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세지 말고 자리를 세어라.”
도윤의 고장 신고서에 적힌 문장을 읽은 민규는 긴 의자가 놓인 대기실을 다시 살폈다. 의자는 열두 개였고 그중 열한 개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지막 의자에는 작은 담요만 놓여 있었다. 복도 끝의 대기 인원 표시는 여전히 0이었다. 빈 의자가 하나 있는데도 0이라는 건 단순한 숫자 오류가 아니었다. 이 건물에서는 의자의 수와 사람의 수 중 어느 것을 공식 기록으로 취급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여기서 접수한 사람은 모두 임시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까?” 민규가 도윤에게 물었다.
도윤은 단정하지 못했다. “창구가 승인한 사람만요. 서류상으로는요.”
“그럼 승인되지 않은 동안은?”
“대기 상태입니다.”
“말을 못 하고 문도 못 여는데 그것이 보호입니까?”
도윤이 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 셀레나가 환기 덕트 옆에서 낡은 접합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에는 두 회선이 평행하게 달렸다. 하나는 실제 환기용 모터의 제어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말소리를 서류에 찍히는 표식으로 바꾸는 회수선이었다. 두 회선은 표면상 하나의 스위치로 묶여 있었지만 내부 접합은 분리돼 있었다. 셀레나는 원래 제조사가 남긴 배선 기호를 읽고 호흡과 환기가 계속되도록 한 채 마법 회수선만 약하게 낮출 수 있다고 판단했다.
“테스트는 한 명에게만, 동의를 받고 진행합시다.”
여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린과 닮은 장난감 기차를 쥔 손이 떨렸다. 셀레나가 회수선을 일시 차폐하자 여자의 입술 사이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나왔다. 그는 기침하다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 기계는 계속 재촉했다. [자격 확인. 이름과 관계를 밝히십시오.] 민규는 먼저 기계의 안내 음성을 끄고 물을 건넸다.
“지금 이름을 밝힐 필요 없습니다. 목이 불편하면 손짓으로 대답해도 됩니다.”
여자가 겨우 말했다. “그애 엄마를 찾으러 왔어요.”
나린은 그 말에 몸을 굳혔다. 여자가 자기 엄마라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해진이라고 해요. 아이 어머니가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여자 윤해진은 구두 수선 일을 하다 반년 전 폐역 앞에서 작은 아이가 울고 있는 걸 발견했다고 했다. 아이 곁에는 녹색 장화와 이름표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표는 젖어서 읽을 수 없었다. 해진은 경찰과 보호시설에 연락하려 했다. 그러나 폐역의 전화가 울리고 이상한 안내가 나왔다. 아이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으면 보호 시설로 이송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해진은 자기 이름을 적는 대신 우선 아이가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문의했다. 그날 이후 그녀 자신이 대기자가 됐다.
“그 애 어머니를 찾아야 하는데, 창구에서는 제가 보호 책임자라고 해요. 저는 그런 결정을 한 적 없어요.”
나린은 손에 든 기차를 바라봤다. “엄마가 아니어도 저를 찾아준 거예요?”
“그래. 그런데 나도 여기서 길을 잃었어.”
민규는 두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지금은 강제로 관계를 정할 필요가 없었다. 도윤은 그들의 대화를 보며 망연해했다. 그는 해진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매일 나눠 준 물잔 목록에는 여자의 컵 번호가 있었다. 실제 얼굴을 보면서도 기록이 없으면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한 셈이었다.
민규는 회수선을 더 높이지 말아 달라고 했다. 오래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갑자기 긴 진술을 요구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었다. 그는 종이와 연필, 그림판을 의자 사이에 두고 원하는 사람이 스스로 표현하도록 했다. 노인은 한참 종이를 바라보다 장갑 그림을 그렸다. 서툰 선 아래에는 '아침에 돌아갈 곳'이라고 적었다. 다른 사람은 이름 대신 작은 가게 간판을 그렸다. 누구도 번호표와 같은 모양을 그리지 않았다.
노인은 목소리를 돌려받은 해진을 잠시 바라보더니 자기 장갑을 꽉 쥐었다. 그는 해진처럼 말할 수 있는지 묻지 않았다. 오랫동안 대기실에서 말하려다 실패한 사람이라면 다시 시도하는 일 자체가 두려울 수 있었다. 민규는 그가 원한다면 그림판이나 종이를 이용하자고 설명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떨리는 손으로 서너 글자를 적었다. [먼저 나가야.] 누가 먼저 나가야 한다는 뜻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자신이요, 아니면 다른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노인은 한참 종이를 내려다보다 선 하나를 그었다. 자신과 타인을 나누려는 선처럼 보였다. 그는 양쪽에 작은 사람 그림을 그린 뒤 가운데 문을 그렸다. 그리고 그 문을 반쯤 열었다. 민규는 자신이 알아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다 같이 나갈 수 있는 문을 찾자는 말씀이신가요?”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한 얼굴이 아주 조금 펴졌다.
해진은 자기 목소리가 돌아온 데 놀라 한동안 물잔을 내려놓지 못했다.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는 목이 타면 컵을 들어 보여 줄 수 있었지만, 누가 물을 가져다주는지 모르는 날도 있었다. 그는 대기실의 끝 의자에 앉은 젊은 남자에게 물이 필요한지 물었다. 남자는 양손을 내저었다. 그동안 기계의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번호표가 빛났기 때문에, 말 한마디가 다시 자신을 해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해진이 말했다. “저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눈을 감았다. 해진의 위로가 즉시 모든 두려움을 없애진 못했지만, 대답하지 않는 선택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그에게 낯선 경험이었다. 도윤은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다 자기 업무 수첩을 펼쳤다. 그동안 '응답 없음'이라고 적혀 있던 항목이 실제로는 '응답할 수 없는 상태'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고서를 어떻게 수정할지 묻고 민규가 보는 앞에서 먼저 원래 기록을 보존했다.
대기실 뒤쪽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밖에서는 강변에 핀 마른 억새가 보였다. 해진이 손으로 창틀을 만지자 나린이 말했다. “저기서 매일 배가 지나갔어요. 아침에도, 저녁에도. 그런데 늘 같은 색이었어요.” 민규는 창문을 직접 확인했다. 창문 바깥의 작은 배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반복 영상이었다. 실제 강의 수위와 그림 속 배의 흔들림이 일치하지 않았다. 반복 영상만 보며 머문 사람들은 바깥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셀레나는 벽면 마법을 끄지 않은 채 창문의 바깥 환경을 비교해 보여 줄 작은 거울을 설치했다. 지금 이 건물의 유리가 바깥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지 확인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창문 속 배의 색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실내 마법 때문이라고 해서 실내 사람들에게 즉시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그들도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으며 살아야 했으니까.
해진은 몇 달 전 눈이 내리던 날을 기억해 냈다. 실내 창문에는 따뜻한 봄빛이 비치고 있었는데 들어온 남자의 장화에는 눈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그 남자에게 밖에 눈이 오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번호표를 읽지 못해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 생각하면 그 남자는 눈을 보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 차례가 사라질까 겁났던 것이다.
“제가 나가서 눈을 치워 볼걸 그랬어요.” 해진이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지 않았잖아요.” 민규가 말했다. “나가지 못한 사람에게 밖에서 했어야 할 일을 떠맡기지 맙시다.”
도윤이 대기실로 돌아와 차를 따라 주었다. 그는 늘 해 오던 일이었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각각의 사람이 원하는 따뜻함을 물었다. 어떤 사람은 차를 원했고 어떤 사람은 물만 원했다. 할아버지는 단맛이 싫다고 손을 저었다. '일괄 지급'이라는 단어 아래 묶였던 사람들의 취향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민규는 그 변화를 보고도 곧바로 성공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일부 돌아왔다고 출구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기실 벽에 간단한 상황판을 붙였다. 확인된 사실, 추정 중인 원인, 즉시 필요한 도움을 분리했다. 적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의견을 썼고 어려운 사람은 도윤에게 전달했다. 안내문이 처음으로 사람들의 말을 받아 적는 도구가 되었다.
도윤이 창구의 정산 대장을 가져왔다. 지출 항목 중에 '이름값'이라는 칸이 있었다. 돈이나 물건을 받는 항목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정식 명칭을 배정받을 때마다 다른 대기자의 '남은 보호 시간'에서 조금씩 시간이 차감되는 방식이었다. 셀레나는 종이의 마법 표식을 분석했고, 실제 흐르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구조 요청이 유효하다고 인정되는 기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사라지면 외부 안전 회선에서 그 사람의 신고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는 충분히 위험했다.
“대기자가 여기에 오래 남을수록 다른 시설의 신고가 빨리 처리된다는 거군요.” 케스가 무전으로 말했다.
“처리가 아니라 숫자를 앞당기는 겁니다.” 민규는 서류를 넘겼다. “실제 구조대가 도착하는 것과 무관한 점수예요.”
셀레나는 단위를 살폈다. 이름값은 오래전 시설을 잃은 사람들의 긴급 신고를 누군가 대신 받아 주도록 만든 '임시 대기 시간' 기록에서 시작됐다. 원래는 도움받을 때까지 신호를 유지하는 안전망이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의 신호 유효 기간을 다른 사람의 승인 처리 속도로 교환할 수 있게 바꿨다. 서류 가운데 조잡하게 덧붙인 붉은 선이 그 변경의 흔적이었다.
도윤은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는 신고를 끊지 않기 위한 장치라고 배웠습니다. 사람을 대기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나중에 들었어요. 문이 하나씩 사라지고, 그다음엔 이름표가 떨어지기 시작했죠. 그런데 제가 상급자에게 문제를 보고할 때마다 그 보고서가 '해결 완료'로 바뀌었습니다.”
민규는 도윤이 책임을 벗을 수 있도록 모든 잘못을 기계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도윤은 실제 사람을 보지 않고 신고서를 처리해 왔다. 그가 직접 막을 수 있었던 일을 몇 번이나 놓쳤는지도 조사해야 했다. 하지만 사내가 솔직하게 말하는 정보는 현장을 고치는 데 필요했다. 민규는 아직 남아 있는 직접 작업 일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창구 뒤 작은 수납장을 열자 구겨진 종이 상자가 나왔다. 그 안에는 번호표처럼 접힌 짧은 편지가 많았다. 대부분은 끝까지 쓰지 못한 문장이었다. '오늘은 집에 가야 합니다.' '아이가 기다립니다.' '난 이름을...' 도윤은 그것을 폐지로 버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사라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해진은 그 가운데 자기 글씨를 발견했다. '아이에게 엄마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전까지, 그 아이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편지 아래에는 낯선 필체로 붉은 결재가 찍혀 있었다. [대리 보호자 동의 완료.] 그 문구를 보는 순간 해진의 표정이 굳었다. “저는 동의한 적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민규는 성급하게 봉인을 찢지 않았다. 동의 조작의 증거가 사라질 수 있었다. “누가 어떤 절차로 이 문구를 붙였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나린은 빈 의자 위 담요를 가리켰다. “거긴 어제 제가 앉던 자리예요. 제가 일어나면 또 누가 오나 봐요.”
민규는 빈 의자에 놓인 담요를 살폈다. 섬유 사이에 새로 짠 듯한 흰 실이 섞여 있었다. 그 실의 끝은 바닥을 지나 창구 아래로 이어졌다. 여기에 없는 사람의 자리를 통해 다른 사람의 신고 시간을 차감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셀레나는 정산 대장의 맨 마지막 장을 비춰 봤다. 겉으로는 빈 장부처럼 보였지만 빛을 옆에서 비추자 아주 작은 눌림 자국이 드러났다. 숫자를 적었다가 지운 자국이었다. 그는 그 자국만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누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실제 기록이 필요했다. 민규는 서류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서둘러 답을 내놓기보다 조작된 흔적을 먼저 지켜야 했다.
대기실 구석의 젊은 남자가 그때 손을 들었다. 그는 숫자가 바뀔 때마다 자기 몸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고 적었다. 민규는 그 말을 정산 대장과 구별해 별도로 기록했다. 수치로 확인되지 않는 경험도 그 사람에게는 실제였다. 장부의 오류를 고치는 일과 사람이 겪은 일을 듣는 일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지 못했다.
그때 인원 표시등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0이 1이 되고, 곧 12가 됐다. 그리고 한 줄이 떠올랐다.
[미납 이름값 발생. 가장 오래 기다린 대기자를 회수합니다.]
노인의 장갑 위에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민규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바로 의자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장치가 무엇과 연결됐는지 확인하지 않고 힘으로 끊으면 누군가 더 깊이 끌려갈 수 있었다. 그는 셀레나에게 회수선을 그대로 고정해 달라고 부탁하고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지금 밖으로 나가고 싶으십니까?”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한 단어를 적었다. [당연하지.]
민규는 그 대답을 출입 기록표 첫 장에 그대로 옮겼다. 방 안의 누구도 그 노인에게 대신 대답할 권리가 없었다.
제1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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