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구조 대상의 신원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정민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만난 기록망은 이미 여러 번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정은희의 음성으로 거짓 안내를 방송했고, 경비원 민규의 얼굴을 이용해 학생의 출입을 막았다. 방풍 터널 밑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 역시 제0설계국이 새로 만든 시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음성이 실제로 긴 기침과 거친 숨을 섞어 내고 있다는 점은 놓칠 수 없었다.
“그쪽에는 몇 명이 계십니까?” 민규가 다시 물었다.
“나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끔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납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잠시 긴 침묵이 있었다. “하셀이라고 불렀던 시절이 있었죠.”
은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을 꽉 쥐었다. 민규는 어머니가 서둘러 확신하지 않도록 조용히 옆에 섰다. 은희는 통신관 가까이에서 말했다. “하셀 씨. 보건실의 세 번째 수도꼭지 기억하세요?”
“물이 안 나오는 걸로 표시한 수도꼭지요?”
“그걸 왜 고쳤는지 기억하시나요?”
남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다리 없이 손을 씻을 수 있게 높이를 낮췄죠. 수도꼭지는 고장 난 게 아니었고 배관이 뒤쪽에서 눌려 있었어요.”
은희는 눈을 감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목소리가 맞는지 확정하는 대신 말했다. “그 일은 제가 기억하고 있어요. 더 질문해도 될까요?”
“예. 지금은 질문을 받을 시간이 많습니다.” 남자는 힘없이 웃었다.
하셀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기 어려워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곳은 급수탑의 설비실이었다. 구조 장치에 사고가 나자 동료를 밖으로 내보내고 직접 수동 밸브를 잠갔다고 했다. 그 뒤로 바닥의 날짜가 조금씩 달라졌다. 아침에 고친 파이프가 다음 날이면 다시 부러져 있었고, 자신이 쓴 작업 일지가 쓰기 전 상태로 돌아갔다. 몸은 늙었지만 문 밖에서는 늘 같은 사고가 반복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왜 지금에 와서 호출한 겁니까?” 케스가 물었다.
“호출은 처음부터 보내고 있었어요. 누군가 받고도 계속 실험 기록으로 돌렸을 겁니다. 구조 신호를 검증 시험의 응답으로 바꾸면 아무도 나를 구조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마지막 문장을 말하다 또 기침했다. 민규는 통신관을 통해 물과 공기 상태를 물었다. 하셀은 벽에서 맺히는 물을 받아 마셨고 오래된 산소 정화 설비가 간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답했다. 의료진은 그런 상태라면 급격히 문을 열거나 체온을 바꾸는 일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민규는 물과 공기의 공급 경로를 확인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올렸다.
셀레나는 하셀의 음성 파형을 기존 수기와 대조할 수 없었다. 필체와 음성은 서로 다른 증거였다. 대신 그가 설명한 기계의 구조를 실제 도면과 비교했다. ‘배압을 먼저 낮추고, 인입 밸브를 닫고, 마지막에 배출부를 열 것.’ 순서는 오래된 설계도에 적힌 것과 같았다. 다만 서리나루에서 발견된 개조 도면에서는 마지막 단계가 삭제돼 있었다. 누군가 구조를 끝낼 수 없는 순서를 공식 매뉴얼로 만든 것이다.
“말씀하신 순서대로 하면 사람이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원래는 가능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바닥이 두 날짜에 걸쳐 있습니다. 설비만 열면 제 몸은 남고 이름만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민규는 대답 대신 현장 기록을 넘겼다. 이름을 먼저 꺼내 놓고 실제 사람을 남겨 둔 사건을 이미 여러 번 겪었다. 누군가는 신분증만 되찾았고, 누군가는 가족이 알고 있던 이름을 되찾는 데 오래 걸렸다. 하셀의 설명은 그들과 닮아 있었다. 그러므로 ‘구조 완료’라는 표기를 미리 받을 수 없었다.
한편 바르트는 급수탑 안쪽에서 작은 금속통을 찾아냈다. 물이 새지 않도록 여러 겹 감아 둔 통이었다. 그 안에는 반쯤 닳은 연필, 접이식 자, 누렇게 변한 작업표가 들어 있었다. 연필 끝에는 물린 자국이 있었다. 하셀은 도면 위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연필을 깨물던 버릇이 있다고 은희가 말했다. 은희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통의 위치와 봉인 상태를 사진으로 남겼다.
작업표에는 수십 개의 수정선이 그어져 있었다. 겉으로 보면 지저분한 낙서였지만 민규는 선을 하나씩 따라가 보았다. 굵은 선은 사고 때 막혀 버린 통로를, 가는 선은 원래 살아 있어야 할 환기구를 나타냈다. 중요한 것은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그려 놓은 화살표였다. 화살표는 출입문이 아니라 배수구를 향하고 있었다. 사람이 서서 지나가는 길이 아닌, 비상시 공기와 물이 빠져나갈 길이었다.
“이걸 통째로 열면 안 되겠네요.” 민규가 말했다.
“왜?” 바르트가 물었다.
“사람이 지나는 문은 문대로 열되, 먼저 물이 빠져나갈 길을 살려야 합니다. 바닥이 내일에 있다고 했잖아요. 압력이 갑자기 바뀌면 안쪽 날짜를 잡고 있는 지지대까지 움직일 수 있어요.”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고 작업표를 다시 보았다. 그는 민규의 추측이 맞는지 실제 구조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시설의 형상만큼은 마법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누가 어디에 있는지 지울 수 있어도 낡은 볼트에 걸리는 하중은 남았다. 긴 계산 끝에 바르트가 말했다. “맞아. 먼저 압력 차를 줄여야겠어. 내일과 오늘이라는 말이 이상하지만, 건물에는 실제로 힘이 걸려 있어.”
민규는 하셀에게 통 안의 연필을 찾았다고 알렸다. 통신관에서는 오래도록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가 물었다. “연필 끝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짧지만 쓸 수는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 그걸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내가 처음 안전 설계를 바꿨을 때 썼던 연필입니다. 마지막 도면도 그걸로 고치려 했어요.”
은희가 조용히 말했다. “그 연필이면 한 번쯤은 밖에 나와 직접 쓰셔야지요.”
남자는 답하지 못했다. 통신관에서는 공기 공급기의 낮은 진동만 들렸다. 민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섞인 긴 세월을 느꼈다. 하지만 이 순간 감정 때문에 순서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금 바닥 밑에 있는 사람을 구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오래된 관계를 확인하는 일과 실제로 생존자를 꺼내는 일은 함께 해야 했다.
저녁을 앞둔 시간에 은희가 오래된 사진을 가져왔다. 의료실 서랍 맨 뒤에 넣어 두었던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 속 하셀은 젊었고, 지금의 민규보다 조금 더 마른 얼굴이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아직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은희는 사진을 아무에게나 보여 주지 않았다. 이름을 알아보기 어려운 학생들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하셀의 모습과 작업복에 붙은 명찰 부분만 확대해 대조했다.
“그때도 하셀 씨는 사진 찍기를 싫어했어.” 은희가 말했다. “공사를 마치고 모두 모였을 때 겨우 한 장 찍었지. 작업복에 종이를 잔뜩 꽂고 다녀서 학생들이 ‘걸어 다니는 도면’이라고 불렀어.”
민규는 사진 속 인물이 지금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사진 뒷면에 하셀이 직접 남겼다는 짧은 메모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사람은 반드시 마지막에 나온다.’ 지금의 원점 기록망과 정반대되는 문장이었다. 그곳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문을 확인한 사람이 영원히 관리자 자리를 떠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은희는 사진을 보며 오래전 다툼을 떠올렸다. 하셀은 완공 전날 배기 장치의 검사를 한 번 더 하자고 했는데 설계국 직원은 시험 일정이 늦어진다며 거절했다. 하셀은 굳이 사람들 앞에서 위험을 설명했다. 장치가 사람의 이동을 감지한다는 이유로 인명 판정까지 맡기는 것은 설계 목적을 벗어난 일이라고 했다. 그날은 아무도 크게 다투지 않은 것처럼 끝났지만, 다음 날 그의 이름은 작업표에서 지워졌다.
“왜 그때 바로 신고하지 않았어요?” 민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신고했어. 그런데 신고한 사람이 검사를 방해했다는 답을 받았어. 그때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몰랐지.” 그녀는 아들에게 과거를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몰랐는지 전하려 했다.
그 말을 들은 민규는 현재의 시설에도 같은 일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구조를 요청한 사람이 오히려 관리자 후보가 되고, 위험을 신고하면 시험 비협조자가 되는 방식. 그것은 누군가의 악의 한 번으로만 생긴 사고가 아니었다. 매번 위험을 보고한 사람에게 문제 해결의 모든 책임을 넘겨 버렸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은 구조였다.
케스는 사진의 명찰을 증거 목록에 넣을지 물었다. 은희는 하셀의 동의를 먼저 받아야 한다고 했다. 살아 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더라도 그의 사진과 신분이 마음대로 쓰여선 안 됐다. 민규는 그 태도가 반가웠다. 오래전에는 이름과 사진을 훔쳐 문제를 만든 사람들 때문에 수많은 가족이 고통받았다. 이제 구조팀은 누군가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밤이 오자 바르트가 작업표의 접힌 부분을 펼쳤다. 작은 연필 자국들이 새로 드러났다. 직선과 꺾인 선이 이어지는 것이 마치 철도의 선로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선들은 실제 거리를 표현하지 않았다. 어느 통로에서 어느 안전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나타냈다. 서리나루의 옛 노선도에서 확인했던 방식과 같았다. 모든 지도가 좌표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꺼내기 위한 지도에는 출구의 관계가 더 중요할 수 있었다.
민규는 연필의 작은 화살표와 도면의 선을 함께 놓고 보았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쪽에서 보면 배관 통로지만 안쪽에서 보면 작업자 대피로였다. 한 사람이 들어가는 방향과 나오는 방향이 달랐다. 이 차이를 무시하면 구조팀이 안쪽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바깥의 통로를 닫을 수 있었다. 그는 두 방향의 그림을 따로 그려 놓고 동료들에게 보여 주었다.
“어떤 길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이름이 다른 거군요.” 셀레나가 말했다.
“그렇죠. 그래서 실제로 양쪽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도면 하나만으로 길이 열렸다고 말하면 안 돼요.”
도만이 밤늦게 통신으로 연락했다. 방풍 터널에서 기적 소리가 다시 들렸는데 이번에는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이었다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예전 신호와 반대였다. 바르트는 실험을 위해 남겨 둔 환기 장치를 확인했고 아무도 설정을 바꾸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신호가 바뀐 것이라면 누군가 안쪽에서 다른 방법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민규는 하셀에게 새로운 신호가 무엇인지 물었다. 통신관에서는 숨소리가 길게 들렸다. 하셀은 대답하기 전에 연필을 찾아 주었느냐고 물었다. 그 연필에 남겨 놓은 표시를 따라가면 안전한 쪽과 위험한 쪽을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신호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움직였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민규는 구조팀의 이동 동선을 다시 확인하고 준비되지 않은 통로는 열지 않기로 했다.
그날 밤, 하셀은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사고를 설명했다. 제0설계국이 개조한 계수 장치는 열한 시설을 하나의 건물처럼 취급하려고 했다. 어디에서 사람이 늘어나면 다른 시설의 인원을 줄여 기록을 맞추는 방식이었다. 하셀은 그런 방식으로는 구조 대피가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 무게를 재는 저울을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는 심판으로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설계국은 그의 경고를 접수한 뒤 ‘시험 비협조’로 분류했다.
“그럼 최초 실험의 설계자가 하셀 씨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케스가 확인했다.
“저는 비상 출구를 설계했어요. 그 비상 출구를 열기 위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름이 필요하다고 만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민규가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통신관의 잡음이 커졌다. 하셀의 숨소리 사이로 두꺼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셀레나는 그것이 제10관찰자의 음향 패턴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화면 위에 글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설계 반대자 하셀. 현장 기억 회수 승인.]
하셀이 낮게 외쳤다. “아직 듣고 있습니까? 내 연필을 보세요. 거기에 이름이 아니라 방향을 남겨 놨습니다.”
연필을 쥔 바르트가 움직였다. 연필의 나무 부분은 오래 물려 닳아 있었고, 마지막 면에 작은 화살표가 파여 있었다. 화살표는 북쪽을 가리키지 않았다. 돌려 보면 언제나 연필을 쥔 사람의 왼쪽을 가리켰다. 실제 자석이 아니라 오래된 장치의 힘이 방향을 고쳐 놓고 있었다.
“왼쪽에 뭐가 있죠?” 케스가 물었다.
민규는 통신관과 연결된 급수탑의 왼쪽 벽을 비추었다. 거기에는 작업표에 나오지 않는 작은 철문이 있었다. 문 위에는 [작업자 대피]라는 표시가 절반쯤 벗겨져 있었다.
그 순간 하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거기로 나가면 나를 구할 수 있어요. 다만 나를 지운 기록도 같이 따라 나옵니다. 그 기록이 새 사람을 찾지 못하게 해 주세요.”
제11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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