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 관리실을 열 수 있는 열쇠는 하나가 아니었다.
방풍 터널에서 나온 서류철을 분석하던 셀레나는 바닥에 같은 규격의 문이 열두 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열한 곳은 이미 알려진 시설로 이어졌지만, 열두 번째는 아무 주소도 없었다. 유일한 표시는 [원점]이라는 작은 단어였다. 그런데 민규가 실제 지도를 겹쳐 보자 그 문은 터널 안쪽 벽과 겹치지 않았다. 위치를 정할 수 없는 문이었다.
“문이 있다면서 위치가 없다니요.” 케스가 툴툴거렸다.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어요. 다만 이 도면이 위치를 알려 주는 도면이 아닌 거겠죠.” 민규가 대답했다. “연결을 보여 주는 설비도는 현장의 지형도와 다르니까요.”
바르트는 열두 번째 문 옆의 각주를 읽었다. [전체 시설의 인원 변동이 0이 될 때 해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생존자들을 구조하려면 인원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이동이 없을 때만 문을 열 수 있다는 조건이라니. 무언가를 구조하려면 아무도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모순이었다.
“계측값 0을 뜻하는 건 아닐까요?” 셀레나가 물었다.
“그렇다면 실제 인원이 아니라 오류값이 0이어야겠죠.” 민규가 답했다. “문구 하나 때문에 사람을 안쪽에 묶어 둘 이유는 없습니다. 무엇이 0인지 먼저 확인합시다.”
정은희는 설계 철자의 차이를 지적했다. 하셀이 남긴 오래된 작업표에는 ‘변동’이라는 단어 대신 ‘미확인 인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그 표현을 바꾸면서 뜻을 뒤집어 버렸다. 원래는 모든 사람이 확인될 때까지 문을 닫지 말라는 안전 규정이었는데, 지금의 장치는 인원 변동이 없을 때만 문을 열도록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이 출구를 잃었을 것이다.
민규는 발굴한 자료의 출처를 정리했다. 하셀의 연필과 함께 발견된 수정표, 제0설계국의 감독 지도, 서리나루역의 오래된 기관사 장부. 서로 다른 자료를 함께 놓으면 수정된 문장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추적할 수 있었다. 케스는 공식 문서 번호를 통해 변경 시점을 찾았다. 사고 직후 ‘원점 개선 명령’이 내려온 날이었다. 사고가 나자 안전을 고치기는커녕 사고를 계속 시험할 수 있도록 조건을 바꿨다는 의심이 생겼다.
같은 시각 제7시설에 남아 있던 루카와 미라는 열한 시설의 연락망을 정리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학교라고 적힌 주소로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광산의 야간 감독관이었다. 그는 마법학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 다만 몇 해 전부터 자기 광산의 작업자 명부에 낯선 이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안전 점검 때마다 직원 수가 맞지 않는다는 불만이 쌓였지만 총국은 ‘측정 오차’라고 답할 뿐이었다.
루카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학교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책상 수와 학생 수가 맞지 않는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른들이 기록이 맞다고 하면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광산에서 일하는 어른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루카는 감독관에게 물었다. “그럼 실제로 일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확인하세요?”
“우리는 퇴근할 때 서로 얼굴을 봅니다.” 감독관이 말했다. “그날 안전하게 밖으로 나온 사람끼리 확인하지. 기계에 기록됐다고 다 나온 건 아니니까.”
루카는 그 대답을 여러 번 곱씹었다. 사람을 세는 일은 기계만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는 미라와 함께 지역별 실제 담당자 명단을 만들기로 했다. 연락 가능한 번호, 근무 시간, 비상 상황 때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지. 민규가 그 명단을 보자마자 “이게 훨씬 쓸모 있겠다”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미라는 루카에게 이름을 쓸 때 조심하자고 했다. 담당자 명단이 또 다른 자동 관리 장치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식별하는 비밀 정보를 적지 않고 공개해도 되는 업무 연락처와 역할만 정리했다. 통신이 끊긴 곳에는 ‘미확인’이라고 표시했다. 실종 사건을 겪은 뒤 처음으로 자신들이 누군가를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바르트는 원점의 설계 도면을 다시 그렸다. 열두 개의 문이 각기 독립된 것이 아니라 가운데의 공용 판정 회로를 거쳐 연결돼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시설마다 바깥으로 열리는 수동 출구가 있는데도 중앙에서 허가를 받게 만든 것은 후대의 개조였다. 원래는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서 판단해 출구를 열 수 있었다. 바르트는 그것이 흔한 안전 설계라고 말했다. “화재가 났는데 멀리 있는 사무실 도장을 받아야 문이 열린다면 그건 출구가 아니야.”
민규는 도면의 공용 회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한 시설에서 인원이 늘었다고 표시되면 다른 시설에서 같은 수를 줄이는 장치였다. 전체 합계를 일정하게 맞추는 데는 편했겠지만 사람에게 쓰기에는 위험했다. 마법학교 학생 한 명이 늘었다는 이유로 광산 노동자 한 명의 존재가 기록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둘은 서로 만나 본 적도 없을 텐데, 기계 안에서는 같은 숫자로 취급됐다.
“처음 이걸 고친 사람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셀레나가 물었다.
바르트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빠르고 정확한 숫자를 보고 싶었겠지. 그런데 수가 틀리는 게 사람 때문인지 기계 때문인지 구분하려고 하진 않았나 봐.”
민규는 두 사람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이 처음 이 학교의 경비 일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기숙사 복도의 전등이 한꺼번에 꺼져도 마법진 전체를 의심하기 전에 차단기부터 확인했다. 실제로는 다른 구역의 전기 설비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많았다. 전등이 꺼졌다는 사실과 누군가 전등을 껐다는 설명은 다른 것이었다. 그 차이를 인정하면 문제를 찾을 시간이 생긴다.
오후 늦게 병원의 간호사가 통신으로 작은 사건을 알렸다. 사용하지 않는 빈 병실의 침대 수가 갑자기 하나 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침대를 옮긴 사람은 없었다. 병원은 신규 환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실무자는 기계의 표시가 맞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러나 옆 병실의 간호사가 직접 확인하고 ‘실물 침대 추가 없음’이라고 기록했다. 중앙에서는 그 확인을 오류라고 알렸다.
“잘하셨습니다.” 민규가 말했다. “문제가 발생한 곳에서 확인한 기록이 중요합니다. 오류 표시가 나오는 이유는 따로 조사하겠습니다.”
간호사는 안도하면서도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럼 우리 병원에도 갑자기 사람이 사라질 수 있나요?”
민규는 괜찮을 것이라고 쉽게 답하지 않았다. “그 위험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금 실제 병원에 계신 분들을 직접 확인하시는 방법과 외부 연락망을 유지해 주세요. 위험이 발견되면 지체하지 않고 알려 주셔야 합니다.”
통화를 끝낸 뒤 그는 출입대장에 연락 시각을 적었다. 한 시설의 불안이 다른 시설의 위험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바꾸려면, 먼저 각 현장이 실제로 무엇을 경험하는지 알아야 했다. 열두 번째 문에서 누가 서명하라고 요구하더라도 그 일은 대신할 수 없었다.
그날 오후 티에른이 제0설계국 내부 기록 한 장을 가져왔다. 정식 반출 허가가 없는 문서였기에 그는 원본을 넘기지 않고 공개 가능한 항목의 번호와 발행 시각만 확인해 주었다. 자신이 규정을 어겼다고 숨기지도 않았다. 케스는 “기록의 신뢰를 확인한 뒤 공식 절차로 확보하겠다”고 대답했다. 티에른의 선택은 도움이 되었지만 그가 가져온 자료가 곧 진실로 판정된 것은 아니었다.
문서에는 제0설계국의 ‘총괄 관리실’이 실제로 근무자와 근무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 대신 각 시설에서 진행되는 실험의 결과를 모아 다음 관리 책임자를 자동으로 지정했다. 관리자라는 직위는 한 사람의 권한이 아니라, 시스템이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자리였다. 티에른은 그것을 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의 명함에 적힌 직급과 관리실의 규칙이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면 제0설계국의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케스가 물었다.
티에른은 대답하기 전에 시간을 끌었다. “제가 입사할 때는 상부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실제로 만나지 못했어요. 보고서에 서명하면 상부로 올라간다고 했지만, 서명한 보고서가 다음 날 제 책상으로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민규는 그 말을 듣고 출입 관리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원점은 여러 시설을 연결하지만 관리 책임자가 없다. 그렇다면 시설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할 책임을 나누어 맡을 수 있도록 외부의 실제 담당자들이 모여야 했다. 그는 열한 시설에 연락을 보냈다. 자동 장치의 이름을 믿지 말고, 실제 인원과 출구의 안전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응답은 고르지 않았다. 한 병원은 수리 중인 병동을 맡은 간호사가 직접 현재 환자 수를 확인해 주었다. 오래된 광산에서는 안전 감독관이 갱도에 들어가지 말라며 무전으로 항의했다. 다른 곳에서는 건물은 존재하지만 직원은 이미 오래전에 떠났다고 했다. 민규는 모든 곳을 같은 형식으로 묶지 않았다. 병원은 의료진의 절차를, 광산은 광산의 안전 규칙을 따르도록 했고, 마법학교는 학생 보호를 우선하도록 했다.
저녁이 되자 원점의 열두 번째 문에 첫 반응이 나타났다. 병원에서 보낸 확인 기록이 도착하자 열두 개의 칸 가운데 하나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곧바로 다른 칸이 붉어졌다. 그곳은 광산이었다. 셀레나가 광산 담당자에게 연락하자 실제 사고는 없었다. 다만 중앙 장치가 병원의 ‘안전 확인’을 광산의 ‘인원 부족’으로 바꿔 기록한 것이다. 한 사람의 확인이 다른 사람을 지우는 구조였다.
“검사하면 검사할수록 서로를 위험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군요.” 바르트가 말했다.
민규는 열두 개의 칸을 가만히 보았다. 이런 방식이라면 모든 시설의 값이 동시에 0이 되는 순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 사람이 있는 한 기록은 계속 어긋났다. 그리고 그 어긋남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누군가 새로운 관리자가 되어야 했다. 이 구조를 고치지 않으면 하셀 한 명을 구해도 다른 곳에서 또 사고가 날 수 있었다.
그때 방풍 터널의 열두 번째 칸에서 짧은 금속음이 들렸다. 누구도 입구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오래된 철문 위에 문고리가 생겼다. 문고리 아래에 작은 인원표가 나타났다. [관리실 출입 예정 1명. 결원 보충 대상: 정민규.] 민규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출입한 적 없는 장소에 다시 이름이 붙고 있었다.
은희가 아들을 바라봤다. “너 혼자 저기 들어가면 안 된다.”
“알아요, 엄마.”
“네가 가겠다고 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그래도 또 누군가 급하다고 하면 네가 먼저 움직일까 봐.”
민규는 대답하기 전에 구겨진 도면을 펴 보였다. “이번에는 다 같이 방법을 찾을 겁니다. 제가 혼자 들어가서 사람을 대신하는 방법은 쓰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하셀에게서 새 신호가 도착했다. [내가 그 문 옆에 도착했어요. 밖에서 절대 인원표를 맞추지 마세요. 안쪽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지키고 있던 기록들이 있어요.] 민규는 그 말을 들은 뒤 비상 통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셀이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반가웠지만, 그가 지키고 있다는 기록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밤새 원점의 도면을 복사하던 직원은 자신도 모르게 출입대장에 날짜를 잘못 적었다. 세 시라고 쓴 숫자가 다음 날 아침으로 바뀌었다. 그는 지우개를 들었다가 민규의 요청을 기억하고 두 기록을 나란히 남겼다. 실제로 쓴 시각과 기계가 바꾼 시각을 구분하면 오류가 언제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케스는 직원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직원은 처음으로 자신의 실수가 누군가를 지우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제0설계국의 예전 규칙이라면 잘못 적힌 시각을 고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출입 기록을 옮겨 놓았을 것이다. 그 작은 차이가 이제는 중요했다. 기록을 고친다는 이유로 실제 사람의 시간을 바꾸지 않는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셀레나는 바뀐 기록을 분석해 같은 유형의 자동 수정이 여러 시설에 적용된 흔적을 발견했다. 한 시설에서 모자란 값을 채우기 위해 다른 시설의 값을 빌리는 회로였다. 회로만 보면 효율적인 계산이었지만 사람에게 적용하는 순간 위험해졌다. 숫자가 잘 맞는다고 해서 사람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민규는 원점 앞에 붙인 임시 안내문에 한 줄을 더 썼다. [실제 현장과 맞지 않는 기록은 수정하지 말고 먼저 확인할 것.] 바르트는 그 아래에 볼트 모양의 낙서를 그렸다. 누군가 도면을 책상 위에서 고칠 때는 적어도 현장의 볼트 하나가 실제로 어떻게 조여 있는지 떠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티에른은 낙서를 보고 조용히 웃었다. 제0설계국의 내부 교육에서는 결재가 빠르고 매끈하게 돌아가면 잘 운영되는 기관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낡은 볼트 하나를 확인하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의 새 보고서에 적기로 했다.
문고리 아래의 인원표가 또 한 번 깜박였다. 이번에는 정민규의 이름이 지워지고 낯선 문장이 들어갔다.
[미확인 인원 해소 수단: 시설 간 인원 대체.]
민규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누군가를 대신 넣지 않습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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