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무실의 문패는 바뀌었지만 문은 아직 닫혀 있었다.
정민규는 그 차이를 보고 먼저 숨을 돌렸다. 제0설계국이 역 전체를 장악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렀다. 문패의 글씨가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플랫폼의 열차와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역장은 문패를 보며 자신의 사무실을 빼앗긴 듯 분노했지만, 민규는 그에게 제안했다. “지금까지 이 역의 책임자는 역장님입니다. 근무 명령서를 확인하기 전엔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넘기지 마세요.”
티에른은 소속 신분증을 내려놓았다. 그가 가지고 있던 제0설계국의 지침에는 ‘현장 관리자 후보를 안전 상황의 최종 책임자로 간주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누가 실제로 그 일을 맡겠다고 했는지보다 시스템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민규는 제7시설에서 어린 자신의 구조 요청을 동의서로 바꾼 수법과 같다고 느꼈다.
“제 이름을 문패에서 지울 수 있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지울 수는 있습니다.” 티에른이 답했다. “하지만 지우면 조정실이 다른 사람을 관리자로 지정합니다.”
“그럼 이름을 지우는 게 해결책이 아니겠군요. 저 명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건물 운영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셀레나는 열한 시설의 연결 상태를 하나씩 기록했다. 서리나루의 신호가 거점처럼 쓰이기 시작했지만 실제 출입 통로가 열리는 곳은 세 곳뿐이었다. 다른 시설들은 문패나 표시만 바뀌었고 건물 자체의 변화는 확인되지 않았다. 케스는 원격 연결이 된 지역 담당자들에게 일방적인 관리권 변경을 승인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사람을 교체하지 않고도 현장을 유지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한편 대피소의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방송에 놀라 있었다. 벨라는 자기 옛 교복을 벗어 대기실 의자에 올려놓았다. “이제 교감이라고 불러 주지 않아도 돼.” 로제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뭐라고 부르면 좋아요?” 벨라는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벨라라고 부르면 돼. 내 이름을 듣고 싶어.”
이름을 되찾은 사람과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사람이 같은 방에 있었다. 젖은 교복의 아이는 온유가 된 아이 옆에 앉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적기 시작했다. 따뜻한 빵, 비가 그친 뒤의 돌 냄새, 물통을 흔들 때 나는 소리. 그는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부터 적고 싶다고 했다. 민규는 그 말을 듣고 메모했다. 사람을 확인하는 방법을 찾는 동안, 정작 당사자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먼저 들을 필요가 있었다.
역장실 밖에 붙은 새 문패를 보며 주민들이 수군거렸다. 누군가는 이 마을에 큰 기관이 들어온 것 아니냐고 했고, 누군가는 역이 통째로 옮겨지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민규는 마을 사람들에게 확실하지 않은 위협을 단정해 말하지 않았다. “시설 이름이 저절로 바뀌는 현상이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현재 역사 출입은 가능하고 열차 운행은 점검 중입니다. 이동이 필요한 분은 역무원의 안내를 따라 주세요.” 설명은 짧았지만 주민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케스는 역장의 요청으로 임시 안내문을 작성했다. 제0설계국의 승인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문장을 지우고, 각 기관의 실제 연락처와 담당자를 넣었다. 종이 한 장이 관리권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잘못된 명령을 받은 사람이 어디에 문의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그는 보호기관에 권한을 넘기는 과정에서도 학생들에게 동의와 설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셀레나는 백종 학원의 교실과 역무실의 문패 변화 사이에 공통된 마법 파형을 발견했다. 둘 다 사람이 결재한 적이 없는데 이름이 자동으로 입력되었다. 그러므로 제0설계국의 최종 목표가 특정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적힌 서류를 보고 그 임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인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민규는 두 가능성을 모두 기록했다.
그가 역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루카에게서 통신이 왔다. 소율이 운동장의 오래된 나무 옆에 앉아 오늘은 스스로 정한 시간에 산책을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작은 일이지만 민규는 기뻤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시험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였다. 민규는 새 시설들에서도 같은 하루를 빼앗긴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큰 비밀의 진상보다 먼저 그 사람들의 출구를 찾아야 했다.
오후에는 서리나루 시청의 복지 담당자와 학교 교육청의 조사관이 도착했다. 둘은 서로 다른 서류를 갖고 왔지만 공통적으로 ‘실제 구조 인원을 확인하고 지속적인 보호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케스는 그들과 공식적으로 협의해 임시 보호를 나눠 맡도록 했다. 제0설계국이 한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던 계획은 여러 사람의 실질적인 협력 앞에서 흔들렸다.
바르트는 통신관으로 낡은 계근기의 수리 도면을 전송했다. 도면 아래에는 원래의 제작자 서명이 있었다. ‘하셀’. 민규는 이름을 읽고 놀랐다. 제7시설의 피난동 설계에 관여했던 기술자였다. 하지만 도면의 가장자리에는 다른 손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본 장비를 인명 판정 목적으로 쓰지 말 것. 계측값은 설비 점검 참고용.’ 누군가 이 경고를 일부러 가리고 학생 수를 결정하는 기계로 바꾼 것이다.
“하셀이 이런 장치를 만들었다는 뜻입니까?” 케스가 물었다.
“그분의 기계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겠죠.” 민규가 대답했다. “기계가 어디에 쓰였는지를 봐야 합니다.”
티에른은 도면을 보자 표정이 굳었다. 제0설계국의 내부 목록에서는 하셀의 이름이 ‘안전 설계 반대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사람의 안전을 우선하라는 문구를 남긴 기술자였다. 그를 반대자로 기록한 이유는 장치가 사람을 판정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민규는 한 사람의 평가를 뒤집기 위해 감정적인 반론을 쓰지 않았다. 도면과 개조 흔적, 수정 날짜를 나란히 제출했다.
오후 세 시, 역무실의 문패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관리자 지정 실패. 공용 조정 권한 임시 보류.] 그와 동시에 열한 시설에서 울리던 종소리가 멈췄다. 셀레나는 마력 반응이 낮아진 것을 확인했지만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다른 시설의 실제 상황을 아직 보지 못했다. 오히려 무너진 자동 명령이 현장 직원에게 예상치 못한 부담을 줄 수 있었다.
민규는 역장과 마주 앉아 다음 점검 일정을 정했다. 창고는 즉시 폐쇄하는 대신 구조팀이 출입을 관리하고, 내부에 남은 사람이 없는지 일정한 간격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객차에는 별도의 안전 표지를 붙이고 실제 차량 번호가 왜 사라졌는지 조사하게 했다. 학교가 학생을 받아야 한다는 홍보물은 철거했다. 누구도 확인되지 않은 기관으로 아이를 보내서는 안 됐다.
“그럼 백종 마법학원은 사라지는 겁니까?” 로제가 물었다.
“학교라는 이름을 썼던 장소는 남아 있지.” 민규는 대답했다. “하지만 안전한 학교인지 먼저 확인해야 해. 지금은 아이를 보내지 않는 게 맞아.”
온유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그럼 학생이 아닌 건가요?”
“학생이었을 수도 있고 앞으로 다른 학교에서 공부할 수도 있겠지. 그건 여러분이 결정할 일이야. 여기서 누군가의 숫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지 담당자는 벨라에게 도시의 성인 학습 과정을 소개했다. 서류에 적힌 나이가 불명확하더라도 바로 신청할 수 있는 기초 수업이 있다고 했다. 벨라는 웃으면서도 잠깐 망설였다. “저는 오랫동안 남을 가르쳤는데, 다시 학생이 되는 게 괜찮을까요?” 담당자는 원하면 배우고 원하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대답을 들은 벨라는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의사를 묻는 상황을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였다.
온유와 다른 아이는 같은 탁자에서 그림을 그렸다. 온유가 바다를 그리면 다른 아이는 기차역의 붉은 지붕을 그렸다. 두 그림은 닮지 않았다. 민규는 그 차이가 마음에 들었다. 서로 같은 기억을 가졌다는 이유로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할 의무는 없었다. 잠시 뒤 이름을 정하지 않은 아이는 자기 그림 아래에 점 하나를 찍었다. 이름 대신 서명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민규는 그 점도 남겨 둘 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역장은 학생들의 물건을 임시로 보관할 작은 방을 마련했다. 소지품을 찾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본인이 기억하는 물건의 특징을 말하게 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서두르지 않고 함께 확인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누가 먼저 번호를 적었는지보다 누가 실제로 그 물건을 사용했는지가 중요했다. 민규는 그 절차를 확인한 뒤에야 오늘의 현장 점검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저녁이 되자 서리나루의 바다에는 낮게 안개가 깔렸다. 도만은 구조된 아이들이 역에 남아 있지 않도록 보호소 차량을 안내하고 난 뒤 민규에게 오래된 차표 한 장을 건넸다. 서른여섯 해 전 그가 신고했던 날의 표였다. 오늘 날짜로 바뀌어 있던 차표가 갑자기 본래 날짜를 되찾았다고 했다. 뒷면에는 연필로 그린 아이 다섯 명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민규는 차표를 들고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아이 다섯 명을 모두 구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래전 그 역을 지나간 아이가 누구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구한 사람들 가운데 옛날 학생이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현재의 구조와 과거의 진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티에른은 귀환 열차를 타기 전 보고서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제0설계국의 시설이 열한 개로 등록돼 있지만 감독 지도는 열두 장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민규는 첫 번째 우편물에서 학교가 열한 개라고 쓰여 있던 걸 떠올렸다. 그런데 감독 지도에는 열두 번째 표시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름이 없고 좌표도 없었다. 다만 ‘원점’이라는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저는 거길 본 적이 없습니다.” 티에른이 말했다. “내부 직원들도 이름 대신 원점이라고 불렀어요. 첫 번째 실험을 설계한 사람이 그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죠?”
“누구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고서는 늘 그 사람 이름으로 결재됐습니다.”
민규는 종이를 받은 뒤 티에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라도 현장에서 본 대로 보고하세요.” 티에른은 한참 서 있다가 돌아갔다. 그는 훌륭한 협력자가 될 수도, 여전히 위험한 기관의 직원일 수도 있었다. 민규는 그를 동료라고 부르기 전에 행동을 확인하려 했다.
돌아가는 열차에서 셀레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가 백종에서 모두를 구했을까요?”
민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인이 끝나지 않았어요. 다만 예전처럼 네 명을 졸업시켰으니 끝났다고 하진 않겠죠.”
케스가 덧붙였다. “열한 시설을 다니려면 인원이 더 필요할 겁니다.”
“다니기 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죠.”
학교에 도착하자 루카가 출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율과 미라, 정은희도 있었다. 아이들은 바다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민규는 물고기보다 오래된 창고를 더 많이 보았다고 답했고, 루카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여행이었겠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수첩을 보여 달라는 말에는 민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구조된 아이들의 정보가 있어서 함부로 보여 줄 수 없었다.
밤 열두 시를 앞두고 경비실에서 정식 회의가 열렸다. 서리나루 현장 기록을 정리하고, 모든 시설에 ‘실제 인원 확인 전 자동 정원 승인 금지’라는 안내를 보낼지 검토했다. 은희는 보호자의 동의 없이 의료 정보를 공유하지 말자고 했다. 바르트는 혼자 출장을 가지 않겠다는 문구를 굵게 써 붙였다. 민규는 그 종이를 보고 웃었다. 자신의 이름이 어쩐지 빨간 밑줄까지 그어진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난 뒤 민규는 문 앞에 놓인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에는 서리나루에서 본 적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열한 개의 작은 원이 큰 원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상자를 열자 하얀 장갑 한 켤레와 낡은 열쇠, 그리고 ‘원점 관리실’이라는 글씨가 적힌 안내서가 나왔다. 안내서 첫 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두 번째 시험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첫 현장은 당신이 선택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민규는 웃음을 거뒀다. 서리나루로 가기로 결정한 사람은 분명 자신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선택까지 예정된 행동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장갑을 바로 끼지 않았다. 열쇠를 잠금함에 넣고 상자의 접수 시각을 기록했다.
그때 안내서 뒷면에서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원점 관리실 비상 호출. 발신자: 하셀. 현재 상태: 구조 요청 중.]
삼십 년 전의 설계자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구조 요청이 사실이라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민규는 서류를 접어 동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출입대장에 다음 근무 항목을 적었다.
[원점 관리실. 위치 미확인. 출입 권한 미확인. 구조 요청 접수. 단독 출동 금지.]
제11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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