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의 손목에서 빛나던 교복 단추는 손가락으로 만질 수 없었다. 단추처럼 보였지만 살갗의 온도도, 옷감의 질감도 없었다.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단추가 따라오는 대신 경비실의 졸업 기념 시계가 한 칸씩 움직였다. 이준은 그것을 보고 유정의 손을 자기 소매로 감쌌다.
“내 것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오빠가 뭘 했는데.” 유정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냥 네가 살아 돌아온 게 좋아. 그건 오빠 책임이 아니야.”
민규는 두 사람의 말을 끊지 않았다. 다만 단추가 두 사람의 접촉 때마다 어떻게 변하는지 기록했다. 이준이 유정에게 손을 댔을 때는 시계가 세 번, 두 사람이 떨어졌을 때는 한 번 움직였다. 그것은 물리적 마찰의 결과가 아니었다. 관계를 확인하는 행동을 담보 승인으로 해석하는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손을 잡는다고 동의한 게 아니에요.” 민규가 명확하게 말했다. “셀레나, 이 행동을 승인으로 읽는 회선부터 차단할 수 있습니까?”
셀레나는 벽 안의 마력선 세 가닥을 조사했다. 첫째는 시계로 이어지는 동기화 회선, 둘째는 졸업장 인장으로 이어지는 증명 회선, 셋째는 기숙사 복도에 연결된 출입 회선이었다. 마지막 회선을 아무렇게나 끊으면 학생들이 비상구를 이용할 때 문이 잠길 수 있었다.
“담보 연결만 따로 격리할 수 있어요. 다만 기록이 동시에 갱신되는 이유를 알아야 하죠.”
민규는 학교 축제 준비를 위해 마련한 이동식 안내판을 가져왔다. 복도에서 시계를 볼 수 없도록 가리되, 사진 촬영과 도주 경로를 막지 않는 위치였다. 경보가 걸린 물건을 모두 창고에 숨기면 문제가 없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이 호기심에 다가와 이름을 읽는 일은 막아야 했다.
루카는 계단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형, 졸업생이라는 말 때문에 우리 기숙사 애들 이름표도 깜박여요. 사감 선생님이 방에 있으라는데, 친구 하나가 자기 나이를 헷갈린다고 해요.”
“마법이든 착각이든 실제로 어떤 증상이 있는지 확인해 줘. 누가 몇 살이어야 하는지는 지금 정하지 말고.”
루카는 즉시 뛰어가려다가 멈췄다. “형은 늘 이름보다 사람을 먼저 보라고 하잖아요. 이번에는 나이부터 보지 말라는 거죠?”
“맞아. 기록에 적힌 나이는 의학적으로 확인해야 할 정보일 수도 있지만, 그 숫자 하나가 곧 사람 전부는 아니니까.”
새벽 한 시가 지나자 학교 의료실에서 연락이 왔다. 기숙사의 다른 학생들은 실제로 나이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명이 지난 학기 시험을 본 날짜를 잘못 기억했고, 한 학생의 수첩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제가 적혀 있었다. 특정 회선을 통해 '졸업식 재개'를 준비하는 동안 기억의 표제가 덧씌워지고 있었다.
이준에게는 더 직접적인 증상이 나타났다. 그의 손가락 끝이 잠깐 투명해지더니 벽시계의 숫자들 사이로 겹쳐 보였다. 셀레나는 위험한 마력이 피부를 통과하는 현상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준의 육체가 곧장 지워지는 대신, 그를 특정 날짜의 사람으로 분류한 기록이 현재와 경쟁하는 상태였다.
“제가 스물세 살일 때 썼다는 일기장이 있대요.” 이준이 말했다. “그런데 저는 열아홉에서 멈췄어요. 스물세 살인 제가 진짜 있었다면 그 사람은 어디 갔죠?”
유정은 휴대전화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 줬다. 오빠의 서명 같은 글씨가 있었다. 그림 공모전 참가 명단, 친구가 보낸 엽서,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가 적힌 그림 뒤쪽. 하지만 얼굴이 나온 사진은 없었다. 화가가 사라진 그림만 남아 있었다.
민규는 하나하나 원본의 날짜를 확인했다. 과거의 누군가가 이준의 이름을 대신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동시에 이준이 실제 살아온 시간이 뒤늦게 다른 모습으로 기록됐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가짜 기억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됐다.
그는 유정에게 가족의 과거를 묻기 전에 한 가지를 물었다. “오늘 오빠를 데려가면 안전하게 쉴 곳이 있습니까?”
“집은 있어요. 하지만 오빠가 낯설어할 거예요. 어머니 방도 이제는 제 작업실이고요.”
“그럼 오늘 어디에 있을지는 두 분이 함께 정하세요. 의료실의 지원도 받을 수 있고요. 이 사람이 졸업생인지 아닌지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시간을 당장 되찾는 능력보다 지금 밤을 어떻게 보낼지 선택할 권리였다.
미라는 의료실에서 오래된 수첩 여러 권을 가져왔다. 이준의 어머니가 가끔 학교에 맡겼던 실종자 수색 기록이었다. 그중 한 권에는 어린 유정이 그린 그림이 끼워져 있었다. 그림 속 오빠는 웃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큰 시계가 달려 있었다. 시계 바늘은 둘 다 다섯 시 십삼 분을 가리켰다.
“어릴 때부터 그 시간이 신경 쓰였나 봐요.” 미라가 말했다.
유정은 그림을 보자 오래된 수첩을 만지려다가 멈췄다. 학교가 개인 물건을 보관한 경위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민규는 기록을 가져온 직원에게 해당 물건이 기증된 것인지 임시 보관인지 물었다. 검색용 자료로 사용해도 되는지도 확인했다. 유정이 가족 기록을 돌려받길 원하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돌려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이런 것까지 확인해야 하나요?” 루카가 속삭였다.
“서류 주인이 이 사람들인데 당연하지.” 미라가 먼저 대답했다. “잃어버린 사람의 흔적을 찾는다고 남은 가족의 물건을 마음대로 쓰면 안 되잖아.”
유정은 당장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수첩 속 편지 한 장을 직접 읽어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히 자신이 쓴 편지였지만 누군가에게 빼앗긴 물건을 다시 만지기까지는 허락을 구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민규가 편지를 건네자 유정은 작게 읽었다. '오빠가 돌아오면 내가 키가 더 크다고 놀라겠지.' 어린아이가 상상한 가장 큰 변화는 자기 키였다.
그 편지를 읽던 이준은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삼켰다. 유정은 한 번에 오빠를 다독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수첩 옆면의 동물 그림을 가리켰다. 자기는 열한 살 때부터 새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고양이를 키운다고 말했다. 이준은 고양이를 무서워한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유정은 깜짝 놀랐다. 어릴 때 오빠는 동네에서 가장 사나운 고양이도 안아 들곤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게 꼭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지?” 이준이 물었다.
“응. 나도 달라졌으니까.”
민규는 그 대화를 기록으로 옮기지 않았다. 사건과 직접 관련된 단서를 제외하면 사적인 회복의 장면까지 조사 자료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는 방 밖으로 나가 복도에서 기다렸다. 셀레나는 그 옆에서 기록 장치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두 남매가 웃는 동안 졸업장 인장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정이 '오빠가 내 보호자였어'라고 말하는 순간 인장이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바로 저 표현에 반응하네요.” 셀레나가 속삭였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라는 관계를 확인하는 말만 붙잡아 담보로 바꾸는 것 같았다. 그는 면담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급히 둘을 떼어 놓을 정도의 위험은 아니었지만 어떤 표현이 위험 신호를 만드는지 알려 줘야 했다. 그렇다고 남매에게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지시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 장치가 가족 관계를 승인으로 오해합니다. 두 분 탓은 아닙니다. 제가 잠깐 장치를 분리할 동안은 졸업장에 가까이 서지 말아 주세요.”
유정은 오빠 손을 놓지 않으려다가 그 손을 천천히 이준의 무릎 위에 올렸다. 그 선택은 손을 잡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다치지 않기 위한 잠시의 조치였다.
의료실 책임자는 이준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숫자를 조심해서 선택했다. 육체적 나이와 주민 기록상 나이가 일치하지 않지만, 현재 검사에서는 즉시 위험한 노화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장치가 계속 작동할 경우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알 수 없어 일정한 간격으로 확인해야 했다. 민규는 의료진이 '젊어졌다'거나 '늙지 않는다' 같은 말을 쉽게 쓰지 않는 것이 반가웠다.
그날 이준은 의료실 복도에 놓인 자동 판매기에서 음료 하나를 샀다. 가격을 보고 놀라더니 지금까지 자신이 아는 가격표가 전부 바뀌었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민규는 음료 맛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준은 첫 모금을 마시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다행이네요. 이것만큼은 예전에도 맛없었어요.”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웃었다. 이준도 잠깐 웃었다. 누구도 그를 낯선 시간에서 온 괴물이라고 바라보지 않았다. 그 짧은 평범함 속에서 민규는 왜 복도와 출입문을 고집해 점검하는지 다시 알 것 같았다. 사람은 구조실에서뿐 아니라 자동 판매기 앞에서도 살아야 했다.
조용한 새벽, 유정은 학교 밖으로 나가 공기를 마셨다. 전철역 간판에는 그녀가 오빠를 잃던 날 없던 노선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매일 지나다니던 길이었는데 오늘은 새삼 낯설었다. 오빠에게 이 도시를 어떤 순서로 보여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이 설명하면 잃어버린 날을 더 크게 느낄 것 같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혼자 남겨 두는 것 같았다.
미라가 작은 종이 지도를 건넸다. 지도에는 요즘의 버스 정류장과 병원, 편의점, 화장실이 표시돼 있었다. 관광 안내가 아니라 낯선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였다. 유정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지도를 받았다.
“오빠에게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여 줄 생각만 했어요.”
“어디서 밥 먹고 어디서 쉬는지부터 알아도 괜찮죠.” 미라가 말했다.
유정은 지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오빠에게 열아홉 해를 한꺼번에 설명하는 사람보다 내일 어디서 만날지 약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생각만으로 아주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편 케스는 본부 기록보존총국의 정식 서버에 이준의 이름을 입력했다. [백이준 / 졸업생 / 사회 복귀 적응 중.] 한 줄 아래에 작은 글씨가 추가됐다. [연관 동행인 백유정 / 담보 잠정 승인.] 케스는 즉시 삭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화면을 기록하고 법적 차단 명령을 신청했다. 그는 지난번 중앙 기록망을 무턱대고 지우려다 실종자들의 구조 흔적까지 없앨 뻔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가 승인했는지 나오나요?” 민규가 물었다.
“현재 직인으로는 '졸업식 진행자'입니다. 그런데 진행자 실명이 없습니다. 서명은 제0기록관의 원본으로만 연결됩니다.”
케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원본 보관자에게 열람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그 기관은 공식 시설 명단에 없었다. 심지어 시설을 폐쇄한다는 결정조차 어느 관청의 관할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 행정 요청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오르반은 마법학원의 졸업식 자료를 모아 왔다. 십구 년 전 행사의 영상은 손상돼 재생되지 않았고, 대신 낡은 좌석 배치도가 있었다. 졸업생석 열다섯 줄 중 마지막 줄만 색이 달랐다. 그 줄의 열아홉 좌석은 교내 비상 대피 시설의 예비 인원으로 표시돼 있었다. 한 칸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01, 02, 03. 마지막 19칸에는 이름 대신 '미래 이수'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처음엔 학생이 더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확보하는 건 줄 알았어요.” 오르반이 말했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학생 수가 아니라 기간일 수도 있겠군요.”
“열아홉 자리, 열아홉 해.” 셀레나는 배치도를 확대했다. “누구의 시간인지 연결해야 합니다.”
이준은 낡은 종이를 보더니 자신의 목을 만졌다. “저건 알아요. 마지막 줄 맨 구석에서 누가 종을 치면, 모두 일어나야 했어요.”
“졸업식에 참석했습니까?”
“모르겠어요. 한 번도 학교에 안 갔는데, 저 의자의 나무 냄새가 생각나요.”
그는 눈을 감고 기억의 조각을 붙잡았다. 막 칠한 바닥, 딱딱한 교복 깃, 마지막 줄에서 울던 울음소리. 그리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인 말. '이제 네가 안 살아도 되는 날들은 학교가 맡아 줄게.' 그 문장이 떠오르자 이준은 심하게 떨었다.
의료진이 안정을 확인하는 동안 민규는 졸업식 소리를 다시 틀지 않았다.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단서를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사자가 무너지는 상황을 두고도 실마리부터 캐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유정은 오빠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릴 적에는 늘 오빠 뒤에 숨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물컵을 잡아 주었다. 오빠에게 컵을 건네고 말없이 기다리는 일에 열아홉 해 동안 연습해 온 인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때 의료실 전화가 울렸다. 학교 밖 오래된 졸업생 하나가 자신도 오늘 아침 열아홉 살 때 입었던 교복으로 돌아왔다고 신고했다. 세 번째 신고는 다른 도시에 있었다. 얼굴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살았던 겨울 세 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람이었다. 일어난 현상은 달랐지만 신고서 아래의 심사 코드는 같았다.
[대리 이수 완료. 잔여 시간 회수 예정.]
민규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한 사람의 특이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졸업식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졸업생이라 불린 사람들이 전부 같은 자리에 불려 나올지도 몰랐다.
제14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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