 맞춰 미세한 빛을 냈다. 지금은 빛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계단 아래쪽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한 번씩 밝아졌다.
“연결돼 있네요. 목소리가 녹음이 아니라면 저쪽에 실제 반응이 있는 겁니다.” 셀레나가 말했다.
민규는 아이에게 물었다. “코트가 여기 있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있니?”
“주머니 안에 열쇠를 넣었어요.”
“열쇠는 지금 우리가 발견했어. 혹시 무엇을 여는 열쇠인지 아니?”
“문은 아니에요. 엄마가 준 장난감 상자요.”
민규는 소매의 별 아래를 손으로 만졌다. 엄마가 준 작은 장난감 상자. 그 기억도 있었다.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였는데 뚜껑이 자꾸 열려서 어머니가 쇠고리를 달았다. 안에는 깨진 회중시계와 이름 모를 나사 세 개가 있었다. 어린 민규는 쓸모없는 물건들을 고치면 시간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정은희는 아이의 생각을 웃지 않았고, 위험하지 않은 공구만 골라 주었다.
“상자 안에 있던 걸 기억하니?” 민규가 물었다.
아이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작은 시계요. 바늘이 없고 나사는 셋. 엄마는 고치는 것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했어요.”
셀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민규가 여러 사건에서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민규는 여전히 기록을 남겼다. [아이 목소리와 정민규의 과거 기억에 일치하는 항목 발견. 동일 인물 여부 미확정.] 이미 스스로 납득했다고 해서 위험한 구조를 서둘러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흉터 없는 남자가 계단 벽에 등을 기대었다. “당신이 그 아이였다면, 나는 누굽니까?”
민규는 한참 생각했다.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는 순간 남자의 존재가 부정되는 질문이었다. 그는 지울 수 없는 답을 찾아내려 애쓰지 않았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함께 찾을 수 있습니다. 내 과거와 겹친다고 당신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남자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코트를 바라봤다. “나는 그 아이를 안고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누구였는지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문 밖에서 대장이 먼저 나를 정민규라고 불렀죠. 그때부터 누군가의 기억이 내 것이 됐습니다. 나는 내 이름이 없었던 시간을 찾으러 여기 온 겁니다.”
그 고백 뒤로 침묵이 길었다. 바깥에서 아침 청소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규는 새벽이 지나간다고 안쪽의 아이에게 오늘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여전히 두 시 십칠 분이었을 테니까. 셀레나는 외부에서 정상적인 시각을 보내는 소형 시계를 준비했다. 안쪽과 바깥쪽 시간을 따로 표시할 수 있는 장치였다.
열쇠를 직접 돌리는 대신 소형 카메라를 상자 옆에 붙이자 오래된 쇠고리 안쪽에 숫자가 보였다. 17. 흉터 없는 남자가 가진 손목 표시와 같았다. 그 번호는 사람을 가리키기보다 상자가 보관된 설비의 관리 번호일 수 있었다. 민규는 카메라 영상을 저장했다.
“그걸 열면 나에 관한 기록도 나올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상자를 열어야 할 이유와 열었을 때의 위험을 먼저 확인합시다.”
“당신은 늘 돌아서 가는군요.”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빠져나올 길을 만드는 중입니다.”
정은희는 잠시 뒤 사진을 한 장 더 보내 왔다. 어린 민규가 햇볕 아래서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소매의 별 아래로 흰 실이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그 사진의 날짜는 폭우가 내리기 한 달 전이었다. 민규는 사진을 확대하다가 화면을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데, 자신의 어린 시절이 여전히 다른 어딘가에 남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내가 밖으로 나왔다고 믿는 기억도 누군가의 것이라면요?” 그는 셀레나에게 물었다.
셀레나는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민규가 지금까지 적어 온 수첩들을 가리켰다. “그 수첩들에 적힌 일을 모두 네가 겪었잖아. 학교에 처음 와서 겁먹은 학생을 데리고 나간 날도, 미라를 찾다가 밤을 새운 날도. 과거의 출처가 다르다고 지금 네가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민규는 그 말을 곱씹었다. 이상할 만큼 위로가 됐다. 복제된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 함부로 가짜라고 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하준이라고 이름 붙이기 전의 남자는 분명 어느 밤 학교를 돌았고, 망가진 의자를 고쳤고, 아이에게 종이비행기를 접어 줬다. 그 일들이 기록과 맞지 않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어릴 때의 나를 만나는 일은 이상합니다.”
“그 아이가 정말 어린 너라면, 그 아이는 아직 잘못한 게 없어. 누군가의 일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
민규는 자신의 손에 남은 흉터를 만졌다. 그 흉터는 열 살 무렵 학교 뒤 공사장에서 생겼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은희의 사진 속 아이에게는 같은 자리에 자국이 없었다. 흉터가 생긴 날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사진을 증거로 보관하면서도 자신을 의심하는 일로 밤을 모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오르반은 그 사이 학교 의료실과 연락을 마쳤다. 교환실 문이 열렸을 때 갑자기 다른 시간에서 나온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응급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의료진은 이름을 모르는 환자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규는 그 답이 다행스러웠다. 명부가 사람을 지우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명부를 채우기 전에도 숨 쉬는 사람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은희는 통화가 끝날 무렵 오래된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고 했다. “네가 어느 길로 살아왔든, 지금 내게 전화를 건 아들은 분명히 너야.” 민규는 대답 대신 수화기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것만큼은 확인 서류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 소형 시계가 멈췄다. 셀레나가 보낸 실제 시각은 정상적으로 흘렀지만, 코트 안감의 은박지가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계단 벽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더니 물에 젖은 듯 어두워졌다. 안쪽에서 누군가 나무 상자를 열었다 닫는 소리가 났다.
어린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저씨, 다른 아저씨한테 그 상자 주면 안 돼요.”
“왜?”
“그 사람이 상자를 열 때마다 엄마가 한 걸음씩 멀어져요. 그런데 이상해요. 다른 아저씨 얼굴이...”
목소리가 끊겼다. 민규는 무리하게 아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몇 초 뒤 다시 들린 말은 작았지만 분명했다.
“나중에 제가 커서 될 얼굴이랑 똑같아요.”
흉터 없는 남자는 손목의 숫자 17을 움켜쥐었다. 숫자 아래에서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제17대 임시 귀환자. 본명 미등록.] 민규는 마침내 두 일지를 서로 다른 주인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첫 단서를 얻었다. 한 사람의 과거가 복사됐어도 그 복사를 살아 낸 사람의 시간까지 가짜가 되는 건 아니었다.
바깥의 바람이 계단을 따라 내려오자 코트의 빈 소매가 흔들렸다. 민규는 어린 시절 그 코트를 입고 비 오는 운동장을 달렸던 기분을 떠올렸다. 발끝이 젖는 느낌과 멀리서 어머니가 부르던 목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그 기억이 현재의 사실과 일치하든 아니든, 그는 안에 있는 아이가 같은 두려움 속에서 혼자 기다리게 둘 수 없었다.
교환실 안쪽에서 부드러운 안내 음성이 들렸다. “귀환 대상 확인을 위해 관리자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민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보호 회선에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 목소리 확인. 어린 시절 정보 일부 일치. 관리자 지정 미동의. 출구 안전성 추가 조사.] 그 다음에 비로소 코트 안의 나무 상자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점검등을 켰다.
은박지 아래에 아주 작은 금속판이 드러났다. 금속판의 문구는 누군가 급하게 긁어 쓴 듯 삐뚤었다.
[첫 번째 아이는 이미 구조됐다. 아직 안에 남은 아이는 누구인가?]
제15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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