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태훈의 집은 학교 담장을 따라 난 오래된 골목 끝에 있었다. 대문 옆에 졸업 축하라고 적힌 종이띠가 매달려 있었지만 빛이 바래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골목 아이들은 그 집을 '매년 졸업하는 할아버지 집'이라고 불렀다. 민규는 그 말이 불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어른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아이들이 어떻게 제대로 이름 붙이겠는가.
길태훈은 서른 해 전 제7시설의 행사 관리인이었고 지금은 일흔을 넘긴 노인이었다. 그는 민규가 방문 목적을 밝히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대신 문틈으로 얇은 작업 장갑 한 짝을 내밀었다.
“그걸 아느냐?”
장갑 안쪽에는 작은 글씨로 '안전 담당자에게 인계'라고 적혀 있었다. 민규는 장갑을 만지는 대신 흙이 묻은 손등과 오래된 실밥을 관찰했다. 누군가 수십 년 동안 같은 물건을 수선해 사용한 흔적이었다.
“그 장갑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쓰셨다면 제게 사연을 들려주실 수는 있겠죠.”
문 너머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태훈은 잠시 후 쇠사슬 하나를 풀었다. 현관에는 졸업식 사진이 수십 장 걸려 있었고, 모두 같은 무대가 배경이었다. 사진 속 태훈만 해마다 조금씩 늙어 갔다. 사진 속 학생들은 번번이 다른 얼굴이었다. 어느 해에는 빈 의자만 찍힌 사진도 있었다.
“내가 장비를 만들었다.” 태훈이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 사라지는 걸 만들려고 한 건 아니야.”
그는 오래된 설계도를 펼쳤다. 피난 당시 대피소로 바뀐 제7시설에는 다친 학생들이 많았다. 수업을 못 들은 아이들을 출석 미달로 퇴학시키겠다는 결정이 내려오자 태훈과 교사들은 '보존 수업'이라는 예외 절차를 만들었다. 학생이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학교의 시간은 잠시 멈춘 것으로 처리하고, 돌아오면 중단 지점에서 다시 배울 수 있게 하는 제도였다.
“처음엔 달력을 잠깐 묶는 정도였지. 누구도 늙지 않게 하거나 미래를 훔치려는 장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열아홉 해를 건너뛰었습니다.”
“내가 안다. 그 뒤에 누군가 장부를 바꿨어.”
태훈은 작업대 아래에서 작은 벽시계를 꺼냈다. 시계는 태엽이 빠진 채 다섯 시 십삼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간은 첫 비상 대피 명령이 내려진 시각이었다. 당시 강당에 학생 열아홉 명이 남았고 소방 통로가 폐쇄돼 외부로 나올 수 없었다. 교사들은 한 시간을 벌기 위해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것이 가능할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한 시간만 멈추면 구조대가 길을 열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회수 장치가 사람의 나머지 삶을 담보로 잡았지.”
태훈은 눈을 감았다. 구조대가 도착한 뒤 아이들은 나왔지만 몇 명은 자신의 시간이 다른 사람의 서류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사고 조사에서는 분명한 기록을 남기기보다 졸업 처리했다는 도장을 찍었다. 실패한 대피를 '교육 과정을 정상적으로 마쳤다'는 행정 성과로 바꾸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민규가 물었다.
“그때는 얼굴을 봤어. 그런데 지금은 이름을 읽으려고 하면 하루가 빠져나가. 사진을 보고도 기억이 안 나.”
태훈의 손목에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표시한 오래된 시계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태훈은 그런 현상이 시작된 뒤 매년 강당을 청소했다. 자신의 이름이 그날의 수리 담당자로 남아 있어서, 졸업식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셀레나는 설계도 아래에 붙은 개정 문서를 발견했다. 태훈의 서명은 원본 도면에만 있었다. 개정안에는 '보존 중인 학습 시간은 향후 학생에게 대리 지급할 수 있다'는 조항이 덧붙어 있었다. 비상 대피 중 학생을 보호하기 위한 시간 정지 제도를, 다른 사람의 세월을 빌려 회계장부의 빈칸을 채우는 기능으로 바꾼 것이다.
“이걸 모르고도 매년 청소하러 오셨습니까?” 셀레나가 물었다.
“알게 된 뒤에는 더 그랬지. 내가 만든 장치가 누구를 끌고 갈지 모르니까.”
태훈은 자신을 변호하는 대신 강당의 열쇠를 건넸다. 그는 며칠 안에 졸업식이 재개된다면 낡은 시계 열아홉 개가 동시에 울릴 거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빌린 시간이 '반납'된다는 이름으로 특정 졸업생에게서 다시 회수된다. 그 계산에는 누구의 동의도 없었다.
민규는 노인이 자신에게 모두 책임을 떠넘길 거라 생각했으나 뜻밖에 태훈은 또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고장 신고 접수 기록'이었다. 해마다 졸업식 전날 같은 경고가 들어왔다. 시간 누수, 무인 교실에서 들리는 수업 소리, 빈 의자에 남는 체온. 태훈은 한 건도 숨기지 않고 신고했지만 서류에는 늘 담당 부서 없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도망치지 않았던 건 알겠습니다.” 민규가 말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책임이 없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단 오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구할 방법부터 찾죠.”
태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를 데려가려는 줄 알았더니 일 시키려는군.”
“원하시면 여기 남으셔도 됩니다. 안전 점검 과정에서 필요한 설명은 서면이나 전화로 받을 수 있어요.”
“아니, 간다. 젊었을 때 내가 잠가 놓은 문이라면 늙어서라도 열 수 있는지 봐야지.”
태훈은 당시 학교에 남은 열아홉 아이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처음에 그것을 노쇠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똑같은 소년을 세 번 꿈꾸면서 그 꿈마다 이름표만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밤의 이름표에는 백이준이라고 적혀 있었고, 어떤 밤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년월일이 있었다. 태훈은 꿈이 자신의 죄를 알려 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꿈은 증거가 아니죠.” 민규가 말했다.
태훈은 그 말에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사십 년 가까이 집에 기록을 모았다. 꿈이 아니라 문서와 사진, 실제로 들었던 말만이라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민규가 받은 첫 번째 장부에는 구조대 도착 전 강당에 갇혔던 학생들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열아홉 자리였지만 아이들의 수는 열일곱로 기록돼 있었다.
“두 자리는 왜 비었습니까?”
“모른다. 그때 누군가 나중에 올 학생을 위해 비워 두라고 했지.”
“누구요?”
“그 사람 이름은….”
태훈이 말을 잇지 못하자 셀레나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목이 마른 듯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도면을 펼쳤다. 당시 강당 한쪽에는 치료가 필요한 어린아이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가족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학생 열아홉 명'이라는 표기가 애초부터 사실이 아니었을 수 있었다. 그 숫자는 단순히 구조대가 확보해야 할 자리였다.
민규는 열아홉 자리와 열아홉 해를 섣불리 같은 값이라고 생각한 자신을 돌아봤다. 장치는 이미 서로 다른 물건을 같은 숫자로 바꿔 왔다. 사람이 열아홉 명이었던 것과 열아홉 해를 빼앗았다는 것이 우연히 같아도, 그 사이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개정이 있었을 것이다.
태훈은 옛 교사 윤소라의 편지를 보여 줬다. 그녀는 시간이 잠시 멈춘 뒤 아이들이 구출됐지만 한 소년이 다른 시대의 교복을 입고 나타났다고 썼다. 학교는 그 소년을 유령이라고 불렀고 교사들은 비상 상태의 충격으로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편지 끝에는 작은 한 줄이 있었다. '그 아이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누구도 어느 집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도요?” 셀레나가 물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우리 시대의 학생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랬어.” 태훈이 말했다. “가족을 찾는 대신 그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를 먼저 증명하라고 했지.”
민규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소라가 기록한 소년의 행동은 위험한 마법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물을 찾았고, 춥다고 했고, 집에 갈 버스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누구도 그 아이에게 지금 따뜻한 곳에서 쉴 수 있다고 알려 주지 않았다. 서류의 분류가 바뀌는 동안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문서에 없었다.
태훈은 소라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제자가 가족의 동의를 얻어 편지를 보관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민규는 편지를 바로 전부 공개하지 않았다. 사고와 관련된 부분을 정확히 보존하되 가족의 사연은 불필요하게 퍼지지 않게 하려 했다.
“선생님은 책임을 느껴서 여기까지 갖고 계셨군요.”
태훈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서였지. 책임을 진 적은 별로 없어.”
그 말은 변명보다 무거웠다. 그는 그날 이후 매년 강당에 가는 일이 반성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피해자의 가족을 찾으려 하거나 기록을 바로잡으려고 행동한 적은 적었다. 때로는 익숙한 죄책감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민규는 태훈에게 오늘 학교에 와서 옛 장비를 보여 주길 요청하면서도 무리하게 작업을 시키지 않았다. 태훈은 고령이었고 오래전 부상으로 계단을 빠르게 오르기 어려웠다. 그는 과거 장비를 만든 사람에게 일의 결말까지 전부 맡기는 게 아니라 현재의 기술자들과 함께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훈은 그 배려를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예전에는 나 혼자 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럴 수 없습니다. 장치를 잘 아는 분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눈으로 잘못된 걸 찾을 사람도 있어야죠.”
태훈은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지면 강당의 시계들은 다시 자신을 부를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수리해 보겠다고 들어가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혼자 가지 않았다. 장갑 한 짝은 자기 손에 남겨 두고 다른 한 짝은 작업대 위에 놓았다. 누군가 도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두겠다는 뜻이었다.
태훈의 작업장에는 시계마다 작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고장 난 날짜, 고친 날짜, 주인을 찾아간 날짜가 구분돼 있었다. 그가 유독 오래 붙잡고 있던 것은 빨간 손목시계였다. 주인은 사고 때 강당 안에 있었던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구조된 뒤 어느 시설로 옮겨졌고, 시계는 잃어버린 물건으로 남았다.
“아직 주인을 못 찾으셨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찾았다는 연락이 왔었네. 하지만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어. 학교가 '기록상 반환 완료'라고만 했지.”
민규는 그 말을 듣고 시계를 돌려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수첩에 적었다. 이후 제0기록관에 들어가면 이 물건의 주인을 찾는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계 하나가 사건의 모든 해답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태훈은 조심스럽게 시계를 상자에 넣었다. 그는 아직 그 아이에게 직접 사과할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온다면 변명부터 늘어놓지 않고 아이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들을 생각이었다. 민규는 그에게 약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태훈은 손목시계의 태엽을 한 번만 돌렸다. 초침이 앞으로 세 칸 움직였다. 처음으로 거꾸로 가지 않는 작은 시계였다.
태훈은 떠나기 전에 낡은 사진틀 하나를 민규에게 보여 줬다. 사진에는 구조가 끝난 뒤 강당 입구에서 웃는 교사들이 있었다. 그 얼굴들 사이에 한 사람이 검은 그림자로 번져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태훈이 쓴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당일 현장 책임자가 분명히 왔으나 이름 확인에 실패.' 그는 그때부터 누가 책임자인지 말하려고 할 때마다 기억이 끊겼다고 했다.
민규는 사진이 조작됐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태훈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안도했다. 자신이 모르는 사실을 그대로 모른다고 써도 된다면, 잊힌 얼굴을 떠올리려고 계속 거짓된 기억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는 원본 사진을 감정할 수 있게 하되 지금 보고 있는 그림자만으로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민규는 그러겠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자 골목 끝에 교복을 입은 아이 한 명이 서 있었다. 아이는 태훈을 보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관리인님. 졸업식은 정각에 시작하셔야 해요.”
“너는 어느 학교 학생이니?” 태훈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학생이 아니에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그 말과 함께 소년의 그림자가 태훈의 발목을 붙들었다. 민규가 손전등을 비추자 그림자는 아이의 발끝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졌고, 태훈의 벽시계에서는 초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는 미래의 아이까지 부르는군.” 태훈이 중얼거렸다.
민규는 소년이 서 있던 보도블록을 살폈다. 젖은 발자국이 있었지만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아이가 걷는 동안 자랐다가 다시 작아진 듯했다. 그의 수첩에는 새 항목이 생겼다. [현상 발생 지역 확대. 접근한 대상의 현재 연령과 무관. 시간 장치의 출입 영향 조사.] 그는 강당에서 시작된 문제가 학교 밖으로 번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제14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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