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 관리실의 첫 번째 대장은 표지가 없었다.
정민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오래된 종이가 습기 때문에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바르트는 손으로 억지로 떼려는 사람을 막고 얇은 종이 지지대를 꺼냈다. 셀레나는 마법을 쓰지 않고도 글씨가 읽히는지부터 살폈다. 케스는 수십 년 동안 바뀐 기록이 원본처럼 보일 수 있으므로 발행 순서와 보관 장소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조심스러운 이유는 비밀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누군가 서둘러 서명한 결과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장 첫 장에는 열한 시설의 이름이 없었다. 대신 사고를 보고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위험 발견 시, 누구나 구조 요청을 남길 수 있다. 구조 요청자는 책임자가 아니다.] 아주 평범한 원칙이었다. 민규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그 원칙이 살아 있었다면 정은희와 많은 학생이 삼십 년 동안 갇히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잘못을 발견했는지와 누가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는 다른 질문이었다.
두 번째 장에는 누군가 붉은 잉크로 수정한 문장이 있었다. [구조 요청을 접수한 사람은 해결 완료를 승인해야 한다.] 원칙의 단어 몇 개를 바꾸었을 뿐인데 뜻이 달라졌다. 구조를 요청한 사람이든 구조 요청을 받은 사람이든 최종 결과를 확인할 책임을 혼자 져야 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후 수정본에서는 더 노골적이었다. [가장 최근에 확인한 사람을 최종 관리자로 지정.] 그것이 열한 시설을 묶는 규칙이 됐다.
“그렇게 하면 장치가 작동을 멈추지 않겠죠.” 셀레나가 말했다. “매번 다음 사람을 찾아서 결재를 넘기면 되니까요.”
“사고도 끝나지 않겠지.” 바르트가 답했다.
민규는 마지막 장을 펼쳤다. 무수한 이름 가운데 어느 것도 최초 관리자라는 항목에 들어맞지 않았다. 이름이 나타나는 시각은 모두 실제 기록보다 늦거나 빨랐다. 정민규, 정은희, 하셀, 제0설계국의 직원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확인 업무에 참여했지만, 어떤 사람도 수십 년의 실험을 혼자 승인한 적은 없었다. 관리자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기록이 오히려 가장 믿을 만했다.
그날 제7시설에서 정식 화상 회의가 열렸다. 은희는 보건실에 앉아 참석했고, 미라와 루카는 학생 대표로 의견을 전했다. 루카는 마이크 앞에서 긴장해 종이를 두 번 떨어뜨렸다. 그는 자신이 숫자로 세어지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친구의 이름이 사라지면 책상 하나가 비었지만, 선생님은 정원이 맞다고 말했다. 그 경험 때문에 그는 이름이 지워지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했다고 했다. “출석부가 맞다고 해서 사람이 괜찮은 건 아니에요.” 그 짧은 문장에 방이 조용해졌다.
미라는 동생의 어깨를 다독인 뒤 말했다. “보호를 받는 사람에게는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어요. 저희가 동의하지 않아도 안전한 곳에서 나갈 길은 남겨 주세요.” 은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강할수록 대신 결정하고 싶어지기 쉽다. 하지만 보호한다는 이유로 사람의 선택을 빼앗으면 기록망과 무엇이 다를까. 그녀는 병원에 남아 있는 환자와 학생의 개인정보를 어떻게 보호할지도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한서령은 시계공의 작업실에서 오래된 확인 장치의 원리를 설명했다. 원래의 태엽 장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났을 때 아직 응답하지 않은 시설에 다시 신호를 보내는 역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첫 설계도에는 ‘미응답’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제0설계국은 그 항목을 ‘관리자 지정 대기’로 바꾸었다. 나중에는 그 칸에 가장 최근에 구조를 요청한 사람의 이름을 넣도록 만들었다. 장치가 바뀌고 나서야 누군가의 간절한 목소리가 결재 문구가 됐다.
오르반은 자신이 과거 어떤 보고서를 승인했는지 설명했다. 그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총국의 명령을 먼저 믿었고, 학생들을 확인하기보다 출입문을 닫는 편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그 결정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다고 했다. 민규는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오르반이 책임을 인정했다고 해서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같은 위험이 다시 생긴다. 그는 오르반에게 사과를 반복하기보다 현재의 비상 출입 절차를 실제로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서리나루 역에서는 역장이 구조 기록을 공개할 범위를 정했다. 구조된 학생들의 얼굴과 상세한 사연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창고에 학생들을 가둔 장치가 존재했고, 그 장치의 안전 검증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시민들의 실종 신고가 들어오면 보호기관과 연결할 창구도 만들었다. 도만은 오래전 신고받았던 가족들에게 연락하면서 한 번에 모든 답을 약속하지 않았다. 사라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런 작은 작업들이 이어지는 동안 원점 관리실에서는 이상한 변화가 나타났다. 거대한 기록 선반의 마지막 페이지가 한 장씩 닫혔다. 각 시설의 실제 확인 결과가 도착할 때마다 자동 관리자 지정란이 흐려졌다. 셀레나는 이것이 장치의 완전한 정지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중앙은 아직 살아 있었고, 다른 경로로 책임을 넘기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새로운 관리자를 지정하는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하셀은 의료실에서 수첩을 넘겨 보다가 민규에게 연락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약했지만 말은 분명했다. “작동을 멈추게 하려면 열한 시설을 동시에 폐쇄해야 한다고 할 겁니다. 그 말을 믿지 마세요. 원래 설계는 각 시설이 독립해서 구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럼 지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뭘까요?”
“각 시설이 스스로 문을 열 수 있게 해 주세요. 중앙은 도움을 청할 때만 연결하면 됩니다.”
민규는 그 말을 곱씹었다. 누군가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면, 시스템의 역할은 사람이 서로 연락하는 일을 돕는 데 있을 것이다. 그는 제0설계국의 기록망을 통째로 부수는 것보다 위험한 자동 지정 기능을 분리하고 필요한 구조 신호는 남기는 방법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 선택은 쉽지 않았다. 기록망이 제공하던 편리함을 잃을 수도 있고, 그동안 누군가 대충 적어 둔 서류를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래도 사람을 지우지 않는 편리함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스가 마지막 확인 문서를 가져왔다. 열한 시설의 담당자가 각자의 출입 상태와 확인 결과를 기록했다. 아직 응답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곳에는 ‘안전’ 대신 ‘미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규는 그 부분을 그대로 남겼다. 자동 지정란에는 아무도 서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각자 확인한 사실만 남기고, 후속 조사 책임자를 실제 기관별로 지정했다.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거짓말보다 훨씬 느린 방법이었다.
원점의 벽에서 긴 종소리가 울렸다. [중앙 관리자 지정 절차 보류.] 민규는 그 문장을 보고도 사건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보류는 종료가 아니었다. 실제 사람의 출입과 기록의 보존이 계속 확인되어야 했다. 그는 하셀의 구조 경과를 의료진에게 확인하고, 방풍 터널의 남은 출입구를 다시 봉쇄했다. 봉쇄의 목적은 사람을 가두는 게 아니라, 위험한 시설에 누군가 무턱대고 들어가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구조팀은 필요할 때 문을 다시 열 수 있는 수동 절차를 남겼다.
사건을 정리하는 일은 구조보다 덜 위험해 보였지만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시간이 필요했다. 서리나루의 보호소에서는 자신이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밖의 친구들이 이미 어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보호 담당자는 그에게 결정할 시간을 주었다. 누구도 구조됐으니 당장 예전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벨라는 아이들과 작은 수업을 시작했다. 시험이나 졸업장이 없는 수업이었다. 그날 무엇이 좋았는지 말해 보는 시간이었는데, 몇몇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라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녀 자신도 오랫동안 ‘교감’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바로 떠올리기 어려웠다. 아이들의 침묵을 불성실이라고 꾸짖지 않기로 했다.
온유는 창문 밖의 바다를 보며 그린 그림을 보여 주었다. 다른 아이는 오래된 급수탑을 그렸다. 그림들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색을 빌려 주었다. 벨라는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예전 백종 학원에서는 교실의 모든 종이가 같은 크기여야 했고, 네 개의 자리에 다섯 명의 아이를 맞춰야 했다. 지금 이 방에서는 종이 크기도 그림의 색도 달랐다. 아무도 그 차이를 문제라고 하지 않았다.
서리나루의 도만은 보호소에 작은 책장을 기증했다. 자신이 어릴 적에 읽던 모험담 몇 권이었고 낡은 표지에는 바닷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읽으며 처음으로 실종 사건이 아닌 다른 세계를 상상했다. 도만은 책을 두고 돌아가려다가 잠시 멈췄다. “내가 잊지 않고 계속 찾아봤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게 마음에 남습니다.”
벨라는 그를 바라봤다. “이제부터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죠. 하지만 책을 준 일로 다 괜찮아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도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계속 오겠습니다. 아이들이 원한다면요.”
제7시설의 루카는 학생들의 건의함을 다시 만들었다. 이름을 적지 않아도 위험한 설비를 신고할 수 있도록 했고, 장난 신고가 들어와도 확인 절차를 생략하지 않기로 했다. 미라는 신고 내용을 공개하는 범위를 정리해 주었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고가 무효 처리되어서는 안 됐지만, 그 내용을 모두에게 공개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작은 규칙을 만들었다.
오르반은 낡은 보고서와 새 규칙을 비교해 학생들에게 공개 가능한 부분을 설명했다. 자신의 과거 실수를 이야기해야 하는 자리가 불편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일부 학생은 왜 그때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 척하거나 다른 사람의 지시였다고만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잘못된 절차가 안전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학생들에게 어떻게 확인할 기회를 줄지 설명했다.
정은희는 의료실을 정리하며 하셀의 새로운 치료 계획을 확인했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빨리 회복할지는 알 수 없었다. 삼십 년 전과 지금의 생활이 다르기 때문에 회복에는 몸뿐 아니라 마음의 적응도 필요했다. 은희는 그에게 오래전 공사 이야기만 묻지 않기로 했다. 밖의 날씨가 어떤지, 어떤 차를 마시고 싶은지, 창문이 있는 방이 괜찮은지 같은 질문도 했다. 하셀은 처음에는 그런 질문에 어색해했지만 점차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기계가 멈춘 뒤에도 사람들이 할 일이 이렇게 많군요.” 하셀이 웃으며 말했다.
“기계가 멈추는 것과 사람이 괜찮아지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은희가 답했다.
민규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자신은 시설을 고치고 사람을 꺼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사람이 나온 다음 어디로 갈지, 어떻게 살아갈지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책임지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한 사람이 영웅이 되면 그 사람이 없을 때 다시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날 늦은 오후 케스는 원점 관리실의 감사 계획을 가져왔다. 자동 관리자 지정 기능을 중지하는 절차와 남은 시설의 긴급 구조망을 유지하는 절차가 별도로 적혀 있었다. 일부 사람은 기록망을 당장 모두 없애자고 했고, 다른 사람은 오래된 시스템을 더는 건드리지 말자고 주장했다. 케스는 양쪽 모두에 실제 위험을 보여 주고 단계적으로 안전을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완벽한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
민규는 계획서를 확인하며 한 항목을 추가했다. [구조 요청자는 책임자가 아니다.] 대장 첫 장에서 확인한 그 원칙이었다. 담당자는 현장의 실제 권한과 능력에 따라 정하고, 누가 가장 먼저 도움을 청했는지는 책임 배정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케스는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마법 장치를 고치기 위한 기술 규칙이면서, 동시에 그동안 잘못된 방식으로 운영된 기관을 바꾸기 위한 기본 약속이었다.
밤이 깊자 제7시설의 경비실은 오랜만에 조용해졌다. 루카는 경비실 앞에 작은 종이를 붙였다. [고장 신고는 누구나 할 수 있음. 신고했다고 고장 책임자가 되는 것은 아님.] 미라는 맞춤법을 고쳐 주고, 은희는 웃으면서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도움을 청한 사람에게 먼저 안전한지 물어볼 것.] 민규는 두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오래전 어머니를 구해 달라고 외쳤던 어린아이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근무를 마치기 전에 원점에서 나온 첫 대장을 봉인했다. 수첩에는 [자동 관리 권한 부여 거부. 단독 승인이 아닌 현장별 확인 절차 도입. 잔여 시설 조사 필요.]라고 적었다. 이어 새로 발행된 시설 점검 목록을 열었다. 열한 시설의 이름이 하나씩 나타났다. 서리나루를 제외한 곳들은 대부분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학교가 아닌 병원과 광산도 있었다. 그는 다음 조사를 무리하게 시작하지 않고 담당자들의 회신을 기다리며 우선순위를 정리했다.
그때 책상 위의 낡은 열쇠가 스스로 돌았다. 상자와 함께 도착했던 그 열쇠였다. 그는 열쇠를 사용한 적이 없었고 흰 장갑도 여전히 잠금함 안에 있었다. 열쇠의 끝에 아주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첫 번째 관리자 지정 절차 실패. 대체 수단 개시.]
민규는 열쇠에 손을 대지 않고 셀레나를 불렀다. 그러나 셀레나가 도착하기 전에 경비실의 창문에 낯선 풍경이 비쳤다. 창문 밖은 제7시설의 운동장이 아니라 눈이 내리는 고산 마법학교였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고, 줄의 끝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빈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창문에서 어린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비 아저씨, 여기는 출석을 부르면 한 명씩 없어져요.”
민규는 창문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먼저 운동장에 있는 실제 학생들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셀레나에게 풍경의 출처를 기록하자고 했다. 이 장면이 새로운 유인인지 실제 구조 요청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의 마지막 말은 또렷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방금 열한 번째 종이 울렸어요. 다음 종이 울리면 선생님 이름도 없어져요.”
민규는 새로운 페이지를 펼쳤다.
[다음 구조 요청 접수. 발신지 미확인. 출석 중 인원 소실 주장. 긴급 확인 필요.]
제12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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