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해를 보관한다는 서류를 본 뒤 이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오후 다섯 시 십삼 분과 오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족이 들려준 이야기는 달랐다. 유정은 혼자 중학교 졸업식에 갔고, 아버지는 공방을 닫았고,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낡은 시계를 버리지 않았다. 그 일들은 모두 실제로 지나갔다.
“그 시간을 돌려받으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유정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민규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렇게 약속할 수 없습니다. 기록이 빼앗은 걸 되돌릴 방법을 찾더라도 다른 사람의 지나간 날까지 되감는 일은…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이준은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그럼 도대체 뭘 돌려받는 거예요? 이걸 찾으면 제 인생이 원래대로 된다고 생각했는데.”
민규는 졸업장 아래의 '보관'이라는 글자를 보고도 그 말을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떨어져 있었던 자신의 삼십 년을 생각했다.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을 돌려받는다는 말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잔인한 농담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준에게 진실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시간, 빼앗기지 않았어야 할 기억이나 기회가 거기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되찾은 다음 무엇을 할지는 당신이 정할 일입니다.”
유정은 오빠의 옆에 앉아 편지 상자를 꺼냈다. 열아홉 해 동안 오빠에게 썼던 편지였다. 스무 살이 돼 처음으로 혼자 집을 구했을 때, 어머니 병실에 있었을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모든 편지를 지금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첫 장에 오빠 이름을 쓴 채 가만히 상자를 밀어 놓았다.
“내가 언제 읽어도 되는 거지?” 이준이 물었다.
“응. 안 읽어도 돼. 네가 없던 날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반면 다른 졸업생은 시간의 반환 자체를 거절했다. 작은 빵집을 운영하는 조하경은 연락을 받자 냉정하게 말했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잃어버린 걸 되돌리면 제가 아는 사람들을 잊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녀는 사고 뒤 일 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뒤로 가족과 함께 살아왔다. 누군가 그녀의 빈 시간을 채우겠다며 지금의 삶을 지워 버릴까 두려웠다.
케스는 통화 내용을 문서화하고 강제 복원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이 전부 같은 해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사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동시에 꼭 필요했다. 누군가의 세월을 빼앗은 장치와 같은 방식으로, 되찾는다고 또 남의 뜻을 무시할 수 없었다.
셀레나는 제0기록관에서 가져온 영상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창에 보였던 서가의 사람들은 실체라기보다 보관된 시간을 연기하는 그림자에 가까웠다. 어떤 그림자는 매일 빵을 굽고, 어떤 그림자는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그 장면들은 실제 삶의 가능성이었는지 아니면 시스템이 예측해 만든 가짜 미래였는지 구별되지 않았다.
“그럼 이준 씨의 스물세 살 그림도 그중 하나일까요?” 루카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실제 남겨진 기록일 수도 있어.” 셀레나가 대답했다. “우리는 어느 쪽이든 함부로 증거라고 부르면 안 돼.”
민규는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할 때 어떤 의미로 쓰는지 생각했다. 지각하기 직전의 학생과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사람이 말하는 '시간이 없다'는 모두 달랐다. 그러나 제0기록관은 모든 시간을 같은 숫자로 세었다. 오늘 밤 지하 통로에서 일할 사람들이 가져야 할 첫 원칙은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케스는 열아홉 명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연락했다. 어떤 사람은 직접 만나길 원했고, 어떤 사람은 안내문만 받겠다고 했고, 한 사람은 어떤 접촉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임박한 안전 위험을 알릴 합법적인 고지 방법을 전문가와 상의했다. 피해자 명단은 공개 게시판에 올리지 않았다.
이준은 유정과 함께 공방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책상은 이제 임대 창고 안에 있었지만 작업대 위에는 손때 묻은 작은 시계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준은 태엽을 감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무슨 일이 시작될까 두려웠다. 유정은 허락 없이 손을 뻗어 대신 시계를 고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작업대 앞에 서 있었다.
“네가 예전에 늘 나보다 먼저 고쳤지.” 유정이 말했다.
“지금은 네가 나보다 세상 일을 잘 알잖아.”
“둘 다 사실이네.”
그들은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웃었다. 조금 뒤 이준은 시계 뒷면에 적힌 낡은 글씨를 발견했다. 아버지 필체였다. [잃어버린 시간은 죄가 아니다. 돌아오면 새 시계부터 만들자.] 아버지는 오빠가 돌아오지 못한 세월에도 어쩌면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제0기록관에서 돌아온 조사팀은 긴급 회의를 열었다. 기술적으로는 시간을 보관한 방에 접근할 길이 보였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과 시간을 강제로 재생하는 장치가 있다면 무턱대고 작동시켜선 안 된다. 피해자가 원할 경우에만 검토할 안전한 절차를 먼저 만들어야 했다. 은희는 원본의 보호 수업 규칙에서 '학생이 회복한 뒤 자신의 속도로 다시 참여한다'는 조항을 찾았다.
“돌아왔다는 이유로 모두 졸업시키지 말자는 거였어요.” 은희가 말했다. “기다림도 배움의 일부라고 생각했죠.”
이준은 그 말을 듣고 졸업장을 내려다봤다. 졸업은 한 과정을 끝냈다는 축하일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시작하지 않은 삶을 종료시킨 도장이었다. 그는 그 문서를 태우거나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학교에 다닌 적 없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받을 때까지 증거로 남기겠다고 했다.
제0기록관을 조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한쪽은 기록된 시간을 최대한 빨리 되찾아 피해자에게 돌려주자고 했다. 다른 쪽은 그 기록이 마법으로 만든 허상이라면 복원 과정이 오히려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어느 쪽에도 확실한 답은 없었다. 민규는 두 주장 중 더 자신 있게 말하는 쪽을 고르지 않고 누구의 몸과 삶에 변화가 생기는지부터 따져 보기로 했다.
셀레나는 기록관이 보관한 자료를 네 종류로 나눴다. 실제 있었던 날의 기록, 그날에 대한 타인의 증언, 시스템이 만들어 낸 예측 영상, 그리고 현재 사실과 충돌하는 행정 변경 기록. 처음에는 서가의 책들이 모두 같은 색이어서 구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자료가 기록된 시각과 촬영된 장소를 비교하자 서로 다른 표시가 보였다.
“이준 씨가 스물세 살 때 공모전에 나갔다는 건 어느 쪽입니까?” 루카가 물었다.
“아직 미확정이에요.” 셀레나가 답했다. “신청서가 실제로 제출됐는지는 외부 주최 측 자료가 필요하고, 그림이 그의 것인지도 직접 확인해야 해요.”
이준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그림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그림에는 작은 마을 위로 시간을 거꾸로 세는 시계가 떠 있었다. 그가 열아홉 살에 그리던 그림과 화풍이 닮았지만, 시간이 더 흐른 사람의 손길처럼 선이 단단했다. 이준은 자신이 정말 그림을 그린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게 저라면 저는 생각보다 잘 그렸네요.”
유정은 웃었다. “그러게. 그런데 네가 아니어도 좋은 그림이야.”
그들은 그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과 누가 그렸는지 확인하는 일은 별개라고 합의했다. 그 결정이 작은 것 같았지만 중요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소유권을 부여하면 또 다른 상처가 생긴다.
늦은 오후에는 간호사 김연수가 조사팀을 찾아왔다. 그녀는 19년 중 일부가 지워진 뒤도 병원에서 일해 왔고, 환자의 이름을 하루에 수십 번 불렀다. 그런데 간혹 어린 시절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려 하면 누군가 환자 기록을 읽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병원은 그것을 피로라고 설명했다. 연수는 자신이 정말 아픈 건지 아니면 기록이 잘못된 건지 구분하고 싶었다.
민규는 그녀에게 증상을 말해 준 용기가 대단하다고 빈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의료진을 연결하고, 그녀가 원하는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안내했다. 기억 이상은 마법 사고와 무관한 건강 문제일 수도 있었다. 어떤 원인이든 치료를 늦추지 않는 편이 중요했다.
“조사하면 직장에서 제 사정을 다 알게 될까요?” 연수가 물었다.
“원하지 않는 정보가 공개되지 않도록 절차를 확인하겠습니다. 다만 응급 위험이 있다면 의료진과 꼭 상의하셔야 해요.”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자기 휴대전화에 오늘 날짜와 저녁 약속을 적었다. 시간이 흔들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자기 일상의 작은 기준을 하나씩 세워 두려 했다.
그날 저녁 조사팀은 피난 구조 경험이 있는 시민들을 초대해 자문을 구했다. 아이를 오래 기다려 본 부모, 대피 시설에서 근무한 간호사, 긴 실종 사건을 기록해 온 기자가 참석했다. 기자는 당장 졸업생 열아홉 명의 이름을 발표해야 하는지 물었다. 케스는 피해자의 사생활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기자도 안전 위험을 알리는 데 필요한 정보와 사람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정보가 같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유정은 발표할 때 오빠의 사진을 보여 주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승차권 한 장을 들었다. 누군가가 버스 정류장에 서서 돌아올 사람을 기다렸다는 사실은 그 한 장으로도 충분히 전해졌다. 그녀는 질문을 받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가족에게 열아홉 년은 그냥 빈칸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갔고 아버지는 일했고 엄마는 아팠어요. 오빠가 그걸 다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아무도 그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유정은 잠깐 숨을 골랐다. 이준은 뒤쪽에서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는 과거를 억지로 기억하려고 하기보다 내일부터 새로운 일을 배워 보겠다고 했다.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자기 시간이 보관돼 있다는 소식보다, 내일도 자신이 선택할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해진 순간이었다.
민규는 회의록 맨 아래에 그 문장을 적었다. [반환 조치는 당사자별 동의 및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르게 결정한다.] 그 문장에는 마법도, 거창한 약속도 없었다. 그러나 열아홉 사람을 하나의 숫자로 세어 놓고 똑같이 취급하던 장치를 고치는 첫 번째 원칙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소식을 들은 오르반은 학생들이 졸업식 행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조사했다. 어떤 학생은 졸업식만 생각해도 무섭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이 사건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무시당하는 게 싫다고 했다. 오르반은 둘 다 듣기로 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행사를 바꾸는 일과 배움의 의미를 없애는 일은 같지 않았다.
그는 교사들에게 졸업증서가 사람의 미래를 종결하는 서류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축하하는 기록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완벽한 정책이 되려면 실제 기록 체계도 바꿔야 했다. 학생 한 명이 질문했다. “저는 내년에 졸업하기 싫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오르반은 당장 답을 내놓지 않았다. 학업을 계속할 방법과 진로 상담이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은 모든 규칙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규칙의 목적을 당사자에게 설명하고 다른 길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회의를 마친 오르반은 민규에게 연락했다. “학생들이 생각보다 현실적인 질문을 하더군요.”
“원래 그렇죠. 지금 학교 다니는 사람에게는 내일 수업이 제일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둘은 잠깐 웃었다. 먼 기록관의 비밀을 찾아내는 동안에도 교실의 하루는 계속되고 있었다.
설명회가 끝난 뒤 유정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잠시 울었다. 오빠가 돌아와 기쁘면서도 그동안 혼자 버틴 날들을 누가 알아줄지 알 수 없었다. 민규는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곁에 서 있지 않았다. 유정이 혼자 있고 싶은지 먼저 물었다. 유정은 잠시만 혼자 있고 싶다고 했다. 그는 복도 끝에 따뜻한 물이 있다는 말만 남기고 물러났다.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도 보호받아야 했다.
그날 밤 강당에서는 열아홉 번째 의자가 비어 있었다. 대신 제0기록관의 서가에 새로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었고, 아이가 손에 쥔 빈 도시락 같았다. 그림자 아래에 문장이 떴다.
[남은 시간 19년. 사용 승인 대기. 승인 대상: 졸업생 본인 외 1명.]
민규는 그 문장을 보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제 장치는 빼앗은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속이는 대신, 그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사용하도록 강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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