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개의 빈 의자가 가장 먼저 낸 소리는 환호도 박수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눌려 있던 나무판이 제 모양으로 돌아오며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강당에서 사람의 시간을 부르던 장치가 정지한 뒤에도 누군가는 졸업 축하 현수막을 내리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별을 주워야 했다. 민규는 그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나갈 길부터 확보한 뒤 비품을 정리했다.
이준은 다음 날 아침 학교에 왔다. 그는 여전히 열아홉 살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생년월일상으로는 서른아홉이었다. 어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누군가 그를 졸업생석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유정은 오빠 옆에서 출입증을 대신 써 주지 않았다. 이준은 직접 신청서에 현재 연락처를 적고, 서명 뒤에 잠시 펜을 놓았다.
“열아홉 해를 전부 찾았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케스는 준비해 둔 자료를 보여 주었다. “보존된 원본은 확인했고 사용된 기록을 추적 중입니다. 확인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요. 그건 모른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준은 한동안 종이를 읽었다. 매번 졸업을 축하한다고 말하던 사람들과 달리 케스는 그의 시간이 모두 해결됐다고 거짓말하지 않았다. 이준은 처음으로 보고서 맨 아래의 '당사자 의견' 칸을 발견했다.
“저는 졸업장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한 문서는 남겨 주세요.”
그 말은 아주 작았지만 분명했다. 행정실 직원은 '졸업 취소'보다 먼저 '졸업 사실 확인 불가'라는 상태를 등록했다.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기록은 실패가 아니라 조사가 계속될 수 있도록 남기는 출발점이었다.
하경은 기억 복원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신 제0기록관의 증거가 앞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데 쓰이지 않도록 감시하는 시민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녀는 제빵사였다. 기록관의 역사도 마법 회선도 잘 몰랐지만 누가 자신에게 뜻을 묻지 않았는지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기억했다.
“내 삶이 빈칸이라면, 그 빈칸을 남의 마음대로 채우지 말라고 말할 사람도 있어야죠.”
태훈은 공개 진술을 했다. 첫 설계를 만들었던 목적, 경고를 받고도 충분히 막지 못했던 일, 매년 강당을 청소하면서 제대로 바꾸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씩 말했다. 그는 자신을 모두의 구세주라고 부르지 않았다. 조사관들은 그의 자료를 확보하고 당시 개정 승인자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책임은 한 사람의 사죄로 끝나지 않았다.
정은희는 이준과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삼십 년의 공백 뒤 아들과 다시 만났던 일을 설명했다. 둘이 겪은 시간은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왔다는 이유로 그동안 서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꺼번에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있었다.
“오늘 처음 해 본 일을 하나씩 적어 보세요.” 은희가 말했다. “어제까지 없었던 삶도 오늘부터는 생기니까요.”
이준은 며칠 전부터 만들기 시작한 작은 시계를 보여 주었다. 아직 바늘이 없었다. 아버지가 쓰던 태엽을 고쳐 달았지만 자기에게 맞는 바늘을 고르지 못했다. 은희는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시계가 멈춘 곳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거기에서 다시 움직여야 하는 건 아니었다.
강당의 졸업식 장치는 완전히 폐기되지 않았다. 현장 안전팀은 위험한 자동 회수 회선을 끊고 원래의 대피 기록 기능만 제한적으로 보존했다. 그러나 복원이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학교에 바로 적용하겠다는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다른 시설은 다른 방식으로 개조됐을 가능성이 컸다. 학생들의 개인정보와 실제 출입 안전도 각각 검증해야 했다.
민규는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복도에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돌아왔고, 졸업식장 대신 운동장에서 연습하던 동아리들이 보였다. 미라는 루카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사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뒤편에 강당이 나오더라도 누구도 얼굴을 지우지 않았다.
“형, 이제 우리 학교 졸업식을 정말 할 수 있는 거죠?” 루카가 물었다.
“할 수 있겠지. 다만 학교를 떠나더라도 다시 방문할 수 있게 안내판을 잘 만들어야지.”
루카는 웃었다. “형한테는 졸업식도 출입문 문제네요.”
“사람이 나가고 들어오는 데 필요한 행사니까.”
저녁에는 제0기록관의 첫 외부 감사가 시작됐다. 케스는 실제 피해자 확인과 데이터 보존, 안전 회선 분리라는 세 가지를 우선순위로 올렸다. 고장 난 장치가 더는 사람을 담보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시험했다. 동시에 잘못된 졸업 기록을 만든 개정 담당자와 그 명령이 어디서 왔는지도 수사에 맡겼다. 사건이 끝났다는 현수막을 내걸기엔 아직 확인할 일이 많았다.
이준은 유정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유정은 낯선 새벽의 버스 노선을 천천히 설명했다. 이준은 길가에 있는 빵집을 보고 발을 멈췄다. 예전에는 그 자리에 문방구가 있었다. 그는 신기하다는 듯 사진을 찍었다. 그날의 사진은 빼앗긴 열아홉 해를 대신하지 못하겠지만, 자신이 오늘 그곳을 지나갔다는 사실은 남겨 줄 수 있었다.
“우리 내일 또 나올까?” 그가 물었다.
“어디로?”
“모르겠어. 그냥 어디든.”
유정은 웃었다. “그럼 내일 정하자.”
앞서 그날 오전에는 강당 대신 작은 교실에서 피해자와 가족을 위한 설명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어떻게 보관됐는지보다 당장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한 사람은 직장에 언제 돌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고, 다른 사람은 가족관계 서류가 맞지 않아 병원비 지원을 받지 못할까 걱정했다. 마법 사고의 결말은 반드시 생활의 문제로 이어졌다.
케스는 이번 사건의 기록을 한꺼번에 '정상화'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긴급 위험은 해제됐지만 각자 신원 확인과 지원이 필요했다. 피해자마다 연락 담당자를 지정하고 서류가 잘못된 곳에는 정정 절차를 안내했다. 일부 기록은 제0기록관 안에 남아 있어 즉시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부분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하경은 설명을 듣다가 손을 들었다. “그동안 제 빵집 일은 누가 대신해 줍니까? 조사할 때마다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잖아요.”
시청 담당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케스가 바로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조사가 지속되는 동안 생업에 미칠 피해도 조사 범위 안에 포함하겠다고 했다. 법률상 가능한 지원과 실제 필요한 지원이 같지 않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더 듣기로 했다.
민규는 설명회 옆자리에서 나린이 그린 작은 그림을 봤다. 등록소 사건 뒤 안전한 생활 공간을 마련한 아이는 그림에 문을 크게 그렸다. 열리는 문이었다. 그림 아래에는 '새로 온 사람도 쉬어 갈 수 있습니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민규는 그 문장을 읽고 웃었다. 그는 아이에게 제0기록관 이야기를 억지로 들려주지 않았다. 나린이 지금 걱정하는 것은 다가오는 수업과 새 친구였다.
해진은 나린과 함께 동네 도서관에 다녀왔다. 아직 가족관계의 최종 확인은 끝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서로 어떤 관계가 될지 결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책을 고를 수는 있었다. 누군가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면 도서관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다. 등록소 사건을 겪은 뒤 그런 평범한 하루가 큰 변화로 느껴졌다.
태훈은 조사팀에게 마지막 작업 장갑을 건넸다. 그것을 유품처럼 보관하지 말고 오래된 장비의 조립 흔적을 확인할 때 사용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앞으로 공개 조사에 나가 당시 알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겠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기억과 자료를 남기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혼자 책임지겠다고 우기지 않겠습니다.” 태훈이 말했다.
민규는 장갑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피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한 사람이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역시 필요했다. 그는 오늘 조사 일정에 태훈의 건강 상태와 이동 지원을 함께 표시했다.
미라는 교내 방송실에서 긴급 대피 안내를 새로 녹음했다. 이전 방송은 학생번호부터 말하라고 지시했지만, 새 방송은 위치와 필요한 도움을 먼저 알려 달라고 했다. 누군가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루카는 그 녹음을 듣고 박수를 쳤다. 그의 이름이 한때 기록에서 지워졌던 날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후배들이 그 공포를 겪을 가능성은 조금 줄었다.
민규는 학교 벽의 오래된 대피 안내 지도를 다시 그렸다. 지도에는 제0기록관으로 이어지는 폐쇄된 터널을 일반 통로처럼 표시하지 않았다. 접근 제한 구역과 구조대가 사용할 안전 경로를 구분했다. 매일 사용하는 문과 사고 현장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는 다르게 관리해야 했다. 새 지도에는 장식적인 마법 문양이 거의 없었다. 대신 어느 방향으로 달리면 실제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가 분명했다.
이준은 설명회 마지막에 작은 수첩을 펼쳤다. 첫 장에는 새 날짜와 옛 날짜가 나란히 있었다. 그 뒤에는 버스를 탄 날, 새로운 간판을 본 날, 유정의 집에서 처음 고양이를 만난 날이 적혔다. 그는 기록을 읽다가 고양이 앞에서 겁먹고 뒤로 물러났던 일을 말하며 웃었다. 유정은 그가 자기 일상을 새로 쓰는 걸 처음으로 지켜봤다.
“그 수첩에는 졸업 날짜가 없네.” 그녀가 말했다.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니까.” 이준이 답했다.
그들은 학교를 나서기 전에 민규에게 인사했다. 민규는 이준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부 알지 못했다. 직장을 찾거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한동안 가족과 조용히 지낼 수도 있었다. 그것이 사건의 미완성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음 선택이 남아 있다는 건 오히려 구조가 성공했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날 저녁 정은희는 민규에게 작은 도시락을 가져왔다. 옛날에는 자기가 지키지 못한 아들의 저녁을 떠올릴 때마다 괴로웠다고 했다. 오늘은 아들이 일을 마치고 무엇을 먹는지 물을 수 있어 좋았다. 민규는 도시락을 열고 평범한 달걀말이를 보며 잠깐 웃었다. 신기한 마법 없이도 오래 기억할 만한 저녁이었다.
“내일도 야간 근무니?” 은희가 물었다.
“네. 그런데 교대 요청이 하나 더 왔어요. 확인해야 합니다.”
은희는 혹시 또 다른 사고인지 묻다가 그가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멈췄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미리 설명하라고 재촉하는 대신 안전하게 돌아오라고 했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서든 돌아와야 할 장소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는 도시락을 다 먹은 뒤 수첩에 적힌 미완료 목록을 읽었다. 이름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 기록의 원본을 요청한 사람, 강당 안전성을 재검토해야 하는 시설. 그 목록은 당장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각 항목을 맡을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일을 몰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민규에게는 큰 변화였다.
밤 두 시에 경비실로 돌아온 민규는 조용히 교대 일지를 정리했다. 강당 대피 동선 이상 없음. 임시 출입 통제 해제. 제0기록관 현장 접근은 별도 승인과 안전 계획 필요. 졸업생 피해자 연락은 지정 담당자에게 이관. 미확인 기록 열아홉 건은 조사가 계속된다고 적었다. 마지막 항목에 '사건 종료'라는 표현 대신 '긴급 위험 해제'라고 썼다.
그런데 교대 일지를 넘기다가 낯선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오늘 아무도 인쇄하지 않은 근무 신청서였다. [직무: 최초 근무자. 근무 장소: 제0기록관. 시작: 내일 새벽 02시 17분.] 신청자 이름 칸에는 정민규라고 적혀 있었다. 글씨는 그의 글씨와 놀랍도록 비슷했지만 마지막 받침을 쓰는 습관이 달랐다.
민규는 종이를 태우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서명란을 확인했다. 서명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접수 완료라는 도장은 찍혀 있었다. 그는 이전에 제0기록관이 자신의 동의를 대신 표시하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 기록도 그와 같은 절차라면 다시 사람이 한 사람 갇힐 수 있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경비실 출입문에는 사람이 하나 더 서 있었다. 그 역시 경비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새것 같은 명찰이 붙어 있었다. 정민규. 하지만 그 사람의 목 옆에는 흉터가 없었다.
“제가 야간 교대하러 왔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민규는 손전등을 들었다. 상대는 익숙한 얼굴로 웃으며 경비실의 옛 수리 의자를 가리켰다. 자신이 그 의자를 잘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민규는 의자보다 출입문을 먼저 확인했다. 문은 열려 있었고 비상등은 정상 표시였다. 그게 지금 두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첫 조건이었다.
“누가 배정했는지 확인합시다.” 민규가 말했다.
상대는 웃음을 거뒀다. “그걸 확인하시면, 어느 쪽이 먼저 출근했는지 알게 될 겁니다.”
벽시계가 두 시 십칠 분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초침이 거꾸로 움직이지 않았다. 두 명의 정민규가 서로를 바라보는 동안, 경비실 출입 기록에는 여태 없던 세 번째 줄이 생겼다.
[실제 근무 인원: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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